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의 현장을 찾아서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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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의 현장을 찾아서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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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명의 병력으로 진압작전에 나서다니?

 
   
  ▲ 무장한 시민군 옆으로 수많은 수류탄이 보인다.  
 

70년 유신선포로 정부가 프레스카드제를 통해 언론의 자율정화를 위해 시행된 제도를 가리켜 운동권들은 당시의 기자들을 유신 언론인으로 지칭하고 그들은 우리들을 타도의 대상으로 여겼다.

반공 방첩의 표어가 새겨진 벽시계가 24일 새벽 3시를 알려준다.

정소령이 건네준 모포 한장을 들고 긴 나무 의자에 누웠다.

24일 아침 진압작전을 앞두고 문득 월남 퀴논 지역에서 산화한 36명의 전우들의 모습이 주마등 처럼 떠 오른다.

전사자 명단 에서 발견한 김상병은 고향 친구이자 군 입영 전에 같은 직장을 다녔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읍내 극장에서 영사 기술을 배우고 나는 선전실 에서 간판을 그리는 조수 생활을 했던 유일한 고향 친구의 이름 석자를 전사자 명단 에서 발견했다.

안돼! 안돼!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총성이 울리자 쥐었던 칼빈 소총을 움켜 잡는 순간 꿈 속에서 깨어 났다. 비몽 사몽간에 지른 소리에 당번병이 달려와 나를 깨운다. 벽 시계가 아침 8시를 알린다. 새벽녁 잠시 눈을 부쳤는데 어느덧 3시간 동안 악몽에 시달린 모양 이다. 대대장 실 주변이 너무 조용 했다.

당번병이 대대장과 현역병16명이 출동 했다고 알려 준다, 그가 출동 하면서 당번병과 함께 부대에 남은 방위병과 예비군 들의 안전을 당부 하고 만일의 사태에 부대를 철수하라는 당부를 하고 출동했다는 것이다. 16명의 병력으로 진압작전에 나섰다는 소식에 심장이 멈추듯 전신이 떨려온다.

저들은 줄잡아 1천 여명의 병력으로 추정되고있어 1당 100의 작전 이다. 부대 전인원 60명이 출동 하기로 다짐 했는데 대대장은 나를 포함 피신온 휴가 장병과 방위병,예비군들을 남겨두고 16명의 현역들과 출동한 모양이다.

꿈 속에서 들었던 총성이 현실 임을 알고 온몸이 쭈볏 해진다, 직전에 울린 총성이 앰16 총성 이기에 우리 현역들의 신변이 염려 되었다. 나는 당번병 에게 부대 잔류 병력의 안전을 맡기고 부대앞 정문을 향해 돌진했다.

서른 일곱의 나이를 잊은체 마구 뛰어 단숨에 부락 어구 송전 철탑에 도달하니 논두렁 사이에서 인기척이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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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말 2006-11-21 10:09:47
(공수부대 장교 출신 양효용님의 글)
저는 475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부마사태 당시에는 부산에서 대학생활을 하며 시위에 참여했으며 그 후 대학교를 졸업을 하고 군에서는 공수부대를 지원해서 광주사태 당시 광주 진압부대였던 3공수특전단에서 장교로 팀장 근무를 했었지요.
물론 제가 지금부터 하는 얘기도 어느 기간, 어느 지역, 어떤 한정된 상황이나 사항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와 상황도 그 당시 그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여러사람이 객관적인 판단을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아이로니하게도 제가 근무했던 공수부대 대대는 부마사태 당시 제가 다니던 대학에서 주둔을 하며 계엄군 임무를 수행했더군요.

그러다보니 고참 중사와 상사들은 저희 대학의 매점 아가씨들과 이발소 아저씨 들도 잘 알고 있더군요. 학교앞의 책방 주인아저씨, 식당 아줌마들 까지도 모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고 어떻게 자신들과 지냈는지도 얘기를 했어요.

