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의 산업혁명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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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의 산업혁명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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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업혁명을 끝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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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의 4단계

이 시점에서 우리나라의 산업혁명의 윤곽을 요약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산업혁명은 수출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수출액을 기준으로 해야만 설명이 가능하다.

위의 표를 보면 우리나라의 산업혁명은 1964년에 착수됐고, 그 후 수출이 늘어감에 따라 산업구조도 고도화해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1964년에 1억 달러 수출을 했다. 이때부터 제1단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 이전은 준비 단계이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든다면 높은 산의 정상을 정복하려고 베이스 캠프(Base Camp)를 마련한 해가 1964년인 것이다. 그리고 3억 달러 돌파가 제1캠프가 되고, 10억 달러 돌파가 제2캠프, 100억 달러 돌파가 제3캠프가 되는 식이다. 제3캠프에서 정상을 정복하여 선진국이 되자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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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선 제1단계는 1967년 말에 3억 달러를 돌파함으로써 만족스러운 결과로 끝났다. 베이스 캠프에서 제1캠프로 간 것이다. 이때가 1967년 12월 31일이다. 그래서 표시는 1967/1968로 하기로 한다. 그 특징을 설명하면, 「호프만 계수는 1967/68년에 1.96이 돼서 2.00을 돌파한다.」 우리나라의 국민 1인당 GNP는 1963년 말에 100달러에서 1967/68년에 150달러로 껑충 뛰어 오른다. 우선 제1차 경제개발계획으로 수입대체산업(시멘트, 비료, 정유공장 등)이 착수됐다. 그러나 1963년 외환위기가 닥치자 정부는 1964년 중반 수출제일주의를 국가전략으로 삼았다. 천연자원이 없는 우리나라로서는 수출 가능한 것은 여자 단순기능공을 활용한 섬유 등 경공업 제품밖에 없었다. 이것이 「공업입국」정책이다.

새로 공장을 지을 시간적 여유가 없으니 기존 공장의 수출전환이 주가 되었다. 그러면서 신식 기계로 대체한다. "증산과 수출" 시대이다. 있는 시설, 있는 기술만 가지고 뛰는 단계이다. 싼 임금, 풍부한 노동력이 주무기였으며, 중소기업이 발전해 가고 여자 단순기능공의 공이 컸던 시대이다. 학교교육으로 비유하면 초등학교 시대이다.

2) 제2단계(1967/1968~1970/1971)는 경제개발 중학교 시절이다. 수출공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고 새로운 공장이 우후죽순격으로 늘어간다. 그래서 건설시대가 본격화 된다.

수출은 늘어만 갔다. 1970년 대망의 10억 달러 수출이 이루어진다. 호프만 계수는 1.39로 1.50을 돌파하고 국민 1인당 GNP는 250 달러가 된다. 산업구조 면에서는 경공업이 위주나 원료의 국산화가 시급한 과제로 등장, 기초원료 공업인 석유화학, 제철공업의 건설이 시작된다. 필요한 중간소재 및 원료도 국산화하려고 몸부림쳤으며 수출상품도 고급화해 제값 받기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경공업 발전의 시기이다. 직업을 갖지 못한 남자도 가만히 집에서 놀고만 있을 수 없어 돈을 벌겠다며 월남으로 떠났다. 남자 단순기능공 시대의 개막이다.

3) 제3단계(1970/1971~1977/1978)는 경제개발 고등학교 시절이다. 수출은 계속 늘어가서 1977년에 1백억 달러 수출을 하였다. 호프만 계수가 0.96으로 1.00을 돌파. 중화학공업이 경공업을 앞지르기 시작한다. 국민 1인당 GNP도 1,000 달러가 된다.

이 단계에서는 경공업제품 수출만으로는 수출증가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자 기능공에게만 맡길 수도 없게 되었다. 남자 노동력은 월남에서 중동으로 뛰어갔다. 많은 남자 기능공이 양성되었으며 기술자, 연구소가 늘어갔다. 필요한 기계장치도 국내에서 만들어야 했고 제철소, 석유화학도 증설해야 했으며 기계공업, 전자공업도 육성해야 했다. 조선소, 자동차공장도 최신 공장으로 건설되고 수출에 한 몫을 차지하게 된다. 중화학제품의 수출이 늘어갔다. 즉 중화학공업 시대가 온 것이다. 중화학비율을 50%까지 끌어올리려고 노력하던 단계였다. 남자 기능공 시대가 온 것이다.

