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의 산업혁명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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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의 산업혁명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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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산업국가 건설 계획 (中)

 
   
  ^^^▲ 대만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왼쪽), 경제현장을 둘러보시는 박정희 대통령(우)1965년 2월 17일 대만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에게 둘러싸여 미소짓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과 손을 잡고 활짝 웃으며 서 있는 사람이 박 대통령 경력미화시리즈의 필자로 돼있는 가오칭인(화살표), 가오칭인 왼쪽이 군관학교 동기생 차이충량이며 박 대통령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군관 학교시절 중대장을 지낸 자오궈치(만주국 마지막 황제 푸이의 매부)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외환위기 1차 5개년계획 축소 조정

1963년은 우울한 해였다. 제1차 5개년 계획 사업을 막 추진해 가는데, 가장 중요한 돈이 떨어진 것이다. 탄약이 떨어지면 전쟁은 못한다. 우리나라의 외화보유고는 5.16혁명이 일어나던 해인 1961년 말에 2억 520만 6천 달러, 즉 약 2억 달러였다.

그런데 5개년 계획을 추진해 가면서 정부보유 달러를 조금씩 썼다. 국내공장 가동을 위한 원자재도 수입해야 했고, 필수 불가결한 물건도 수입해야 했다. 그래서 외환은 줄어만 갔다.

1962년 말에는 1억 6,679만 달러로 약 4천만 달러가 줄었고, 1963년 3월에는 1억 3,705만 달러, 동년 9월에는 1억 540만 달러가 됐다. 이 액수 중 순 미국 달러는 9,329만 달러로 1억 달러 이하로 떨어져 버렸다. 우리나라의 달러 총보유고가 1억 달러에도 못 미치게 된 것이다. 파산 직전이었다. 우리나라의 첫 번째 외환 위기이다.

이런 상태로 5개년 계획을 계속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제1차 5개년 계획의 축소 작업이 시작되었다. 추진이 잘 안되는 사업은 1차 5개년 계획에서 삭제하고, 다음 단계(2차 5개년계획)로 미루기로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종합제철 사업이다.

그러고 보니 당초 중공업에 속하는 금속, 기계부분에 (공업분야 투자액 중) 28.8%를 투입하여, 11개 사업을 추진하려던 원래 계획은 추진이 잘 안되자 5개 사업에 14%로 축소시켰다. 그것도 교통부소관 철도 공작창 확충사업을 빼면, 4개 사업에 겨우 2.1%를 할당했다. 즉 중공업은 제1차 5개년 보완 작업시 거의 배제하고 말았다.

경공업 분야는 40.2%를 투자하여, 23개 사업을 추진하려던 원래 계획이 12개 사업 38.6%로 변경되었다. 그 중 화학공업 분야는 전혀 변경이 없었다. 진척속도는 늦기는 하나, 추진이 잘 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한 일이다.

나머지는 중소기업 육성 등 기타 사업에 대한 투자였다. 특히 중소기업 육성은 시급한 과제로 인식되어 당초 1.8% 밖에 투자 계획이 없던 것을 30.4%로 대폭 증액하였다.

교통부 소관(30.6억원)을 뺀 민간에 대한 중공업투자액 5.3억원과 화학공업 및 경공업투자액 98.2억원을 비율로 나누면 5대 95이다. 제1차 5개년 계획은 경공업과 화학공업에 중점 투자하도록 수정했다는 결론이다.

연평균 경제 성장률도 당초 7.15%에서 5%로 하향 조정하였고, 총투자도 당초 50.8%에서 31.9%로 대폭 축소하였다. 가용자원면에서 외자도입 계획도 8.95%에서 8.1%로 줄였다. 그리고 국무회의는 외환사정이 호전될 때까지, 민간사업에 대한 정부의 지불보증을 중지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생필품의 수입도 극도로 제한했다. 이런 상태가 되니 국민들의 위기감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조치로 말미암아 외환보유고는 조금씩 늘어나 연말에 가서는 1억 2,100만 달러가 됐다.

