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의 울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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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울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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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것은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가능한 것이 현실화하는 결정은 통계적 방식으로만 기록될 뿐, 달리 예측이 불가능하다. 고전 물리학에서 현실이라는 개념은 이 한 마디로 붕괴된다. 한편, 아인슈타인은 더 이상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그런 사람이었다.

- 하이젠베르크가 말년의 아인슈타인과 만난 후의 회고록에서 -

가령 “가위바위보”를 계속해서 승률 80%를 달성하는 확률은 얼마인가?
1. 5전 4승 - 15.6% (이때 80% 이상으로 이길 확률은 18.7%)
2. 10전 8승 - 4.4% (이때 80% 이상으로 이길 확률은 5.5%)
3. 15전 12승 - 1.4% (이때 80% 이상으로 이길 확률은 1.7%)
주목할 것은, 판수를 늘릴수록 불확실성이 더욱 커져간다는 사실이다.

“바둑의 신이 있다면, 당신은 몇 점 놓고 대국할 수 있나?” 바둑의 고수에게 도통한 수준을 가늠하기 위하여 기자들이 곧잘 던지는 질문이다. 여기에는 바둑의 신에게 불확실성이 전혀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있다. 그동안 명인 급의 여러 기사들에게서 세 점 또는 네 점 정도의 대답이 나왔다. 즉 바둑에 대한 자신의 불확실성을 그 정도로 보고 또 믿고 있는 것이다.

만약 신처럼 단한수의 실착도 없다고 가정한다면, 한판의 바둑에서 최선의 착수는 오직 한수뿐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할까. 이를테면 정석이나 끝내기의 수순, 사활문제가 여기에 가깝다. 이와 같이 사건을 절대적으로 보는 관점은 자유낙하 물체의 운동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고전 역학과 닮았다. 이런 결정론은 주로 장로교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예정론과도 상통한다.

자유론은 오직 한수에 대하여 상보적인 입장을 취한다. 가령 포석이론은 주어진 상황에서 여러 가지의 경우가 가능할 수 있다. 특히 우주류 같은 폭넓은 중앙전투에서는 솔직히 정답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어떻게 두어도 한판의 바둑이 된다는 식이다. 자유는 n-가지 방향으로 나눠진 길목처럼 사람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자유론은 딱히 한길을 찾다 타이밍을 노치기 쉽다.

바둑에서 임의성도 가능하다. 첫 번째 수의 가능한 수법은 361(가로19× 세로19) 가지이며, 두 번째 수는 한점을 뺀 360 가지가 된다. 이렇게 셋째, 넷째, 계속 이어서 판 전체를 모두 돌로 채운다면, 바둑의 임의성은 361의 누승(累乘)이란 거대수가 나온다. 그 크기는 바둑을 두는 인종이 우주에서 멸절할 때까지 똑같은 판이 결코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만하다.

인생은 바둑이다, 이 카피는 매우 멋지다. 위에서 바둑으로 비유했듯 사람의 삶 역시 결정론, 자유론, 임의성이 꼭지각을 이룬 삼각형 안에서 설정할 수 있다. 이 삼각형의 넓이가 바로 비(非) 결정론이 점유한 크기이며, 삼각형의 테두리는 불확실성의 울타리가 된다. 양자 역학에 철학적 사유를 뒷받침했던 하이젠베르크는 일찍이 비결정론의 불확실성에 눈뜬 사람이었다.

가위-바위-보가 하나의 세트(set)이듯 결정-자유-임의 역시 상극적이나 한 몸을 이룬다. 여기서 “임의(random)”는 비현실적이지만 허수 단위의 값으로 보면 받아들이기 쉽다. 세상을 거시적으로 보면 결정론이 우세하다. 그러나 세상을 미시적으로 보면 임의성이 나타난다. 그러나 한 사람이 지금, 여기(now and here)에서 처한 상황은 언제나 자유론에 따라 선택하게 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쩌란 말인가? 이것도 저것도 그것도 아니라면, 아니, 이것들 세 가지가 서로 협조적이라면,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으란 말인가? 한판의 바둑처럼 물론 쉽지 않다. 사람은 언어로 생각하기 때문에 말로 설명하기 쉽게 행동한다. 우리의 진실은 말이 아닌 내면세계이다. 말로 설명하는 것이 구상화라면, 마음으로 표현하는 것은 추상화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결정론은 사실을 정확하게 그려낼 수 없다. 시대가 바뀌고, 20세기는 비결정론이 주류를 이룬 세계였다. 추상화는 그런 바탕 위에서 형성된 회화이다. 칸딘스키는 추상화 이론을 내세운 최초의 화가였다. 쇤베르크의 무조(無調) 음악도 추상화와 맥락을 같이 한다. 마이크로 칩, 글로벌 네트워크, 유전자 디자인이 주도하는 지금도 불확실성은 더욱 증가하고만 있다.

누구든지 이젠 불확실성에 익숙해야 세상에서 살아남는다. 확률과 통계가 만능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세계를 주도하는 사유체제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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