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그려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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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그려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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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도 양옥도 아닌 이상한 집을 그렸다

 
   
  ▲ '집을 그려 보시오' 하면 그리는 집처마와 박공이 동시에 보이는 3차원 투시도를 그렸다  
 

다섯 살이나 여섯 살 정도된 아이에게 크레용을 쥐어주며 ‘집을 그려보라’고 하면 그리는 그림이 있다. 박공 지붕을 하고 장방형의 평면을 한 아주 단순한 양옥집 한 채.

여덟, 아홉 살 정도가 되면 여기에 출입문과 창문을 그려 놓고, 열살 정도가 되면 지붕엔 비둘기 창을 그리고 지붕 꼭대기엔 십자가를 그려 넣는다. 어찌된 영문인지 집은 교회가 되고 말았다. 꼼꼼한 여자아이라면 벽면에는 벽돌을, 지붕에는 기와를 그려 넣을 것이다. 미술이나 건축에 비상을 재능을 보이는 아이라면 좀 더 다른 모습의 집을 그리겠지만, 평범한 아동은 대개 이 도식을 그대로 답습하며 성인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이다.

어른에게 집을 그려보라고 해도 대개 열살 정도의 아이가 그린 그림 정도를 그린다. 때로 창문에는 커튼을 그리고 집 앞에 나무 몇 그루와 울타리를 그려 넣고, 포스트 박스나 가로등을 그리기도 한다. 여기에 분홍이나 보라 등 난색 계열의 파스텔 색조로 색을 칠하면 인터넷에서 흔히 봄직한 아바타의 뒷배경이 된다. 그가 아파트에 살건, 한옥에 살건 집을 그리라고 하면 꼭 그런 모양을 그린다.

그리고 여섯 살 난 아이가 그렸던 그 간단한 형태의 그 도형을 우리는 ‘집 모양’이라고 부른다. 실상 간단한 도형 같지만 한 건물의 정면과 측면을 동시에 볼 수 있는 3차원적인 것으로, 건축학적 용어로 그것은 ‘투시도’이다. 여섯 살짜리가 벌써 투시도를 그리다니, 놀라운 일이다.

동양식 주택과 서양식 주택의 가장 큰 특징을 꼽으라면 전면(前面)과 출입구를 어디에 두는가 하는 것이다. ‘전면 박공’인가, ‘전면 처마’인가에 따라, 다시 말해 건물의 얼굴을 박공으로 하는가, 처마로 하는가에 동양식과 서양식이 판가름 난다. 서양식은 대부분 박공면을 얼굴로 하는 ‘전면 박공’ 형태이고(약간의 예외가 있기는 하다), 동양식은 그와 반대로 모두 ‘전면 처마’ 형식이다. 그렇다면 박공은 무엇이고, 처마는 무엇인가.

집의 단순한 형태는 직사각형이다. 직사각형에서 길이가 긴 쪽이 있고 짧은 쪽이 있는데, 지붕 선은 대부분 길이가 긴 쪽으로 놓인다. 그리하여 길이가 짧은 쪽에서는 앞면에 삼각형의 형태가 생기는데, 이렇게 뾰족 지붕의 앞쪽을 ‘박공’이라하고, 그 측면을 ‘처마’라고 한다. 서양의 집들은 대개 입구를 박공 쪽에 내는 경향이 있고, 동양의 집들은 처마 쪽에 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 것은 건물과 도로를 만드는 데 있어 동서양의 서로 다른 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거리 풍경뾰족한 박공 지붕들이 거리를 향해 있다, 동양에서는 절대 이러한 풍경이 나올 수 없다  
 

서양식은 넓은 땅 위에 도로를 먼저 내어서 필지를 구획한 후, 그 곳에 집을 짓는다. 넓은 도화지에 굵은 크레용으로 바둑판 무늬를 그리면 작은 사각형들이 생기는데, 그 작은 구멍마다 집을 한 채씩 그려 넣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인구가 점점 많아지다 보면 좁은 땅에 많은 집을 지어야 한다. 출입구가 길거리에 면하지 않은 집이란 서양에서는 상상도 못할 것이기에 궁여지책으로 땅을 길게 쪼갤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좁을 망정 모든 집이 길거리를 향해 공평하게 출입구를 갖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대지의 모양은 점차 세장(細長)해 질 수 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박공쪽에 출입구를 두어 전면을 향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바다를 메워 육지를 만든 네덜란드에서는 한 뼘의 땅도 소중하다. 거리를 향해 뾰족 지붕들이 예쁘게 임립해 있는 암스테르담의 독특한 거리 풍경은 바로 이 때문에 나온 것이다.

동양식은 이와 반대로 집을 먼저 짓고 담장을 두르고 난 후, 남은 공간이 길이 된다. (지금도 서울의 강북 오래된 동네에는 막다른 골목들이 많은데, 집부터 먼저 지은 후 길을 만들면 꼭 이런 막다른 골목이 생기게 된다) 따라서 집은 땅 모양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지을 수 있었는데, 사람은 눈이 양쪽에 나란히 붙어 있기 때문에 아래위로 길쭉한 것보다는 좌우로 넙적한 것을 보는 것이 더 편리하다. 그래서 집도 자연스럽게 좌우로 넙적한 ‘전면 처마’ 형식이 사용된 것이다. 서양에서도 인구가 밀집한 도시 지역이 아닌, 농촌 지역에서는 동양처럼 전면 처마 형식이 자주 눈에 띄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열 살 먹은 아이가 집의 형태라고 그리는 것이 정형화된 어떤 모습이다. 전면 처마인지, 전면 박공인지 잘 구별이 되지 않는 어정쩡한 집이다. 사실 박공면도 그리고 처마면도 그렸다. 이것은 바로 집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정신과 육체는 아직 동양인이지만, 살기는 서양식 집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지금 모습 말이다.

어지럽던 개화기에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말이 자주 쓰였다. 동양의 정신에 서양의 제도를 받아들여 쓰겠다는 말이다. 일제시대 건축계에서는 화혼양재(和魂洋才) 라는 말도 쓰였다. 여기서 ‘화(和)’는 일본을 뜻하니, 서양식 기술로 일본의 정신이 깃든 건물을 짓겠다는 말이다. 집을 그릴 때 박공면과 처마면을 동시에 그리는 것에서 동도서기, 화혼양재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본다. 더구나 벽면에는 서양식 벽돌을 그리고 지붕에는 동양식 기와를 그렸다. 생활은 서양식이어도 정신은 동양식이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지붕 꼭대기에 그려진 십자가는 건축을 비롯한 근대 문물이 기독교와 함께 전래되었던 역사의 흔적인가.

이제 대부분 아파트에 살고 있는 우리들, 그런데 왜 아직까지 집을 그리라고 하면 아파트를 그리지 못하고 이런 집을 그리는가. 아파트가 아직까지 우리의 삶에 밀착되지 못했음인가, 지금은 너도 나도 편리함에 살고 있지만 언젠가 자리가 잡히고 성공도 하면 곧 시골에 넓은 땅을 사서 내가 살 집을 직접 짓겠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인가. 아파트 분양권 추첨에 당첨되고 난 후, 착한 학생 숙제 검사를 받듯이 정해진 날짜에 꼬박꼬박 돈을 내며 그 아파트가 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드디어 입주일, 천하를 얻은 듯한 기쁨으로 이사를 들어갔다 한들, 그 집은 아직까지 완전한 내 집이 되지 못했는가, 우리의 깊은 잠재의식 속에는 ‘집이란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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