4) 제4단계(1977/1978~ )는 공업면에서는 구조개편을 끝낸 단계이다. 앞으로 할 일은 내실을 다지는 일이다. 산업합리화 운동을 국가적 규모에서 추진하되 특히 인력과 에너지를 절약하고 자원을 절약하는 방향으로 밀고 나간다. 공업규모는 국제 일류공장으로 키워 나가고 제품은 고급화한다. 특히 정밀공업을 밀고 나간다. 그래야 인력도 고급화해 인력난도 해결해 낼 수 있다. 플랜트도 수출한다. 그렇게 해서 수출 1,000억 달러 이상, 호프만 계수 0.5 이하,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는 선진국이 되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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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바라는 것

국가통치자가 생각하는 것은 대동소이한 것 같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쌀밥에 고깃국 먹고, 비단옷 입고, 기와집에 살게 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남한의 朴 대통령은 5.16 공사혁명 공약에서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절망적인 생활고를 해결하겠다」고 했다. 남북한 모두 「물질적 빈곤」과 「정신적 좌절감」에서 국민들을 해방시키겠다는 뜻이다. 이러한 통치자의 약속은 당시로서는 꿈만같은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소망은 경제가 발전해서 부자나라가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부자나라라는 뜻은 간단하게 말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숫자적 척도는 국민 1인당 국민소득(GNP)으로 표시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도표 3-13>은 제1차 및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중의 각종 지표이다(註: 이 표는 1975년도 기준 불변가격으로 작성했기 때문에 다른 통계치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는 1962년도의 우리나라 국민의 1인당 GNP는 87 달러였다. 국민 한 사람이 1년간 생산을 해낸 부가가치액이(미국 달러로 환산하면) 87 달러라는 것이다. 한 달로 계산하면 7.25 달러이다. 좀 엉성하게 설명하면 국민 1인당 한달에 7.25 달러밖에 생산하지 못했으니 몽땅 국민에게 나누어준다고 하더라도, 월(月) 1인당 7.25 달러밖에 안된다는 뜻이다. 5인 가족의 월급은 (7.25X5=36.25) 달러 정도이다. 월 36 달러로 5명 가족이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면 당시 우리나라의 서민생활이 얼마나 비참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1963년에 가서야 1인당 GNP가 년 100 달러(한달에 8.3 달러)가 된다. 전년도에 비해 15%가 늘었다. 그러나 그 해(1963) 외환위기가 닥쳐와서 극심한 인플레로 인해 도매물가 상승률은 30.3%나 됐으니 서민생활의 비참함은 어떠했겠는가?

 

 
   
  ^^^▲ 지방 산업단지 조성 현장을 한 겨율에 시찰하고 있는 박대통령(좌) 1975년 5월 8일 여천공업단지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그래서 국민들은 이때 절망을 한 것이다. 그러나 1964년부터 시작한 「수출제일주의+공업입국」정책으로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 중 평균 경제성장률은 7.88%나 됐다. 제1차 5개년 계획을 출발할 때에는 년간 경제성장률 목표를 7.15%로 잡았는데 ―제1차 5개년 계획의 부진으로 인해― 1963년 수정 보완시 5%로 인하했다고는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그런데 그 후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제1차 5개년 계획이 끝나고 보니 그 실적 치가 당초계획(7.15%) 보다는 10.2% 초과달성, 수정계획(5%)에 비하면 무려 57.6%의 초과 달성이다. 이 수치를 보더라도 우리나라 경제가 1964년 이후 얼마나 급신장 했는가를 알 수 있다. 더욱이 수출의 호조로 1965년부터는 외환위기가 해소됨으로써 물가상승률이 뚝 떨어져 7.7%가 됐다. 그리고는 그 후 1970년도까지 7년동안 평균 물가상승률은 7.95%로서, 10% 이하에 머물렀다. 당시 감각으로는 해방 후 처음 맛보는 물가안정 상태였다.

1970년도의 국민 1인당 GNP는 243 달러. 월당(月當) 20.25 달러이다. 1962년에 비하면 무려 2.8배가 많은 액수이고 이만한 액수라면 최저생활이 가능해졌다.

