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학을 일으킨 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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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학을 일으킨 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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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놓은 덫에 제 자신이 걸려들다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라.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

- 논어 “안연편(顔淵篇)” 중에서 -

조선은 창업(1392) 이후 근 백 년 동안 왕족끼리의 혈투가 간간히 이어졌지만, 이를 통하여 오히려 왕권을 확립하며 정치적 안정을 이끌어오는데 성공했었다. 그러나 무오사화(1498)를 기점으로 이후 삼백여년 동안의 권력은 신하들에 의하여 휘둘렸다. 그 사이 왜란과 호란의 외세까지 개입되면서 크고 작은 당쟁이 맞물렸으며, 옥사와 유배를 통한 참극이 꼬리를 이어갔다.

1519년(중종 14)에 일어난 기묘사화는 남곤, 심정 등이 이른바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을 조작해 조광조 일파의 집권층을 일망타진한 정변이었다. 이 쿠데타의 명분은 훈구파가 신진 사림파의 개혁 드라이브에 제동 거는 것이었지만, 실제는 두말할 필요 없이 정권탈취가 목표였다. 이 사건에 주목할 포인트는 궁궐 나무 이파리에 꿀물로 문제의 글자를 썼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당시 조선의 정신상태는 전방위 양심불량이다. 국왕도 신료들도 내막을 짐작하면서도 모르는 체 넘어간 것이다. 어처구니없다. 발상부터“애들 장난(!)”이 국정으로 통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쓴웃음만 나온다. 이것은 종주국의 안보 그늘 아래 정신 나간 제후국의 노닥거림이 아닐 수 없다. 그때는 아마 “유구한 역사, 단일민족, 홍익인간”이 없었지?

1521년의 신사무옥(辛巳誣獄)은 기묘사화에 뒤이은 해프닝이다. 이 사건은 송사련이 처남과 모의하여 안처겸 등이 변란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심정에게 무고하면서 일어난 옥사이다. 송사련은 안처겸 집안의 사노(私奴)로서 혈연적으로는 그의 외6촌 아우였다. 그가 천출에서 벗어나 부귀영화를 누리는 대신 주인 안당과 직계 두 아들은 죽고, 나머지 일문은 고향을 등져야했다.

안처겸의 부친 안당은 사림파 출신으로 당시 좌의정이었다. 안당의 부친은 가비(家婢) 중금을 상처당한 아우에게 첩으로 보냈다. 거기서 중금은 딸 감정을 낳았고, 송사련은 감정의 아들이다. 당시 노비는 사유재산이었는데, 부모 중 한쪽이 노비면 자녀도 노비였다. 그러나 송사련은 안당의 배려로 기술직에 출사했고, 사건 당시 노총각으로 모친과 함께 따로 살고 있었다.

구봉 송익필(龜峯 宋翼弼 1534-99)은 송사련의 아들이지만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구봉은 출생할 때 공신 부친으로 신분이 상승되어 있었지만, 모친이 천출이어서 사대부지만 서얼 신세였다. 구봉은 아예 관직을 포기하고, 파주 심학산 기슭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살았다. 이때 인근의 율곡과 교유했었는데, 율곡이 오히려 구봉에게 성리학에 대하여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구봉은 시와 글씨도 능한 당대 8문장(文章)의 한사람으로 손꼽혔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다고 한다. 그에 대한 여러 전설 중 하나는 선조와의 대면 장면이다. 율곡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그의 특출한 능력을 천거했다. 야간이었는데, 구봉이 잠시 임금을 주시하는 동안 호랑이 눈처럼 불빛이 번쩍거렸다는 것이다. 놀란 왕은 할말을 잃었고, 그것으로 군신관계는 끝났다.

송사련은 고발한 공으로 당상관으로 승진되고, 죄인들로부터 몰수한 전답, 가옥, 노비를 받고 30여 년 간 권세를 잡았다. 그러나 심정과 남곤의 일파가 몰락함에 따라 희생되었던 안처겸 등의 인물들의 신원이 돌려졌다. 1586년(선조 19) 송사련은 사후 관직이 삭탈되고, 재산도 다시 안씨 일문에게 환수되었다. 이때 구봉은 졸지에 노비신분으로 떨어지며 숨어 지내게 된다.

1589년(선조 22년) 기축옥사(己丑獄事)는 조정에 날아든 밀서 한 장에서 시작된다. 정여립(1546-1589)이 정권을 뒤엎을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첩보였다. 이 사건은 전북 진안 천반산 자락의 죽도(竹島)에서 전라도 사람 천명이 정여립과 함께 최후를 맞으며 마침내 막을 내렸다. 전라도 기피의 단초를 제공한 이 옥사는 밀고자가 반전의 기회를 노리던 구봉이란 설이 있다.

구봉은 그의 예학을 이어받아 대가가 된 김장생에 의하여 빛을 보았다. 예학이란 신분에 따라 법도가 다르다는 것이 골자인데, 구봉에게 아킬레스건과 같은 예리한 과제였다. 사후 선조는 문경공(文敬公)으로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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