朴 대통령이 1964년도 연두교서에서 외환보유고 1억 2,100만 달러를 굳이 1963년도의 실적으로 내세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가 외환위기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으니 국민들은 안심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 www.ceoi.org^^^  
 

경제 총수

당시 우리나라의 최긴급 과제는 「민생고 해결」과「경제 자립」. 이를 위해 혁명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키로 하고, 행정계획을 단행했고 정부조직을 개편했다.

그리고는 우리나라 경제를 책임지고 이끌어갈 인재, 즉 경제총수를 물색했다. 아마도 「제갈공명」또는 ―독일을 통일시킨― 「비스마르크」와 「모르트케」같은 인재를 갈구했을 것이다. <도표 3-5>는 1960-70년대의 경제장관 명단이다.

경제기획원 장관이라면 우리나라의 경제 총수이다. 이 표를 보면 역대부총리(초대장관 김유택을 위시해서 김현철, 유랑순, 원용석씨)등 모두 당시로서는 내노라하는 경제행정계통의 거물급이었다.

그러나 경제기획원 창설(1961. 7) 이후 제7대 장관이 퇴임하는 1964년 5월까지 2년 10개월동안 ―즉 34개월 만에― 7명의 장관이 바뀌었으니 평균재임기간은 5개월도 못된다.

이 기간 중 김유택씨는 초대, 제4대, 제7대 장관으로 세 번씩이나 같은 장관자리에 올랐다. 그러니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사정이 얼마나 곤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朴 대통령은 우리나라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경제총수에 합당한 인재를 추천 받아 이 사람을 채용해도 안 풀리고 저 사람으로 바꿔도 잘 안되고 구관이 명관이라 구관을 또 한번 시켜도 별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경제기획원장관의 권한이 약하다는 여론이 있자 제7대 장관부터는 부총리라는 직함도 부여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제사정은 수렁속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물가고, 인플레, 실업자 문제 등으로 민생고는 극심했고, 국민의 여망을 등에 업고 혁명정부가 사활을 걸고 추진하는 제1차 5개년 계획도 지지부진해서 1963년도에는 축소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1963년도에는 외환위기까지 일어났다. 그러니 朴 대통령으로서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朴 대통령은 단안을 내려 경제정책의 일대 전환을 한다. 1964년 5월이다. 이 후 「수출제일주의+공업입국」이 국가 최고 경제시책이 된다.

朴 대통령은 자신의 모든 정력과 국력의 모든 것을 수출에 쏟아 부었다. 아울러 이를 추진하기 위해 경제기획원장관겸 부총리에 장기영씨, 상공부장관에 박충훈씨를 임명했다(1964. 5).

매크로적이나 실무경제에 밝고 불도저식 추진력이있는 - 장기영 부총리와 - 수출장관이란 별명을 얻고있던 -박충훈 상공부 장관의 콤비는 그 후 우리나라 경제를 수렁에서 구하고 나아가서 산업혁명으로 발전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하게된다.

경제기획원장관은 장기영씨가 3년 5개월, 그 바톤을 이어 받은 박충훈씨가 2년 9개월, 김학렬씨가 2년 6개월 근무 중 공직서거 했고, 이어 태완선씨가 2년 9개월, 남덕우씨가 4년 3개월(최장수 부총리), 신현확씨가 1년 근무 후 총리 승진 등 모두가 장기 근무하게 된다.

장기 근무한다는 것은 경제정책이 안정되고 있었다는 중요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 광양(포스코광양제철소#이고시오)만 일대를 해상시찰 하시는 박정희 대통령(왼쪽)남해안 고속도로를 공중 시찰한 뒤 공업단지 예정지인 광양만 일대를 해상 시찰하면서 선상에서 작업지시를 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연두교서 (1965~66년도)

1965년도 대통령 연두교서(年頭敎書)(1965.1.16)

1. 요 지

가. 1964년도 업적

(1) 기간산업 건설의 진척

(2) 수출 : 1억2천만 달러

(3) 일용품의 국산화

(가) 자전거 생산 : 15만5천대
(나) 재봉기 생산 : 15만대

나. 1965년도 시책방향(경제)

