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관의 “약속과 한 잔의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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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관의 “약속과 한 잔의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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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과 함께하는 김양기민원담당경찰관의 수필당선작

^^^▲ 경찰관이 천직이라는 김양기경사
ⓒ 뉴스타운 차영환^^^
“형님아 우리가 크면 경찰관과 판사 돼서 불쌍한 사람을 돕자”던 약속으로 1971년 의무경찰로 입대, 해양경찰에서는 “물개”란 별명과 소방경찰에서는 “소방관 마스코트”라는 애칭으로 국제시장 화재진압 땐 검붉은 화염 속에 당황한 나머지 마네킹을 사람으로 착각하고 안고 뛰쳐나오다 넘어져 마네킹의 목을 부러뜨리는 등 지금도 웃지 못 할 해프닝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좀 더 폭넓은 활동을 위해 국립경찰에 입문, 약자의 편에 서겠다고 뛰어다니던 지난해엔 날치기 범인과 신중치 못한 대응으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고 5개월간의 치료 끝에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외근활동이 어려워 민원담당관으로 지역주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제 가슴속에 흰머리의 흔적만큼 아픔과 보람 그리고 기쁨 속에, 한때 나의 어두운 과거가 힘이 되어 한 젊은이에게 새 삶의 기회가 되었던 일화를 소개 해본다.(편집자 주)

2005년 치안센터 민원담당관으로 봄맞이 환경정리에 여념이 없을 때였습니다. 그 순간 “나 여기서 물 좀 먹고 가겠소!”하며, 퉁명스럽고 도전적인 태도로 30대의 건장한 사내가 불쑥 들어섰습니다.

언뜻 잠바 속엔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 사내를 찬찬히 보니, 초조한 눈빛에서 어떤 말 못 할 사연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일단 그의 마음을 진정시켜 보려고 제가 마시려고 타놓았던 커피를 대신 건네주고 커피를 마시는 동안, 혹시 예기치 못할 돌발 상황에 대비하여 무전 음어로 순찰차의 긴급지원 요청을 하였습니다.

순찰차가 올 때까지 시간을 끌기 위해 “이곳은 금연 구역이지만 특별히 담배 한 대 피우시죠”라고 권하자, 그 사내는 연거푸 3대를 피워대고 있었습니다.

“혹시 내가 힘이 될지 모르겠지만 무슨 사연이 있으면 얘기해 보라”고 먼저 운을 띄웠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차분히 말문을 열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70세)는 관내에서 빌딩 임대업을 하시고 자신은 5남매 중 막내아들로 모 공대 전자공학과를 졸업, 컴퓨터․ 펜시사업 등을 하다 잇따른 실패로 빚 독촉에 몰린 나머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무거운 발걸음에 아버지를 찾아갔다고 했습니다.

아버님께 아직 장가도 못간 자신의 장가 밑천을 미리 달라고 말씀 드렸더니 갑자기 형이 나타나,󰡒아버지 저런○○는 한 푼도 주지 마세요! 너 지난번 땅은 어떻게 하고 또 손 벌리는 거냐 나가서 뒈져라.”는 질책과 함께 갖은 수모를 당한 후 자신의 숙소로 돌아와 형 때문에 도움은커녕 모욕만 당했다는 분한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고 하였습니다.

다음 날 중대한 결심으로(나중에 듣고 보니 자신도 포기하고 살인을 결심)부모님 집을 찾아갔으나, 아버지와 형은 보이지 않고 마침 집에 있던 형수를 만났는데 “형님은 외출하여 전철로 곧 집으로 돌아올 예정”이라는 말을 듣고, 형이 돌아오는 길목에서 2시간 동안을 맴돌다 결국 형은 만나지 못하고 밤잠은 설친 데다 목이 말라 잠시 들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연을 듣고 조금이나마 그 분의 마음을 달래보기 위해 제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과거의 상처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당신과 같은 남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 나의 장애로(6.25 전쟁 중에 태어나 제대로 먹지 못해 각기병) 걷질 못하는 나에게 어떤 아이들은 먹던 음식찌꺼기까지 내 얼굴에 던지며 달아나는 등 놀림을 당하면, 언제고 나타나 “우리 형 언놈이 괴롭히노!”하며 나를 지켜주던 형과 같은 동생이었습니다.

제가 군 입대 후 머리가 좋아 장학생으로 공부하던 고3인 동생은 “형님아 첫 휴가 언제 오노? 제복 입은 형의 모습이 보고 싶다.”는 애정 어린 편지를 자주 보내주었으나 제가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관보까지 보내주는 속 깊은 동생이었습니다.

그러한 정성으로 마침내 휴가를 받아 부산으로 달려왔으나 제가 도착하기 전 친구들과 수영을 하다 익사를 하였다는 청천벽력 같은 슬픈 소식과, 그렇게 그리워하던 동생의 싸늘한 장례식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동생과 함께 학비를 벌기 위해 아침에는 신문배달․여름에는 아이스케키 통을 메고 각자 흩어져 팔러 다니던 어느 날, 동생은 불량배들을 만나 폭행과 함께, 그나마 팔았던 돈마저 빼앗긴 채 모두 녹아 막대기만 둥둥떠있는 아이스케키통을 안고 울고 있던 기억이 납니다.

