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사태 VS 광주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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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사태 VS 광주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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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에서 노동자들이 드디어 들고 일어났다

1976년 8월 대남 공작원들에게 띄운 김일성의 비밀 지령 전문에는 ‘남조선에서 노동자들이 드디어 들고 일어났다’ 사북 탄광의 유혈사태는 반세기에 걸친 식민지 통치의 필연적 산물이며, 인간 이하의 천대와 멸시 속에서 신음하던 노동자들의 샇이고 쌓인 울분의 폭발이다'

남조선 혁명가들과 지하혁명 조직들은 이번 사북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 되도록 적극 불을 붙이고 청년학생들과 도시 빈민 등 각계 각층 광범한 민중들의 연대투쟁을 조직 전개하여 더 격력한 전민 항쟁오로 끌어올려야 한다.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 공격을 개시하고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 전화국, 변전소, 방송국, 등 중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 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한다. 그래야 남과 북의 전략적 배합으로 혁명적 대 사변을 주동적으로 앞당길 수 있다.

이어 27일 후 5월 18일 광주사태가 터지자 김일성은 교시를 통해 ‘광주사태와 사북사태를 전민항쟁으로 끌어 올려라? 는 비밀지령을 3호청사 부장회의(80년5월) 에 내렸다.

1980년 4월 사북사태와 5월 광주사태의 성격 비교

80년 4월 21일 강원도 사북 동원탄광에서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일하던 탄부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전국 광산 노동조합에서 결정한 42%의 임금 인상안을 어용노조 위원장(이재기)이 비밀리에 회사측과 20% 임금 인상안을 맺은 이유로 격분, 탄광 노동자들은 대규모 폭력시위를 벌려 이른바 '사북사태'로 이어졌다.

사태가 악화되고 사북읍내가 시위대에 완전장악 하게되자되 당시 강원도 오음리에 주둔중인 11공수여단이 투입되고 노동환경을 요구했던 노동자들은 항거로 그쳤으나 사북사태 27일 후 발생했던 당시의 5.18 광주사태는 김대중 내란음모로 확인 되었다.

사태 당시에 광부들은 사북읍을 장악 하고도 무기고 탈취 같은 행동은 물론 탄광지대에 수 십만톤의 발파용 다이나마이트가 있는데도 탈취 하지 않았으나 광주사태는 화순광업소에서 탈취한 8t의 다이나마이트를 전남도청 지하에 뇌관까지 장착,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몰모로 계엄군들의 진압시 폭파 하겠다고 위협 광주를 9일 천하의 해방구로 삼았다<김일성 교시>

1980년 4월 사북광부 유혈 난동의 역사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회장 이연) 사북광업소 광부 7백여명은 임금 소폭인상과 어용노조에 반발, 농성 중(4.21일) 폭도화하여 각목, 곡괭이,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한 채 경찰과 충돌, 경찰관 1명을 때려 숨지게 하고 정선경찰서 사북지서와 광업소사무실, 노조사무실, 사북역 등 광산촌 일대를 완전 점거한 후 4일째 경찰과 대치 중 4월 24일 오전 난동사태는 일단 멎었다.

광부들은 사북에서 외곽으로 통하는 육로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교통을 차단, 사북 일원의 행정이 마비되고 폭력행사를 하는 바람에 사북 일대가 나흘째 고립상태가 되어 오던 중 24일 오전 바리케이드를 철거, 일반인 통행이 이뤄졌다.

한편 이틀 동안(21-22일)충돌로 경찰관 47명, 광부 1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건의 발단은 노조측이 임금 40%인상 요구에 회사측의 20% 인상을 통고, 조합원들이 ‘노조총회’를 열자고 광업소회의실에 모여들자, 이에 대비해 출동했던 경찰지프가 달려드는 광부를 피하다 이들 중 2명이 부상을 당해 이에 흥분한 광부들은 대책회의 중인 장성 경찰서장을 습격, 권총을 빼앗고 늑골을 부러뜨리는 난동으로 확대 되었다.

21일 밤 강원도경은 도내 경찰관 5백여명을 비상소집하고 서울 등지에서 3백여명의 기동경찰을 지원받아 사태수습에 나섰으나 광부들이 2천여명으로 불어 초강경 자세로 대치하고 있어 손을 쓰지 못했다. 24일 광부들은 강원지사가 제시한 협상안을 놓고 오전 9시부터 ‘협상에 응하자는 측과 거부하자는 측의 강온파로 갈라져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23일 24일 이틀간에 협상은 이재기 노조지부장의 즉각 사퇴와 상여금 연 400% 인상 등 타결로 사태는 진정되고 이날부터 사북읍 일대의 질서가 정상화되고 광부들이 점거했던 사북지서도 되돌려 주었다.

