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의 현장을 찾아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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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의 현장을 찾아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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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장을 찾아왔오"손을 들고 외치던 날

 
   
     
 

무장한 폭도들이 나를 유신 언론인으로 지칭하며 "죽인다" 는 협박전화는 왜 했을까?

당시에도 나는 유신독재와 군사정권 타도를 외치는 재야 정치권의 민주화 운동가들을 직업 대모꾼으로 여겨 그들을 경멸해 왔고, 5.16 혁명으로 가난과 부정부패를 척결한 박정희 대통령을 항상 존경해 왔다.

그런 나를 두고 그들이 유신 잔당이며 유신 언론인으로 지목한 모양이다.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기 이전까지 내게는 전쟁 유자녀라는 꼬리표와 함께 가난과 굶주림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때는 5백원의 월사금(수업료)을 못내고 학교에서 쫓겨난 일이며 점심때면 도시락이 없어 학교 우물로을 배고픔을 달래 왔고 중학교 3학년 되던 해인 1960년 5.16군사 혁명을 맞았다. 혁명정부가 드러서자 그 동안 걸인 취급 받아오던 6.25전쟁 유자녀와 미망인이신 우리 어머니에게 밀기울 죽과 보리밥이라도 먹을 수 있도록 몇 푼의 연금이 나왔다.

항상 꺼림직했던 원호 대상자라는 명칭도 혁명정부는 우리를 버젓한 "국가 유공자"로 대해주었다. 그레서 나는 이런 연유로 혁명정부가 좋았고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해왔다.

군복을 벋고 대통령에 당선되던 2년 후 64년, 나는 군에 입대하고 만기제대 4개월을 앞둔체 1966년 월남전에 지원했다.

경상북도 영천에서 군복무중 110원 받던 봉급을 열다섯 배가되는 15,000원을 준다고 하니 이런 기회가 어디 있겠느냐며 서둘러 월남전에 지원을 했다.

3.8선을 경계에 둔 강원도 화천 옴리라는 월남전 교육장에서 6주의 강 훈련을 받으면서 오직 부모형제의 원수인 김일성 괴수의 표적을 향해 사격훈련을 했고 유격 훈련과 HID북파공작원들이 받던 실전훈련등 6주의 강 훈련을 견디어냈다.이어 1966년 9월 부산항 3부두에서 국군의장대의 "아리랑"연주를 끝으로 월남을 향해 떠났다.

이 차장과 이웃집에서 피난 온 처녀에게 월남 참전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듯 새벽 동이 떠오른다.

20일 아침 6시 새벽부터 읍내 도로에는 붉은 색 머리띠에 "계엄철폐"란 머리띠에 복면을 한 폭도들이 어제 탈취한 총기로 무장을 하고 버스 차창 밖으로 각목과 총기를 휘두르며 도로를 질주하고 있다.

8시께 보급소 손 총무가 사무실로 들어선다. 손 총무의 안내로 군부대로 피신하기위해 자전거 와 남루한 점퍼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 출발을 서두는데 이 차장이 전화 수화기를 건네준다 지역 유지며 교회 장로인 윤선배의 음성이다. 나주에서 규모가 큰 정부양곡 도정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선배는 공장에 총을 든 폭도들이 찾아와 쌀 가마들을 일부 털아 갔고 선배도 피신을 해야 하겠다며 도와달라는 내용이다.

나는 예비군부대 인근지점을 알려주며 그곳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후 자전거를 타면서 이 차장과 기약 없는 작별을 나눴다. 어제밤 부터 부대 정문 쪽은 이미 폭도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대대장의 전언을 받은 터라 나는 후문 쪽 2킬로를 돌아 보산리 맛 재 방향으로 진로를 잡았다.

잿등 이라 불리는 빈촌부락(금성동)을 지나 농로 가장자리 외딴곳에 위치한 도축장 앞에서 자전거를 멈췄다.도축장 앞 농로 쪽은 대형트럭(주황색)이 도로를 차단한체 무장한 장정 6~7명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 아마 군부대 후문 쪽을 경계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막다른 길에서 되돌아 설 수도 없게 되고 담벼락에 몸을 숨긴체 지방사람 여부를 확인 해보니 트럭 꽁무니에 '영암 시민 군'이란 표식이 붙어있다.

허름한 점퍼에 노동자 차림으로 위장했으니 무작정 지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어 우리 두 사람은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았다. 다행히 정지신호가 없어 속도를 내고 폭 1미터가 되는 농로를 향해 죽을힘을 다해 빠져나갔다. 산등성 어귀 안 모씨 양돈 장 앞에 이르자 자전거를 팽개치고 논두렁에 털썩 주저앉아 호흡을 가다듬으며 약속한 윤 선배를 기다리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다.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 손 총무에게 우리 가족과 이 차장 가족을 돌보아 달라고 당부한 후 그가 자전거를 타고 무사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부대를 향해 마구 뛰었다. 부대후문 200여 미터지점에 이르자 초병이 몸을 숨기고 M16소총을 겨눈 체 암호를 묻는다.

두 손을 번쩍 들고 대대장의 이름을 외쳤다. 대대장은 광산군 출신으로 향토사단 00연대 나주 예비군대대 지휘관을 맡고있는 정소령이다. 그와는 2년 전 내가 나주군 방위위원으로 위촉받아 예비군 지원업무를 하던중 그와 교분을 나눴는데 그는 4살 연상인 나를 친형처럼 대하는호형 호제로 사이다.

거총 자세로 암호를 묻는 초병에게 "정 소령 찾아왔소. 대대장을 불러주시오" 두 손을 들고 힘껏 외쳐댔다. 수분이 흐르고 초병의 연락을 받았는지 정 소령이 나를 알아보고 손짓한다. 부대 정문에 들어서자 현역병 3-4명이 무장을 하고 블록 담 철조망 사이로 낮은 포복자세로 엎드려 경계 태세를 취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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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떨린다 2006-11-05 21:34:58
이게 사실이란 말입니까? 너무 떨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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