동생은 나를 만나자 피투성이인 얼굴로 “형님아! 우리가 크면 형님은 경찰이 되어 불쌍한 사람을 지켜주고, 나는 꼭 판사가 될 끼다”며 서로 굳게 약속한 동생에게 형의 모습을 보여주지도 지켜주지도 못했음을 속죄하는 마음에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고 싶어 경찰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경찰학교 졸업과 동시에 임관식을 마치던 날, 나는 곧바로 달려가 동생의 사진 앞에 제복과 경찰모를 올려놓았습니다. 나는 약속을 지켜 돌아왔는데 정작 동생은 형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원망스러워 느티나무에 엎드린 매미처럼 한없이 울어도 보았습니다.

저의 경찰로서의 새 출발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당시 박봉에다 경찰이란 직업의 사회적 편견에 처가로부터 결혼 승낙도 받지 못하고 갈등을 겪던 중, 불법 전세인 점을 모르고 들어가 살다 전세금마저 사기를 당한데다 집주인(72세 한의사)이 고령자로 형사 처벌도 제대로 할 수 없어 길거리에 쫓겨 날 상황에서 당신과 같은 끔찍한 생각을 가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당신 인품 하나만을 믿고 친정을 뿌리치고 당신을 선택했는데, 동생과의 약속을 벌써 잊어나요? 경찰관으로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며 아내는 눈물로 호소하였습니다.

저는 그 악몽 같은 일들을 떨쳐 버리기 위해, 어린 자식 둘과 함께 서둘러 정든 부모형제 뒤로한 채 부산을 떠나 서울로 전출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의 생활도 그리 녹록치만은 않았습니다. 서울 동교동에서 요인신병보호의 중요한 임무수행 중 신중하지 못한 일로 문제가 발생한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객지에서 외로운 나머지 의형제를 맺어왔던 의동생이 부도로 구속까지 되었습니다.

저는 의 동생의 사채보증을 섰던 공무원 신분에 따르는 책임과 조여 오는 압박감에 ‘먼저 간 동생의 뒤를 따라갈까’라는 나쁜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좌절할 수 없어 아내는 파출부로, 나는 비번 날이면 오토바이 퀵서비스․현대자동차 출고장 등을 쫓아다니면서 돈을 모아 변제해 오던 어느 날채권자로부터 “공무원으로 성실한 책임감에 만족했다”며 선처를 베풀어 비번 날 잠 못 자고 힘들었던 2중 삶을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삶을 극복하다 보니 처가에서 결혼승낙과 함께 아담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내 가슴에 묻혀 있는 남동생과 원판 같이 닮은 아들은 연기자로 활동하다, 나의 뜻에 따라 의무경찰로 입대하여 성실히 복무하는 등 오뚝이처럼 살아왔습니다.

저의 파란만장했던 과거지사 이야기 끝에 제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았던 그가 내 손을 감싸는 순간 우리는 잠시 하나 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당신이 사업에 실패해 놓고, 형과 아버지가 대가를 치러서야 되겠습니까? 형의 입장에서 바꿔 놓고 생각해 보라”는 조심스런 질책에 바닥만 응시하고 있던 그는 품안에서 신문지에 싸 두었던 30센티의 예리한 칼을 꺼내놓고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라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깊이 반성하기에 법과 원칙보다 선도적 차원에서 그 분을 돌려보내자 “커피한잔 잊지 않겠습니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 후 민원인의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동생은 새 삶을 위해 동분서주 뛰고 있다”고 전해올 때, 제 마음속에는 어린 시절 남동생의 당부 어린 음성이 귓가를 맴돌고 있습니다. (행님아...)

무궁화

뿌리가 약한 무궁화는 바람에도 쓰러진다. 힘없는 집은 폭풍에도 무너진다.

튼튼한 무궁화는 아무리 모진 비바람이 몰아쳐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뿌리 깊은무궁화가 꽃 필 때까지 늠름하게서야한다.

순경입직 때의 정신으로 김 양 기(11月6日)

♣나의 신조 ♣

제가 장애자로 안주할 수 없었던 것은 휠체어를 살수 없는<가난>이란 단어가 제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 가난은 신문배달로 장애를 극복하고 마라톤을 완주케 하였습니다. 마라톤으로 단련된 나의 두발로『시민이 원한다면 과천의 경마처럼 언제든지 달릴 터...』

^^^▲ 독거노인 김옥용(70세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 산7번지) 2005. 2. 25일 동안치안센터 민원담당관으로 순찰근무 중 평소 지병인(뇌졸증)으로 파지리어카 옆에 쓰러진 것을 발견한 것이 인연이 되어 할아버지의 치료비를 돕기 위해 출퇴근 시 승용차에 빈병과 파지를 모아 주기적으로 전달해 오다 대공원으로 발령이 났으나 한번 맺은 인연으로 현재까지 계속 도움을 주게 된 것(할아버지 뒤편에는 파지 모아둔 장소임.)^^^
^^^▲ 문원2동 이주단지 독거할머니 5명을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하여 병환, 또는 애로사항을 청취, 복지회관에 개선을 요청하고 노인의 날 햄, 참치 음료수 등 선물셋트 제공하고 일부할머니들이 겨울이 춥다고 하여 2006. 11. 14일 이불6채를 구입하여 전달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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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기 2006-11-19 19:56:44
연말이 다가오니가 훈훈한 미담사례가 많아지는군요.
김양기경사님 초심잃지마시고 하이팅입니다.

해파리 2006-11-19 21:29:51
김양기 경사님 수고 많으십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수고하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네요.
경찰이 경찰다워야 경찰이지 ^-^

민주경찰 2006-11-19 21:33:51
진정한 민주 경찰이란 어려운 이웃을 내 식구같이 감쌀줄 알아야 하지 않을 까요? 김부장님 따봉입니다.

의무경 2006-11-20 10:18:47
민원봉사 소리소문 없이 그래야 더 존경받는 시민의 지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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