4년동안 그학교를 젝 다녔으니 금방 알 수가 있었죠. 그중 한 하사관(중사)는 철수한 그때까지도 그아가씨와 가끔 편지를 주소 받는다고 하더군요. 한마디로 민간인과 친했었다는 얘기죠.

광주사태 당시 그들은 부산 마산 사태의 진압경험이 있다는 것으로 인해 7공수와 11공수가 실패한 진압 임무를 넘겨받아 광주에서 전남 도청 등을 접수했었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당시 전 두환 정권의 보도 통제 아래에서 일방적으로 전 두환 정권에게 유리하게끔 보도되었던 행태를 지금의 언론에서 이제와서 또 다시 새로운 김 대중 정권에 아부하며 사실을 왜곡하고 있어요. (글쎄요... 왜곡이란 표현이 지나치다면 한 쪽의 얘기만을 계속 보도하고 있다고 변경하죠!)

전두환 정권 당시 일방적으로 보도를 했던 것 처럼(그게 자의건 타의건 간에...)지금은 공수부대나 그밖의 진압군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부치고 있어요!

당시 공수부대에 있으면서 모든 걸 보고 듣고 경험했다는 현직목사도 어느 한 면만 보고 듣고 한 것을 가지고 자기가 마치 계엄군, 진압군들의 전체 대표인양 방송매체에 나와서 얘기를 하고 있더군요. (5-17 전후해서 TV에상당히 많이 나오시더군요)
하지만 아쉬운 것은 그분은 상황별, 시간대별, 지역별로 발생했던 것을 정확하게 국민들에게 쏟아놓을 만큼 지식이 없었다는 것이고 또한 진실을 얘기할 용기가 없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좀 심하게 얘기하면 지금의 386 국회의원들과 기성 정치인들처럼 다음 번 국회의원 자리 공천을 노리는지도 모르죠! (이 얘기가 심했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어제 오늘의 사건들을 보십시오.(517 NHK, 문 장관, 장원 대변인)어느 누구 믿을만한 지도자나 위정자들이 있는지...
그 당시 왜 공수부대원들이 민간인들을 향해 총을 쏠 수 밖에 없었는지?!
광주 시민들... 그들은 순수하게 시종일관 비폭력, 비무장 시위를 했었는지?!
당시의 공수부대의 군기는 어떠했는지?(지금이나 그때나 최강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공수부대가 일방적으로 광주시민들을 때리고 죽이고 해치우기 위해서 내려갔다면 왜 그렇게 훈련이 잘되고 잔인했다는 공수부대원들이 6-25 전쟁 당시의 겁많고 의심많은 미군들처럼 미소를 띠고 다리 밑으로 유인을 해서 한꺼번에 몰살을 하지 않았는지? 정말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나라의 대부분 남자들이 군대를 다녀왔는데 군대에서는 아무런 명령이나 기강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찌르고 죽이고 할 수가 있답니까?
그것도 전국 8도의 장정들이 다모여 있고 별자리부터 이등병까지 편제 되어 있는 군대조직에서 말입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즈음 방송에서 많이 나오는 진압봉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한 것이 전부였지요.
그것도 진압 초기에는 횡대로 열중쉬어만 하고 있었던 것을 점차 시위가 난폭해지고 차량을 이용한 습격이나 돌진이 자주 발생하자 자위의 일환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공수부대원들을 대변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광주항쟁을 폄하하자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다만 어느 한 쪽만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짓거리를 다시 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지금이라도 광주의 원혼을 달래려고 누군가를 죽이려면 용감하게 나서서 그 당시의 괴수인 전 두환, 노태우, 정호영 등등 하나회 골수들을 사형시켜야 하고 당시의 장관 주영복이를 비롯한 정부 관리들을 처형해야합니다.
그들을 다 풀어주고 사면시켜 놓고서는 이제와서 무슨 짓거리를 합니까?
그게 화해이고 용서입니까? 단지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는 것이지요.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고...
70 -80년대 우리나라의 시위에 참가해 본 사람들은 느낄 것입니다. 그건

