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는 왜 환속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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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는 왜 환속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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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는 개혁이 아닌 정화(淨化)되어야 한다

신라국 승려 사회에 최고 문장가인 원효대사는 당시 사회인들에게는 인기가 많았지만 중년에 들어서 불문을 떠나 환속하여 요석공주(瑤石公主)의 남편이 되어 아들 설총(薛聰)을 낳고 스스로 이름을 소성거사로 칭하고 만년에 요석궁에 살았다. 왜 원효대사는 왜 불문을 떠나야 했을까?

원효대사는 요석공주의 매력에 빠져서? 내가 분석하기에는 요석공주에 빠져서 만은 아니다. 당시 못된 승려들이 사회에 명망있는 원효대사를 시기 질투하여 온갖 음해와 모략중상을 하고 사찰에 살 수 없게 지독한 공작을 하여 사찰에서 내쫓아 오갈데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부처님을 닮는 수행 보다는 불교를 이용하여 권력자인 왕과 왕비는 물론 권세있는 조정대신과 부호에까지 아부하여 호가호위(狐假虎威)로 또하나의 부와 권세를 누리던 당시 사판승(事判僧)들의 눈에서 볼 때에는 원효대사는 척결해야 할 불온분자(不穩分子)요 해종분자(害宗分子)로 보았다.

첫째, 원효대사는 불교의 위선같은 계율과 신비를 깨고 "대중불교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파격적으로 저자거리에 나가 민초들과 어울려 막걸리를 마시고, 민초들을 위로하는 노래를 부르고, 민초들을 위로하는 대중법문을 하여 민초들을 기쁘게 하였다. 사찰에서 부처님같이 위선을 떠는 승려들과는 달리 예컨대 초상집에 가서 애도하고 염불하고 장송곡을 부르는 원효대사가 기존 위선의 승려들에게는 "불교를 개망신 시키는 구먼" 질타하고 이를 갈아 증오하였다.

사찰에서 내쫓기는 원효대사는 울분을 참으며 부지런히 자신의 대오(大悟)가 담긴 불교에 관한 저술을 쉬지 않았다.

그가 곡차를 좋아하여 민초들과 벗이 되고, 스승이 되어 곡차를 마셨지만, 그는 취중에도 머릿속에는 불교 중흥을 간절히 원하는 글을 쓰고 있었다. 원효대사는 취해 살고 취해 죽은 소위 취생몽사(醉生夢死)가 아니었다. 술에 대취하여 작부(酌婦)와 이층(二層)을 이루는 막행(莫行)도 하지 않았다. 원효대사가 술이 얼근히 오르면 그의 입에서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은 물론 그의 독창적인 불경에 대한 논소(論疏)가 여병지수(如甁之水)처럼 쏟아져 나왔다. 왕과 귀족들만이 들을 수 있는 법문이 아닌 민초들을 위한 무진법문(無盡法門)이었다. 민초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하였지만, 귀족불교를 하며 돈을 챙기는 주지 등 승려들은 위기를 느끼고 전전긍긍하였다. 사찰에서 내쫓긴 원효대사는 동양 최대의 불교 관련 저술을 남겼다.

당시 원효대사를 사찰에서 내쫓고, 죽기를 바라고, 증오하고, 오직 졸부(猝富)되기 위해 혈안이던 승려들은 목숨이 끊어지자 세상은 위선자요, 모리배(謀利輩)라고 그를 질타하고 논평하며 기억하지 않았지만, 원효대사는 한국불교가 존재하는 한 영원한 대저술가요, 민초를 찾아가 어울려 사랑한 성자로 인구에 전해지고 있다.

고립무원(孤立無援)한 처량한 신세가 된 원효대사는 어느 날 아침부터 신라 서라벌 거리를 걸으며 미친듯이 큰 소리로 이런 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만들고자 한다."

원효대사의 이상한 노래는 서라벌의 화제가 되었다. 보통 사람들은 원효대사의 노래의 참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원효대사의 노래를 보고 받은 태종(무열왕)은 손으로 무릎을 탁 치며 노래의 뜻을 이렇게 해석했다. "스님께서 아마 배필(配匹)을 얻어 훌륭한 자식을 낳으려 하신 모양이구나. 그런 분의 자식이라면 영특할 것은 틀림없고, 나라에 훌륭한 인재가 생기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다. 마땅한 여자가 있어야 하겠는데..."