1960년대 후반이 되자 朴 대통령은 경제발전에 대해서 자신이 생겼다. 그리고 이렇게 경제가 발전하게 된 것은 국민들이 열심히 일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국민들에게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국민소득을 높이는 길이요, 국민소득이 높아져야 국민이 잘 살수 있다」고 설득했다. 「하면된다」 「우리도 할수 있다」는 구호가 등장하고 국민들도 이에 동감하고 동참했다. 이때의 사회면을 소개하는 글 한 구절.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해가 솟는다. 장엄한 태양의 대행진이 시작된다. 우리 겨레가 반만년 살아온 이 땅, 사랑하는 우리 자손이 영원히 살아가야 할 위대한 우리 조국에 아침이 온 것이다.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하여, 강대국에 지배당해 숨도 제대로 못쉬던 우리 겨레가, 단 한번도 풍요롭게 잘 살아 본 적이 없는 우리나라가 이제 제 뜻을 세워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려고 약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기본전략은 "수출제일주의"요, 기본전술은 "공업입국"이다. "증산, 수출, 건설"을 했다. 작년은 "일하는 해", 금년은 "또 일하는 해"였다.
대통령을 포함하여 모든 공무원과 전 기관이 뛰었다. 모든 기업인과 종업원이 땀 흘리며 열심히 일했다. 전국민이 힘을 모아 성원했다. 학생들은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그 결과 수출은 늘어만 갔다. 수출확대에 가속도가 붙고 있었다.
60년대 후반의 수출은 매년 수출목표를 증액 책정하기에 바빴으며, 전년에 비해 40% 이상의 수출증가 실적을 기록, 수출입국의 의지가 강력하게 실현되고 있었다. (이상)」

이때 비로소 국민들은 「물질적 빈곤」과 「정신적 좌절」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자신이 생겼다. 이것이 우리나라 산업혁명의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1995년에 가서는 수출은 1,000억 달러를 넘고, 호프만 계수는 0.5 이하, 국민소득은 1만 달러를 넘어섰다.

호프만 계수가 0.5 이하가 됐다면 우리나라는 「선진산업국가」가 됐다는 뜻이고 국민 1인당 GNP가 1만 달러를 넘었다면 부자 나라이다. 더욱이 우리나라 인구는 약 5,000만 명으로서 구라파 강대국의 인구와 비슷비슷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최빈국으로서 압박만 당하던 약소국가로부터 탈피, 이제는 국민소득 5,000억 달러인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이다. 이제 교육과 문화에 힘쓰면 문명국이 될 수도 있으며 과학기술에 힘쓰면 첨단산업국가가 되는 것도 꿈만은 아니다. 즉 우리국민은 기적을 이룩한 것이다. 조상님들의 염원이었던 한을 푼 것이다. 배달민족의 위대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수출제일주의」,「공업입국」,「전산업의 수출화 전략」 즉, 한국형 산업혁명의 성과였다.

그런데 「성(城)을 뺏는 것보다는 성(城)을 지키는 것이 더 힘들다」라는 명언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우리나라는 자만을 했다. 한국형 산업혁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어 감에따라 「수출제일주의」「전산업의 수출화 전략(CEOI) 」은 퇴색했다. 더욱이 국민 1인당 GNP가 1만 달러를 돌파하자「국가경제 기본전략」이 없어지고 「경제개발 5개년계획」「공업입국 장기계획」제도도 폐지되고 말았다. 그 결과가 1997년의 IMF 사태로 이어진다.

 

 
   
  ^^^▲ 박정희 대통령 주도하에 우리나라는 「수출제일주의」와 「공업입국」을 국시로 정한 이후 정부와 기업과 온 국민이 수출에 전력을 다하였으며, 목표 달성을 위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있는 모습
ⓒ 뉴스타운,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
 
 

제 1편의 요지

구미 선진국에서는 산업혁명 과정을 겪으면서 고도 산업국가가 됐다. 그 결과 선진국의 영예와 물질적 풍요을 얻게 된다. 일본도 100여년 전 명치유신 때부터 산업혁명 과정을 밟기 시작했고 20세기 중반에 들어가서 선진 산업국가가 됐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1960년 중반부터 산업혁명을 겪게된다. 나는 우리나라의 근대 경제사를 산업혁명이라는 궤도(軌道) 위에서 이를 설명코자 한다.

- 제1장: 「한국형 전산업의 수출화 정책」에서는 산업혁명이란 어떠한 개념인가를 밝힌다. 그리고 이 개념하에서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경제발전이야말로 산업 혁명이었다는 설명을 한다.

- 제2장: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에 대해서 그 윤곽을 설명했다.

- 제3장: 구미의 산업혁명이란 정부의 간섭 없이 민간 기업들이 자유로이 경쟁하면서 150~300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서서히 이룩한 성과이다. 그 결과 후진국과의 격차가 너무 커져서 후진국으로서는 구미식(歐美式) 산업혁명 과정을 그대로 답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됐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정부 주도하에 계획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이는 정부가 산업국가 건설 계획을 수립 했어야 함을 의미한다. 제3장은 여기에 대한 설명이다.

제 2편에서는 산업국가 건설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이 놓여진 여건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국가원수나 공무원, 특히 테크노크라트의 중요성, 근로자 문제, 경쟁국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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