(1) 증 산

(2) 수 출

(3) 건 설

다. 1965년도 경제목표

(1) 농수산물의 증산 : 양곡 3천7백만석

(2) 광공업부문의 증산

석 탄 : 1천만 톤
전 기 : 77만 kw
석 유 : 3만5천 바렐/日
양 회 : 190만 톤
유 리 : 60만 상자

(3) 수출목표 : 1억7천만 달러

(4) 국토종합개발 및 전력, 철도, 주택 등의 건설

(가) 기 착공한 공사의 완성
(나) 정선선, 경북선, 진삼선(晋三線) 개통을 비롯한 240여km의 철도 부설
(다) 마이크로웨이브의 신설
(라) 자동전화 확충 : 3만7천 회선
(마) 외항선 도입 : 4만여 톤

1964년도 업적으로는 1억 2,000만 달러를 수출했다고 나온다. 그리고 1965년에는 「증산, 수출, 건설」을 시정방향으로 설정했는데, 증산에서는 양곡 3,700만석, 석탄 1,000만 톤 등등 수출에서는 1억 7,000만 달러를 책정했다. 건설에서는 국토개발, 전력, 철도, 주택 등의 건설을 나열했다.

그리고는 「나는 금년을 "일 하는 해"로 정하고 정부와 국민이 일치 단결하여 거족적으로 일하고 전진할 것을 사랑하는 2,700만 동포에게 호소한다」고 했다.

이 연설문은 전년도까지의 연두교서와는 달리 활기에 넘치고 자신에 차 있다.

朴 대통령은 작년에 국가경제 정책을「수출제일주의 +공업입국」으로 일대 전환을 하고 난 후 수출에 매진한 결과, 년수출 증가율 40%, 액수로는 1억 2,000만 달러를 달성했다. 이로서 朴 대통령은 경제발전에 대한 돌파구를 찾았다고 확신했다.

수출을 계속 밀고 나가면 우리나라도 가난을 면하고 나아가서 중진공업국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1965년의 수출목표는 1964년에 비해 40% 증가한 1억 7,000만 달러로 책정하고 국민들에게 「증산, 수출, 건설」을 하자고 호소한 것이다. 국민들에게 1965년을 "일하는 해"로 정하고 모두 열심히 노력하자고 다짐한 것이다.

1966년도 대통령 연두교서(年頭敎書)(1966.1.18)

1. 요 지

가. 1965년도 업적

(1) 경제성장률 : 8%

(2) 양곡생산 업적 : 양곡 350만 톤, 맥류 128만 톤

(3) 제2차 산업성장률 : 17.5%

(4) 전 력 : 77만 kw

(5) 석 탄 : 1천만 톤

(6) 정 유 : 3만5천 바렐

(7) 시멘트 : 172만 톤

(8) 비 료 : 제3, 4, 5 비료공장의 착공

(9)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10) 수출증대 : 1억8천만 달러

(11) 경제 체질 개선 : 환율 현실화, 금리 현실화, 저축의 증가 238억원

(12) 세수(稅收)증대 : 45.5%
 
나. 1966년도 시책방향(경제)

(1) 경제 체질 개선 : 환율, 금리, 금융, 조세, 공공요금의 현실화

(2) 물가안정 : 물자 수급 원활, 공정거래, 수입의 자유화

(3) 재정, 금융의 안정 : 통화 팽창 억제, 조세 재정 수입 증대, 내자 동원 체제 보강

(4) 외자도입 체제 정비 강화

다. 1966년도 경제목표

(1) 수출목표 : 2억5천만 달러

(2) 경제성장률 : 7% 이상

이 도표를 보면 朴 대통령은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맨 처음 언급한 것이 1965년도에 경제성장률 8%(공업 성장율은 17.5%) 달성했다는 것이다. 놀라운 성과이다.