시민 2006-11-21 18:57:57
양효원님의 글 잘보았습니다. 모두 올은 말씀입니다. 최전방에서 군생활을 한 사람으로 광주 사태의 보도에 의문점이 하나둘이 아니었습니다. 국은 적을 향해서도 명령이 없이는 함부로 총을 쏘지 않습니다. 양효용님의 글은 광주 사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사람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야 사람입니다. 사실릉 이해 관계에 따라 이러쿵 저러쿵 말하면 그 결과는 거짓으로 많은 사람들에에 더 나가서는 국가와 민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줌은 물론 역사에 죄를 짖는 일입니다. 먼 후날 역사는 광주의 진실은 발혀질 것입니다.

도움말 2006-11-22 09:52:31
2000년 김대중 정권 하에서 광주사태 30주년 기념으로 광주민주화운동 특집을 시리즈로 발간한 적이 있습니다.

그 연재 기사 중 "제 69회 수습대책위원회" 편 첫 줄에 "계엄군을 몰아내고 해방구를 건설한 광주시민들은 시민군들의 통제 에 의해 질서를 되찾아가는 한편 수습위원회를 구성, 계엄군측과 협상 을 벌였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광주사태 때 광주시청에서 태극기가 내려오고 인공기가 게양되었었다는 증언들은 제쳐 두더라도(1980년 5월 22일 TV 녹화 재방영으로 국민이 재확인해볼 기회를 줄 필요가 있는 사실) 해방구가 설치되었다는 사실은 광주시민이 잘 알며 기억하는 사실입니다. [참고로, 동북아에서 해방구는 공산주의 혁명과 관계된 용어임을 모두들 잘 아실 것입니다. 모택동이 해방구 설치로 중국 전체를 적화통일한 방식을 답습하여 김일성이 1950년에도 남침 직전에 남한의 유격대에 해방구를 설치하라 지시한 바 있으며 실제로 설치되었었습니다. 광주사태 때 해방구가 설치되었었음은 기정 사실이요 지금 중요한 것은 1980년 광주사태 때는 도대체 무슨 의미로 해방구를 설치하였었는지 국민에게 설명하여주는 것입니다.)

이 기사의 광주일보 원 출처는 http://www.kwangju.co.kr/518/069.asp 이며, 지금 삭제되어 있으나 광주일보가 종이로 인쇄한 기사는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동일 기사가 이미 여러 518 카페들에 스크랩되어 있을테니까요.

이 기사는
http://cafe.empas.com/518/bbs/b28/read.html?asn=2¬ice=0&pno=2&oby=2&odir=0&fd=0&bt=16&ac=19&rurl=list.html%3Fpno%3D2%26oby%3D2%26odir%3D0%26ac%3D19%26fd%3D0

에서도 광주일보에 실렸던 그대로 자세히 읽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김용갑 의워님께서는 최재천 의원 등 광주사태에 대하여 무식한 일부 정치인들에게 이 기사를 증거물로 제시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http://study21.org/photo/518.htm

하이에크 2008-03-23 02:01:46
특전사를 충정훈련을 시켜서 시위진압에 투입하는 이유는 시위대가 돌 던지면 쫓아가서 패라고 투입하는게 아닙니다. 돌던져도 맞고 참으면서 자리를 지켜라고 일반 전경들이 아닌 특전사를 훈련 시켜서 투입 시키는 것입니다. 전남대 앞에서 소수가 모여 돌을 던져도 반응이 없으니 파출소로 달려가서 순경들을 뭉개버리고..파견된 특전사를 둘러싸고 시위 군중이 겹겹으로 에워싸고 그들의 인내를 시험 했습니다. 최대한 끝까지 참으라고 특전사를 파견하는 것이지..하나 날라오면 쫓아가서 조지는게 그들의 임무가 아닙니다.. 단..그 인내치를 넘으면~

하이에크 2008-03-23 02:04:53
~ 군사적인 적으로 대하는 것이죠. 오히려그렇게 행동해 주길 바라는 쿠바식 폭력 혁명을 추구 했던 윤상원 과 시위 주도세력들에겐 좋은 일이 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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