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를 장악한 까마귀는 누구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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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를 장악한 까마귀는 누구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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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팔만대장경이 봉안된 법보종찰(法寶宗刹) 해인사를 찾아 일주문(一柱門)에 서니 괴기(怪氣)어린 까마귀의 까악까악 소리가 산사의 적멸을 깨고 있었다. 온통 숲은 도처에 까마귀 소리 뿐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 이른 아침 일주문에서 천왕문을 거쳐 해탈문에 이르는 길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 텅 빈 길에 까마귀 소리만 충만했다. 해인사가 언제부터 까마귀떼인가? 도대체 까마귀는 누구의 업보 환생인가? 나는 천천히 걸으며 1965년도를 회상하며 추억에 잠겼다.

그 무렵의 해인사는 성철(性徹)대종사의 주도로 해인총림이 시작 되었고, 성철대종사는 해인사의 총수직인 방장(方丈)이 되었다. 성철대종사의 선수행을 신(信)하는 전국의 사부대중이 해인총림에 운집하였다. 당시 해인선원에는 선원장에는 지월(指月)대선사가 있었고, 용탑선원에는 고암(古庵) 전 해인사 방장이 있었다. 해인 강원장에는 지관(智冠)강백이 있었고, 홍교, 법정, 희준 등 젊은 승려들이 성철대종사가 100일 법문을 펜으로 써서 주면 등사기로 복사하여 수강생들에게 주고, 열렬히 동참하였다. 해인사가 가장 수행도량으로서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성철대종사는 사부대중에게 선불교(禪佛敎)d 대한 고준하고 해박한 법문을 해주었다. 성철대선사는 신장은 182cm가 넘는 거구(巨軀)에 눈이 크고 쏘는 듯 형형했는데, 성철대선사의 용안은 호상(虎相)이라고 나는 기억한다.

당시 해인사에 화제는 동대 교수인 박모(朴某)의 출가였다. 그는 결혼 후 성철대종사의 법문을 듣고 출가할 서원을 세우고 행자로써 공양간에서 대중의 밥을 짓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딱한 장면은 공양간 앞에서 박모 교수의 장모가 서서 삭발하고 행자의 옷을 입고 밥을 짓는 사위를 나무라고 설득하는 모습이었다. "스님이 되려면 왜 내 딸과 결혼했는가?“ 박교수가 장모의 설득에 투항하여 부인 곁으로 되돌아 가는가, 아니면 춠가수행의 각오를 버리지 않을 것인지 해인사 대중은 흥미를 갖고 관찰하고 있었다.

성철대종사는 부지기수(不知其數)의 여타 선수행자들처럼 화두만 가지고 면벽참선한 분은 아니다. 그 분은 선교(禪敎)를 통달해 있었다. 일본불교서적을 막힘이 없이 독서하고, 중국어 불교서적을 통독하고, 물리학에 대한 영어 원서까지 읽는 박학다식(博學多識)한 대종사였다. 당시 내가 관찰하니 해인총림은 물론 전국에 걸쳐 성철대종사만큼 박학다식하고 10년 장좌불와(長坐不臥)를 마친 난행고행의 수행을 한 선사는 전무했다고 생각한다.

‘무소유’라는 책자로 유명한 법정(法頂)스님도 당시 해인사에 있었다. 그는 성철방장스님의 배려로 해인사 대중 화장실로 가는 관음전(觀音殿) 옆에 조그만 서재를 얻어 불경과 일반서책을 읽으며 소위 문장수업을 하고 있었다. 당시 불교신문에 입석자(立席者)라는 시가 게재되자 나와 대중에게 무척 자랑했다. 우리는 아부적으로 입석자라는 시를 암송하고 극찬을 하기도 했다.

법정스님은 성격이 괴팍하여 같은 승려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혼자 놀았다. 여행도 혼자였다. 맛있는 음식도 혼자 먹었다는 자랑이다.

당시 합천에서 세 명이 안된다는 숙명여대생의 하나가 해인사 사하촌(寺下村)에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홀어머니는 해인사 밑에서 큰 토산품 가게를 운영했는 데 아들을 낳지 못하자 남편은 아들을 얻기 위해 다른 여자에게 떠나버렸다. “딸이 시집가면 나는 혼자 어떻게 사나?” 슬피 우는 홀어머나를 위해 착한 딸은 외로운 비구승을 사위로 맞이하여 어머니를 모시겠다는 발상을 하여 해인사에 있는 쓸만한 비구승을 목표로 유혹의 전략을 세우고 작전에 들어갔다.

그 처녀는 후리후리한 키에 미인이었고 재원이었으며 성은 유씨(柳氏)였다. 유처녀는 핑계인즉 법정스님의 방 청소를 한다는 명분으로 걸레를 들고 방을 청소를 자주했다. 전부 총각인 비구승들인 3백여 명의 수행자들은 화제가 분분했다. 나는 탄식했다. “법정스님이 음양계에 빠지면 안 되는 데….” 수년을 공을 들인 그 처녀는 참담하게 포기하고 다른 스님을 만나 결혼했다. 나는 수십 년이 흐른 후 서울에서 보험설계사의 수장으로 있는 당시 그 처녀를 만나 전략 실패담을 물었다. 그녀는 담담히 이렇게 말했다. “인연이 없으면 안 되더군요.”