수출은 1억 8,000만 달러를 달성했는데 작년대비 50%의 증가율이다. 세수(稅收)도 45.5%가 증가됐고, 지지 부진하던 5개년 계획 사업도 순조롭게 진행되기 시작해서 제3, 4, 5 비료공장 모두 착공했다는 내용이다. 금년도(1966)는 수출증가율 40%, 즉 2억 5,000만 달러 목표를 달성, 7%의 경제성장을 이룩하겠다는 것이다.

朴 대통령은 「금년이야말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매듭짓고 제2차 5개년 계획의 준비작업에 착수하여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중략)

정부는 지난 수년동안 우리가 이룩한 경제적 성과를 토대로 하여 금년에도 무엇보다 안정기조 위에 경제성장을 이룩해 나가고 우리 경제의 국제경쟁력 강화에 힘쓸 것입니다.」 그리고는 1970년대 말까지를 내다보는 장기 구상도 발표했다.

「나는 조국근대화 작업이 다음 3단계를 거쳐 비로소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업국가의 기초가 마련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나는 1966년을 그 첫 단계로 한다면 제2단계는 공업화를 이룩하는 제2차 5개년 계획이 끝나게 될 1971년을 말하는 것이며, 제3단계는 제3차 5개년 계획이 끝나 대량생산을 거쳐 대량 소비가 이루어질 1970년대 후반기가 될 것입니다. (중략)

년간 경제성장률 7% 이상의 수준을 견지하여 1970년대까지의 국민총생산을 현재의 2배 이상으로 증가시키자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그 해(1966년) 11.9%의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우리나라는 고도성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출은 2억 5,000만 달러, 그 중 공산품 수출비중은 63%에 달했다. 수출증가는 공업입국 정책의 결실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67년에는 대망의 수출 3억 달러 돌파(목표수치는 3억 5,000만 달러)를 위해 매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를 달성하게 된다. 이 해 경제성장률은 11.9%에 달했다.

 

 
   
     
 

경제개발 5개년의계획의 변질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기간 즉, 1962년으로부터 시작해서 1966년으로 마감하는 5개년은 우리 민족이 「빈곤과 절망」으로부터 「근대화와 번영」으로 탈바꿈하는 위대하고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 기간 중 우리는 시행착오로 절망을 하면서도 굳은 의지로 이를 극복, 드디어 활로를 찾은 것이다. 이 후 우리나라는 고도성장을 지속하게 된다. 소위 Take Off(이륙)를 한 것이다.

그렇다면 제1차 5개년계획은 대성공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설명한대로 제1차 5개년 계획은 상공부 등 라인(Line) 부서에서 매크로적으로 성안한 소위 쇼핑리스트를 경제기획원에서 매크로적으로 종합한 것이다.

그래서 마이크로적인 것과 매크로적인 것이 동시에 포함돼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이 끝나고 이를 평가하려고 하니 매크로적 즉, 국가경제 전반을 통계수치로 파악할 때에는 모든 면에서 경이적인 성공이었다.

한 예로 수출 같은 것은 1966년 말(1차 5개년 계획의 목표연도)의 목표치가 1억 1,750만 달러이었는데 실제로는 2억 5,575만 달러를 수출했으니 218%의 초과 달성이다.

그러나 마이크로적인 면 ―즉 사업하나 하나를 따지면― 어떤 사업은 성공을 했으나 어떤 공장은 건설도 끝마치지 못한 것도 있고, 심지어는 ―1963년에 1차 5개년계획을 축소 보완할 때― 아예 취소된 사업도 많았다. 그러니 성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입장이 됐다.

사정이 이렇게 되고 보니 경제기획원에서는 제2차 5개년 계획부터는 매크로적으로만 다루고 마이크로적인 것은 빼기로 했다. 즉 국가경제 전반에 대한 방향설정과 이를 뒷받침할 통계수치만을 담고 개개 사업은 문장으로 대치해 버린 것이다.

물론 예산배정도 ―개개 사업별로는 하지 않고― 분야별로 배분했다. 이런 조치로 말미암아 각 사업부처는 장기사업 즉 몇년 간에 걸쳐 수행하는 사업이라도, 매해마다 경제기획원에 가서 애원을 해가며 예산확보를 해야 하는 힘들고도 고달픈 신세가 됐다.

