17세기 조선의 세 갈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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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조선의 세 갈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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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란 너머로 접혀졌던 다른 세계가 펼쳐지다

그리하여 3백 년간 민족의 생명력을 먹어치우고, 정신을 시들게 하고, 양심을 숨 막히게 하고, 생명을 깎아먹는 고치지 못할 병이 생겼다. 이른바 당쟁이란 것이다.

-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중에서 -

조선 초기의 인물들은 크게 개국공신 훈구파(勳舊派)와 그 밖의 사림파(士林派)로 나뉘었다. 정치판에서 훈구파가 서울에 사는 실세(實勢) 주류였다면, 사림파는 시골에 사는 관변(官邊) 비주류였다. 시골사람들은 주로 과거에 급제하면서 출세하였다. 사림은 자기 고향에서 도학(道學)을 연구하고 후진을 가르치며 지내다가, 중앙에서 벼슬할 때 임시로 서울에 와 있었다.

김종직(1431-92), 김굉필(1454-1504), 조광조(1482-1519)는 초기 사림파 인맥의 봉우리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른바 4대 사화(士禍)를 거치면서 처참하게 옥사(獄事) 당했다. 이를테면, 왕은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사림파를 중용했다가 사림파가 커지면 가차 없이 제거해버렸다. 연산군(1476-1506), 중종(1488-1544), 명종(1534-67) 이들은 줏대 없는 임금의 표상이다.

16세기 중반까지 사림파가 계속 당했지만, 그 사이 훈구파도 소진되어 중앙정계는 대거 진출한 사림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지역을 기반으로 붕당(朋黨)이 형성되었는데, 특히 퇴계 이황(1501-70)을 좌장으로 하는 영남학파가 그 대표적인 파벌이었다. 영남 사람들은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국통(國統)을 이어왔다는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영남학파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권력에 대하여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자연스레 따로 모여 기호학파를 형성하고, 율곡 이이(1536-84)를 상징적인 영수로 받들었다. 여기서 기호(畿湖)는 서울 근처와 충청도를 가리킨다. 기호학파에는 당시 갈데없던 잔존 훈구파와 척신(戚臣)까지 합세하였다. 이렇게 볼 때 기호학파는 영남학파에 비해 내부 결속력이 뒤떨어졌다.

구봉 송익필(1534-99)은 기호학파의 내막적인 지도자였다. 구봉은 신사무옥(1521)을 일으킨 부친의 허물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들어나는 것을 꺼려했다. 그러나 그는 율곡에게 성리학에서도 결코 꿀리지 않았고, 행동에 구체적 지침을 주는 예학(禮學)에 대해서는 전문가였다. 구봉의 예학은 제자 김장생(1548-1631)에서 대성하고, 송시열(1607-89)로 이어져 활약한다.

이조정랑은 정6품의 직책이지만 신세대의 인사권을 품의하는 실무책임을 가졌다. 따라서 이 자리는 정권유지의 핵이다. 서대문 근처에 살던 기호학파 심의겸(1535-87)과 동대문 근처에 살던 영남학파 김효원(1542-90)은 이조정랑 자리를 놓고 한판 승부를 벌렸다. 1575년 느슨한 형태의 붕당은 마침내 김효원 쪽의 동인과 심의겸 쪽의 서인으로 당파의 경계를 명확하게 그었다.

동인과 서인의 날카로운 대립은 왜란의 가능성을 살피러 보냈던 통신사의 에피소드에서 잘 드러난다. 서인 황윤길이 “있다”라고 하니까, 동인 김성일은 여기에 빗대어 “없다”라고 보고한 것이다. 이 정도로 관료들의 정신 나간 작태가 통용됐던 환경은 임금의 어설픈 태도에서 비롯한 것이다. 왜란과 호란이 거듭되며 나라가 결딴난 것은 결국 지도자가 불렀다고 하겠다.

우리 강토는 임진년(1592)부터 병자년(1636)까지 40여 년간 이웃 왜(倭)와 청(淸)으로부터 치욕적으로 유린되었다. 그러나 외란의 대가는 “탈중화(脫中華)”라는 새로운 세계로 뻗어나가도록 우리를 이끌었다. 우리의 정체성에 주체의식이란 등뼈를 넣게 되었다. 나말부터였던가, 우리는 공자의 “종주사관(宗周史觀)”에 뿌리를 두고 “중국의 새끼임”을 자임해 왔었다.

17세기의 조선은 곤충의 허물벗기에 비견되는 세 갈레 방향이 개척되었다.
1. 이수광의 범세계화 - 북경(北京)을 통하여 서학(西學)의 선진문화 도입
2. 송시열의 자립경세 - 철없는 양반과 피폐한 백성들에게 자립의지 강조
3. 박세당의 탈주자화 - 사변적이고 교조주의로 죽어가는 성리학에서 탈주
루트(route)는 길나지 않는 곳을 탐험하는 코스로서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위 세 사람 중에, 국난을 헤치고 국정에 가로지르는 루트를 바르게 선택한 분은 누구인가? 모두 아니고, 동시에 모두 기다. 국가경영은 다원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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