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란 이노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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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터기에서 새 움을 터뜨린 난설헌 허초희

 
   
     
 

燕倞斜簷兩兩飛 제비는 처마 끝에 쌍쌍이 날아들고
落花僚亂撲羅衣 지는 꽃은 어지럽게 치마를 스치네.
洞房極目傷春意 봄철 빈 방에서 애태우는 이 속내
草綠江南人未歸 풀은 푸른데 가신 분은 오시지 않네.

- 허난설헌의 시 “규정(閨情)”에서 -

난설헌 허초희(蘭雪軒 許楚姬 1563-89)는 교산 허균(蛟山 許筠 1569-1618)의 누나로 유명하다. 아버지 허엽(許曄 1517-80)은 전처에서 맏이 허성(許筬) 외에 딸 둘을 낳았고, 재취하여 허봉(許篈), 난설헌, 허균을 차례로 두었다. 여기에 소개한 이들 허씨 가문 다섯 명은 모두 당대에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시(詩)만 따진다면 그중 난설헌이 으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난초 난(蘭), 눈 설(雪), 처마 헌(軒)으로 짜여진 아호(雅號)는 낙관(落款)할 때 사용한 이름이다. 처마 아래로 너른 마당이 펼쳐지고, 하얗게 쌓인 눈 건너에 야트막한 돌담이 길게 둘러섰다. 난설헌은 바위 틈새로 눈을 헤치고 푸른 이파리를 내밀고 있는 설란(雪蘭)의 풍경을 그리게 한다. 설란은 바깥의 세찬 바람을 그대로 받으며 야생(野生)으로 한 겨울을 나는 풀이다.

난설헌은 외갓집이 있었던 강릉 경포호 아랫마을인 초당리에서 태어났다. 7세 즈음에 본가 서울로 올라왔던 것으로 보이며, 15세에 김성립(金誠立 1562-92)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슬하에 딸과 아들을 하나씩 두었으나 둘 다 어려서 사별했고, 27세에 이르러 아리송한 죽음을 맞았다. 남편 김성립은 난설헌이 죽고 난 뒤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고, 임진왜란 때 사망하였다.

난설헌은 삼구시(三九詩)를 통하여 자기의 죽음을 정확하게 미리 알렸다. 그뿐 아니라 생전에 지은 천여 편의 작품을 모두 불살라주기를 부탁까지 해두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알려진 그녀의 작품 중 상당수가 허균의 비상한 기억력에 따른 것이다. 그는 죽은 누이를 안타깝게 그리며 초능력을 발휘한 셈이다. 그러나 그녀의 시는 당시 사대부들에게 방탕하다는 조소를 받았다.

아래는 채련곡(採蓮曲)이란 작품이다.
秋淨長湖碧玉流 가을의 장호와 옥류는 깨끗하고 푸른데
荷花深處繁蘭舟 연꽃 우거진 깊은 곳 난을 실은 배에서
逢郞隔水投蓮子 물을 두고 님을 만나 연을 따서 던지네.
或被人知半日差 혹시 누가 보았을까 반나절 부끄러웠지.

위 시에 나오는 장호(長湖)는 난설헌의 마음에 있다. 따라서 함께 밀애(密愛)를 나누는 사내는 가공인물이다. 가슴 밑바닥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연정(戀情)을 시적 언어로 순화하고 있으나 솔직하게 나타내고 있다. 어쩌면 자위(自慰)하며 쓴 글일지 모르지만, 처음부터 발표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시를 읊었을 뿐이다. 그런데,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당시 다수의 선비들은 금욕적인 도학자 풍의 인품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들이 읊조렸던 시는 한결같이 우중충했고, 그 어둠 속에서 자기 속내를 가리기에 바빴다. 인류공통의 가치인 자유, 평등, 박애를 위한 의로운 죽음은 까마득하게 몰랐다. 마치 그 길밖에 없다는 듯 충효와 열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규방의 아녀자로서 난설헌이 천박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까맣게 불타죽었던 그루터기에서 푸르른 새 움이 싹트기까지 수백 년이나 기다려야 했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시대를 앞서갔던 허난설헌의 시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논객들은 허난설헌을 겨우 “삼한(三恨)의 여자”로 배색(配色)했을 뿐이다. 하필이면 여자(1한)의 몸으로, 협소한 조선(2한) 땅에서 태어나, 그 알량한 김성립(3한)의 아내가 되었단 말인가?

난설헌의 결혼생활 마지막은 처절하게 폐쇄되어갔다. 남편은 다른 여자에게 갔고, 아이들은 품에서 떠났고, 친정에는 동생만 달랑 남아 있었다. 더구나 시어머니에겐 집안을 망친 며느리에 불과했다. 그녀에게 남은 하나의 길은 당대 획일적으로 모델링 된 착한 여자로 바보처럼 사는 것이었다. 허난설헌은 엔트로피가 증가해 열사(thermal dead)만을 남긴 고립계와 비슷했다.

나쁜 여자, 자유를 찾아가는 여자, 허난설헌은 이노센트(innocen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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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수 2006-10-25 08:19:31
친구 질문입니다. 의문점은 한문시를 한글로 풀어쓸때 대개 학회같은데서 공식적으로 풀어놓는지요?

낙솔 2006-10-26 06:16:49
문학성은 자유가 전제됩니다.
다르게 풀이된다는 것이야말로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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