장기적인 사업에 착수하고 난 후, 제때에 충분한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면 사업중단이라는 낭패를 본다. 그러니 장기적인 사업은 추진하기에 앞서 단단한 조치가 필요하게 됐다.

우선 명목적이나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포함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예산을 달라는 말조차 꺼낼 수가 없게 된다. 두 번째가 朴 대통령에게 브리핑을 해서 사전에 결제를 받아 놓는 조치이다.

이때 연도별 소요자금을 명시해서 재가를 받아놓아야 한다. 이런 조치를 「목돈확보 작전(略해서 목돈작전)」이라고 했다. 결국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사업추진을 위한 계획이 아니라 경제전망을 통계적 숫자로 나열한 계획으로 바뀌어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각 부처에서는 5개년 계획은 「계획은 계획이되 확정은 아니다」라는 말을 하게 된다. 5개년 계획이란 수정 가능한 계획이라는 뜻이다. 각 부처마다 여러 개의 5개년 계획이 나오게 된 연유이다.

다음에 그 실 예를 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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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중흥 2006-05-16 11:12:28
오직 나라 잘사게해 국민들 편안하고 행복하게 민족중흥만 꿈꾸었다.

70년대 막이오르자 그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하여 100억불 수출을 이룩하자고 당시로서는 구름잡는 계획안을 내놓았다.

종합제철, 조선공업육성 전자산업 석유화학 기계공업을 육성하여 선진 공업국으로도약하고자하는 꿈같은 계획을 내놓았다. 그시대에 그같은 생각은 몽상가의 구름잡는 소리였다.

자본도 없고, 기술도 없고 ,시장도없고,원자재도없는 상황에서 어떻게그꿈을 실현한단말인가? 그러나 그 허황된 꿈같은 계획은 초과달성 되었다.

세계 제1의 경쟁력을 갖인 포스코, 세계제1의 조선왕국 대한민국, IT산업의 선두주자 삼성전자, 세계를 주름잡는 한국의 자동차, 박정희 그는 꿀수없는 꿈을 꾸고 그꿈을 현실화하려는 몽상가였다.

마침내 그꿈은 더이상 꿈이 아니였다.
꿈이 현실이 되었다.

이제 우리도 꿈을 꾸자.
꿈같은 꿈을 꾸고 그꿈을 현실화 하자.
우주산업
정보산업
금융산업
지식산업
물류산업을 연구 발전시켜 21세기의 강대국으로 나아가자.


이용환 2006-05-16 12:12:17
우리 이제 솔직해 지자

박정희는 이순신, 세종대왕 이상의 우리나라 역사의 기적을 만든 사람이다.

1960년 당시 우리의 상황을 냉철히 바라보자. 국민소득은 전세계 최하위 수준이었으며 무역수지는 10 대 1로 적자였고 수출품은 일본에 헐값에 팔아먹던 돼지고기 김 어패류등이 고작이었고 수입의 90프로는 미군의 원조와 주둔미군이 한국에서 쓰는 달러로 채워지는 상황이었다.

더우기,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며, 공비를 내려 보내고, 땅굴을 파 내려오던 북한이 있어서 안보적으로도 매우 불안했던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손엔 총을 한손엔 삽을 잡아야하는 상황이었다 .

공장을 세우고 물건을 만들어 팔아먹는다는 개념조차 세워져있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인력들이 일할 곳을 찾지못하여 수많은 젊은 청년들이 할일없이 뒷골목이나 기웃거리던 시절이었다.

당시 세계 각지의 신독립국들은 이른바 종속이론에 입각하여 자립경제를 추진하고 있었고 북한 역시 소련의 경제종속을 염려하여 결국 주체를 앞세운 자립경제 체제로 가게되었다.

박정희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로 수출이라는 걸 생각해낸 지도자였으며 그것을 추진한 사람이다. 또한 거의 모든 세계 경제전문가들의 회의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중공업화를 추진해 결국 유신시대에 그 기틀을 닦아놓았던 사람이다.

