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영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혀가 풀리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영원히 우리를 괴롭힐 화두,
영어!
미국생활 17년, 그리고 명색에 미국 직장에 다니고는 있지만 아직도 나는 영어 때문에 괴롭다. 업무지시는 물론이요, 하루에도 몇 통 씩 날아오는 이메일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따라가기에는 나의 영어실력이 너무나 딸린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 공평도 하시지, 딸리는 영어 실력 대신에 내게 남 보다 빠른 눈치를 주셨다. 영어 단어 몇 개를 대충 꿰어 맞추고 눈치로 때려 잡아가면서 여태 아무 탈 없이 버티고 있다. 탈은 커녕 일 잘 한다고 입사 9개월 만에 월급도 올랐고 지난 5월엔 '이달의 직원' 으로 뽑혀 표창장과 상금도 탔다. 따지고 보면 지렁이가 용 되었다.
처음 이민 온 몇 년 동안은 혹시 미국 사람일까 봐 전화도 마음대로 못 받았었다. 자동응답기를 켜 놓고 한국 사람이 용건을 남기기 시작하면 그때서야 수화기를 들었을 정도니까.
미국사람과는 대화는 커녕 인사 말도 못 나눌 형편이었는데 기를 쓰면 간단한 대화정도야 가능했었겠지만 미국사람과 나를 가로막은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두려움이었다. 어줍잖게 한마디 했다가 상대방이 못 알아들으면 창피해서 어쩌지? 하는 두려움. 활달하고 사교성 많은 나였지만 그 두려움을 없애는데 2년이 걸렸다.
영어의 장벽은 그만큼 두꺼웠다. 현재는 그래도 생활영어 정도야 막힘없이 술술 하지만 보다 전문적인 대화를 요할 때는 지금도 딱 막힌다. 시아버지는 고교 교장을 지냈던 학문적인 사람이라 은퇴한 지금까지도 항상 신문이며 책을 끼고 산다. 어쩌다 방문하면 그래도 며느리가 한국인이라고 한국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곧 잘 하려 한다.
영어로 한국정세까지 토론할 자신이 없는 나는 딱 죽을 맛이지만 그래도 내 나라에 관심을 가져주는 시아버지가 고마워서 더듬더듬, 혼신의 힘을 다해 상대를 해 주었었다. 그런데 웬걸, 하루는 시아버지가 '북한 김정일이가 미사일(missile)을 보유하고 있다는데 한반도에 전쟁의 위험이 없느냐'고 물어오는데 기가 딱 질리고 말았다.
글, 글쎄, 뭐라고 하지?
미군이 주둔하는 한 비교적 전쟁위험은 없으며 현재 북한은 세계적으로 고립된 상태로 이 판에 전쟁까지는 생각 못 할 것 이다,를 영어로 뭐라고 설명하지? 얼굴까지 벌개지며 머리를 쥐어짜다 궁여지책으로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나는 엄연히 미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 북한에까지 관심을 잘 안둔다, 고로 잘 모른다" 였다. 시아버지는 내 엉뚱한 대답에 파안대소하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황급히 그 자리를 물러나오긴 했지만 참으로 부끄럽고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에서 10년 이상을 산 내가 그 정도 대화도 영어로 할 수 없다니.... 한 때 영어 잘하는 사람이 내게는 '신' 처름 비춰진 적 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고 노력해도 안 되는 영어를 어쩌면 저들은 저렇게 아무 막힘없이 잘 할까 싶어 아닌게 아니라 그들이 신 같아 보였다.
그런데 우리 직장에는 영어는 물론이요, 자신의 모국어, 그리고 또 다른 나라 말 등 3국 언어를 아주 정확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
3국 언어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을 테니 제발이지 영어 한가지만이라도 막힘없이 하고 싶은 나는 그들을 볼 때마다 부러움을 넘어 거의 경외에 가까운 존경을 보낸다. 영어 익히는 데는 미국 텔레비전 시청이 좋다고 해서 시간 날 때마다 미국 텔레비젼을 보려고 애를 쓴다. 텔레비젼 시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영어를 익히려면 텔레비젼 시청만한 게 없다니 난들 어찌 하리요.
남들은 재미로, 여가로 보는 텔레비젼을 나는 큰 짐을 지고 숙제하는 것 처름 억지로 봐야 하는데 텔레비젼 앞에 앉을 때 마다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이 시간에 차라리 낮잠을 자든지 쇼핑을 가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에...
정말이지 영어가 사람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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