무열왕은 마침 자신의 세 명의 딸 가운데 장녀인 요석공주(瑤石公主)가 과부가 되어 혼자 살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요석공주는 화랑 출신인 김흠운에게 시집을 가서 딸을 낳았다. 김흠운은 655년 '양산 전투'에서 백제군에 맞서 전투를 하다가 패전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졸지에 요석공주는 과부가 되어 어린 딸과 함께 요석궁에서 쓸쓸히 살고 있었다. 무열왕은 늘 요석공주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무열왕은 즉시 요석공주를 불러 원효대사와의 결혼할 의향을 하문해 보았다.

요석공주는 이미 원효대사의 문장능력과 인품을 흠모하고 있었다. 서라벌의 큰 절에서 대중법회를 하는 원효대사를 처음 친견하였고, 우렁찬 설법을 듣고는 큰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아버지인 무열왕이 인연 맺기를 권하니 기쁘게 받아들였다. 따라서 원효대사는 요석궁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아들 설총을 만들고, 또 많은 저술을 하였다. 원효대사는 요석궁으로 간 후 승복을 벗고 자칭 소성거사(小姓居士), 또는 복성거사(卜姓居士)로 불러 주기를 바라며 살았다.

小는 작다는 뜻이고, 卜은 '아래 하下'의 아랫부분에 해당된다. 즉, 소성이나 복성이라는 말은 아랫것 중에서도 가장 아래에 위치한 백성이라는 뜻이 된다. 원효대사는 백성중에 가장 낮은 백성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이름을 지어 부른 것이다. 천민거사(賤民居士)라는 뜻이기도 하다.

원효대사는 진평왕 39년에 서라벌 압랑군 남쪽 불지촌의 율곡마을에서 태어났다. 원효대사는 출생부터 남달랐다. 어머니가 원효를 가졌을 때 밝은 별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해산할 때는 오색구름이 땅을 뒤덮었다는 전설이 있다. 원효대사는 어린시절 부터 총명하고 영리하여 한 번 들으면 기억하고 속세의 학문에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의상대사와 구법을 위해 당나라로 떠났다. 해골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깨달은 이야기는, 생략-)

나는 원효대사를 사찰에서 내쫓은 당시 추악한 사판승들에 질타를 서슴치 않는다. 그 추악한 매불의 모리배들은 신라, 고려, 이조를 거쳐 작금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원효대사같은 대문장가가 사찰에서 주석하며 불교 문장을 지어 세상에 반포하고 설법하게 했으면 불교가 얼마나 흥성 했겠는가. 내가 과거지사를 고찰해보니 신라의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대사도 돈만 밝히는 사판승들에 의해 모진 탄압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조(李朝)에 이르러 선운사의 대문장가인 백파대선사도 모진 탄압을 받는 가운데 불교 저술에 신명을 아끼지 않았다.

또 나는 존경하는 승려 문장가 가운데 해남 대흥사 산내 일지암에서 한국 최초 동다송(東茶頌)등 주옥같은 불교 시문과 산문을 쓴 초의대사, 그리고 대흥사 구석진 방에서 가난과 병고 속에 동사열전(東師列傳)을 저술하여 역사의 고승열전을 세상에 남기고 과로로 입적한 범해(梵海)대사를 존경한다. 그들 모두 돈을 초월하여 오직 부처님의 법이 중흥되기를 서원하며 저술하다 입적한 승려들이지만 돈만 밝히는 사판승에 모진 탄압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끝으로, 한국불교는 개혁이 아닌 정화(淨化)되어야 한다. 권부에 은밀히 돈을 바치고 아부하여 권력자의 도움으로 종권(宗權)을 잡아 대소 사찰을 돈으로 매관매직하고, 허황한 사기술과 도적질로 졸부(猝富)가 되려는 가사입은 도적들이 창궐할 때 부처는 마구니의 이용감이 되는 것이다.

특히 도도한 국민을 기만하고 협잡을 하여 돈을 갈취하고 영혼을 타락시킬 때 인과응보는 반드시 있는 것이다. 나는 어두워 가는 남한강 강가에서 정든 불가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원효대사의 통한을 생각하고, 원효대사를 그리워 한다. 원효대사 이후 한국불가에는 승려의 부인 호칭을 우스개식으로 요석공주라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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