1973년에 박정희가 중공업화 계획을 발표하며 대망의 80년대에는 수출 100억불 국민소득 1000불을 달성하자고 했을 때 그걸 곧이 곧대로 믿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국의 모든 차들을 세워봐야 경부고속도로도 못 채운다며 재벌들 골프치러가기 편하게 하려고 고속도로 만드냐며 많은 경제 인사들 야당지도자들이 반대했으며, 포화상태인 제철산업은 왜 무리하게 추진하느냐는 비판을 세계각국의 전문가들로부터 들어야 했으며, 정유 화학 단지 조성때도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욕을 먹었으며, 이미 후발주자가 끼어들수 없도록 체제가 잡힌 전자 조선 산업등의 육성은 무리하다는 비판도 수없이 들어야 했다.

비록 박정희 평생의 꿈이었던 부국강병, 중공업 강국의 꿈을 박정희 자신은 보지 못한채 서거했지만, 80년대 들어서면서 그가 추진했던 산업들이 결국 현재의 우리나라를 만든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 우리는 박정희가 그토록 내외의 수많은 비판을 무릎쓰고 추진한 산업구조안에서 결국 먹고 살고 있는 샘이다. 자립경제를 추구한 남미의 수많은 군사정권들 과 동남아시아 국가들 그리고 북한은 결국 나락의 늪으로 떨어졌고 북한은 아직도 정신못차린채 결국 동네 부랑아 같은 국가가 되버렸다.

우리나라와 홍콩 대만 싱가폴등을 비교하는 얼간이들이 있는데 그게 얼마나 황당한 비유라는 걸 아는가. 싱가폴은 광대한 관광자원으로, 대만은 장개석이 들고온 무지막지한 금괴로 코에 손하나 대지 않고 코풀듯 경제개발을 시작한 나라이다.

우선, 아시아의 경제성장 국가들을 칭찬하기 위해 만들어 졌던 말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는 비유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을 제외한 다른 세 국가는 한국보다 규모가 훨씬 작다.

인구로만 보아도 대만이 한국의 절반 수준일 뿐 홍콩과 싱가포르는 도시국가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도시국가를 급성장시키는 것은 한국과 같은 국가적 규모의 경제를 활성화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홍콩과 싱가포르의 성장에는 아시아의 금융과 무역중심지로서의 역할이 큰 기여를 했다.

대만의 경우, 국민당 정부가 본토에서 피난오면서 이른바 부와 지식을 갖춘 엘리트집단이 주축을 이루었고, 따라서 상당한 물적·인적 자본을 대동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워진다.

홍콩, 싱가포르도 마찬가지로 자본을 겸비한 화교의 활동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외형적 조건이 성장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에 그들의 노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런 요소를 발견할 수 없는 한국이 성장하기는 더욱 어려웠으리라는 것은 자명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무것도 없었다. 돈도, 기술력도, 잘살아 보겠다는 의지마저. 아무것도 없었다.

2차대전 이후 식민지 출신 독립국가중 우리나라와 같은 강대국형 산업구조를 갖게 된 나라는 오직 한 나라 바로 대한민국 뿐이다. 그리고 그 구조를 추진한 사람이 바로 박정희라는 사람이다.

분명히 알아두어야 한다. 박정희는 앞으로 계속 신화화 될 것이다. 지금 박정희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점차 죽어서 없어지면 없어 질 수록 박정희는 신화화 되어갈것이다.

우리 5천년 역사에 지금 처럼 잘 살아 본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그 뿌리를 만든 사람이 바로 박정희이기 때문이다

나원참 2006-05-16 12:59:39
뉴타가 언제 논문 학술지로 변했나? 나 원참.
장준하는 안 다루나?

조민형 2006-05-16 15:51:07
오늘 뉴스타운에서 산업발전 영상물을 함께보니 실감이 나는 군요.
자세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경제학도 2006-05-16 15:52:16
이번에 논문을 쓰야 하는데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대한민국의 근대화와 경제성장 모델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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