사북사태 이후 27일만에 광주사태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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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07-01-04 16:31:27
안녕하십니까? 자유북한군인연합 공동대표 최중현입니다.
북한군 특수부대 정치군관으로 15년을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위해 ‘총폭탄’이 돼서 죽을 각오로 충성을 다 하다가 속아 살아왔음을 깨닫고 자유를 찾아 남한에 온 저는 무너져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안보위협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수가 없어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백주에 간첩이 맹활약을 해도 잡지 않거나 잡아도 처벌조차 제대로 할수 없고 서울 한복판에 인공기가 휘날려도 무방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땅이 과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도 평양인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인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는 현실, 북한사람보다 더 친북적인 정신나간 좌파세력들이 국가, 사회전반의 요주에 틀고 앉아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난도질 하고 있는것이 대한민국 안보의 현 주소입니다.

분단 반세기가 넘도록 ‘자주, 평화, 우리민족끼리’라는 허울 좋은 보자기에 감춰진, 김일성, 김정일로 이어지는 북한의 대남적화통일 야망은 변하지 않았고 또 변할수도 없습니다.
김일성, 김정일은 기회가 있을때마다 심복들에게 ‘연방제 통일은 평화적 방법으로 가능할지 모르나 남조선혁명은 폭력적 방법이 아니고는 불가능 하다, 평화적 방법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해 왔습니다.
남한 내 친북세력들이 미군기지를 공격하며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폭력 집회와 4.19나 광주봉기처럼 민주, 평화, 자주를 외치는 격력한 시위가 전국을 뒤 덮을 때 민주, 애국투사들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무력 개입한다는 전략입니다.

역대 남한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불행한 사건들에는 빠짐없이 북한이 직, 간접적으로 개입해 왔습니다.

다른 것은 접어 두고라도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5.18광주민중항쟁의 경우에도 현역 북한군 출신들, 특히 특수부대 출신들은 북한군 최정예 특수부대가 투입됐다는 정도는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다음은 1976년 8월 대남공작원들에게 한 김일성의 비밀지령과 80년 5월 중앙당 3호청사 부장회의에서 한 김일성의 비밀 지령의 전문입니다.

“남조선에서 노동자들이 드디어 들고일어났습니다. 사북 탄광의 유혈사태는 반세기에 걸친 식민지 통치의 필연적 산물이며 인간 이하의 천대와 멸시 속에서 신음하던 노동자들의 쌓이고 쌓인 울분의 폭발입니다.

남조선 혁명가들과 지하혁명 조직들은 이번 사북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적극 불을 붙이고 청년학생들과 도시 빈민 등 각계 각층 광범한 민중들의 연대투쟁을 조직 전개하여 더 격렬한 전민 항쟁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 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 전화국, 변전소, 방송국 등 중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남과 북의 전략적 배합으로 혁명적 대 사변을 주동적으로 앞당길 수 있습니다.”

광주봉기의 도화선이 됐던 사북탄광사태 직후 김일성일 왜 이런 지령을 내렸겠습니까?

5.18사태 당시 함경남도에 위치해 있던 저희 부대는 전투동원상태에 진입하라는 군단참모부의 명령을 받고 완전 무장한 상태에서 신발도 벗지 못한 채24시간 진지를 차지하고 광주사태에 대해 긴급 속보로 전해 들으면서 20여일간이나 출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단 정치부 비 편제 서기로 자주 동원됐던 저는 나중에야 당시 사단장이였던 여병남과 군단 참모장이였던 김두산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개 대대가 광주에 침투했었고 희생도 많았지만 공로가 컸다는 말을 귀 동냥으로 얻어 들을수가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북한군 특수부대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광주에 특수부대가 침투 했었다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로 나 돌았습니다.

최근에는 북한군 4군단 70정찰대대 전투원으로 복무했던 이덕선씨로부터 당시 정찰국 소속 정찰대대들의 광주 침투 상황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한 얘기를 들을수가 있었습니다.

이덕선(가명)씨에 따르면 광주봉기 시 2군단 정찰대대를 모토로 하고 각 특수부대들에서 선발한 최정예 전투원 1개 대대가 해상을 통해 남파됐으며 그중 3분의 2가 회생되고 나머지 인원이 귀대 했다고 합니다.

이덕선씨가 알고있는 광주봉기 침투자는 조장이였던 4군단 70정찰대대 상좌 황종인, 부조장이였던 4군단 33사단 중좌, 조원으로 침투했던 4군단 정찰대대 작전집체조의 홍씨성을 가진 참모였다고 합니다.

통상 북한 당국은 남파돼서 임무를 수행하고 귀대하거나 임무수행 중 사망한 공작원 또는 전투원에게 공화국영웅칭호와 함께 각종 훈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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