내가 해인사에 당도하여 해인사를 관찰하니 전각들이 대궐같이 들어서 있었다. 해인사 선원 쪽에는 새로운 전각을 세우고, 또 포크레인이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국민의 혈세인 국고지원금으로 전각을 마구 지어대고 있는 것을 국민은 알고나 있을까? 대궐 같은 전각을 아무리 마구 지어도 성철대종사같은 도인이 출현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국민은 허리 띠를 졸라매고 혈세를 정부에 바치면 정부는 우선 두 군데서 사찰에 지원해준다. 첫째, 문화관광부의 문화재관리국이다. 그곳에서 천문학적인 돈을 문화재 보호 및 개수, 복원이라는 명분으로 돈을 지원한다. 둘째, 행안부에서 교부세라는 돈으로 사찰에 지원해준다. 그 외에도 청와대, 안기부, 각부 장관, 심지어 서울시장 등에서조차 국고를 지원해준다. 문제는 국민의 혈세로 사찰의 전각을 지어주는 데도 고마움을 국민에 표하지 않는 것이다. 사찰은 국민이 사찰을 들어올 때 입장료를 내라고 엄명한다. 국민들은 “내 돈으로 사찰의 전각을 지어주고, 또 입장료를 지불해야 사찰에 들어갈 수 있다니?” 여기서 깨어난 국민은 분노하고 궐기하여 개혁을 맹촉 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언제부터인가, 국민의 혈세인 사찰에 보조되는 국고 지원금을 얻어내기 위해 로비스트들이 뛰고 있다. 여기에 정직한 승려도 있지만, 대부분 국고를 빼내는 승속(僧俗)의 선수들이 로비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대통령과 인연이 깊은 자, 여야 당 대표, 전직 장관, 국회상임위원장급 정치인, 정부 기관장, 문화재보수업자, 등등이 나서 국고보조금을 지원하는 담당자에 로비하여 사찰에 지원한다. 공짜는 없다. 성과금은 보상된다. 국고 1억을 얻어오면 1천만원에서 1천5백만원을 사찰측에서 로비스트에게 비밀리에 보상된다. 국고 10억에서 100억을 얻어오면 비밀리에 보상금은 앞서의 수법대로 비밀로 보상금은 지급된다. 사찰측은 정부 보조금과는 별도로 신도들에게도 모금을 한다. 신도들은 자신의 시주금으로 불사를 하는 줄 알지만, 속내는 국고보조금이 있다.

전국의 고찰에 가보라. 사람이 살지 않는 전각들이 즐비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전각 등을 짓기 위해 국민들의 혈세를 쓰고, 다음에는 전각들을 보수 하느라 국민들의 혈세를 퍼붓는다. 죽어나는 대상은 혈세를 사찰에 바치고, 또 입장료를 내야하는 국민들이다. 언제부터인가, 어느 전문가는 전통사찰은 국민혈세 빨아먹는 사기꾼의 집단이요, 도적놈의 소굴이라는 주장을 한 지 오래이다.

대한민국이 진정 정의로운 법치국가라면 종교계에서 혈세 도적질하는 짓에 대하여 검경(檢警)이 오래전에 간헐적으로 특별기획수사를 해서 국민에 보고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정뇌물을 받아 챙기는 건지 왠지 검경은 종교계의 혈세 도적들에게는 대부분 수사의 눈을 감고 있디는 여론의 주장이다.

또 정의로운 대통령이라면 대다수 국민의 법상식을 위해서라도 국민혈세를 빼먹는 짓에 대해서는 파사현정(破邪顯正)에 진두지휘를 해서 국민에 보답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 임기가 거의 끝나는데도 국민혈세를 도적질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수수방관이다. 종교계의 국고지원금 10년치를 특별 기획수사를 한다면 종교계는 핵폭탄급이 터지는 개혁이요, 대한민국은 발전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혹자는 전통사찰에 국고의 혈세를 빨아 축재하는 거머리 같은 자들은 불교중흥과 하등 관계가 없는 마구니같은 자들이라고 주장하면서, 거머리 같은 자들이 떠나야 진짜 수행자가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북한과 중국, 베트남은 오래전에 인민의 행복에 이바지하기 위해 관광사찰은 국유화 되었다. 부처 팔아 국민의 혈세를 도적질하고 부처 팔아 사기 치는 시대가 도도한 민심에 의해 사라져야 한다는 여론이 작금 대한민국에 충천하고 있다. 나는 주장한다. 국립공원 등 전통사찰은 국민에게 무료 통과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한 지 오래이다.

지금도 해인사에는 해탈문(解脫門) 안쪽에 이승만 전 대통령의 휘호인 “해인대도량(海印大道場”이라는 현판이 아직 걸려 있다. 나는 해인사에 도착하여 큰법당인 대적광전에 들어가 최후의 참회기도를 올렸다. 나는 5년간 새벽예불 때면 부처님전에 서원하여 외운 '이산혜연산사 발원문'을 또다시 마음속으로 서원했다. 나는 큰소리로 부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부처님 6,25 전쟁 이후 고난에 빠진 저희들을 받아주고 공부를 시켜주신 은혜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참회의 기도를 마치고 우선 백련암으로 혼자 지팡이를 짚고 비틀대며 걷는데, 까마귀 한 마리가 머리 위로 쫓아오며, “늙었구만. 어디 가는 거야? 어디가?” 하듯 했다. 나는 까마귀에게 호통 쳤다. 까마귀는 달아났다.

백련암에 당도하니 놀랍게도 백련암에는 진짜 무소유 사상가였던 성철대종사가 등신불(等身佛)처럼 동상이 되어 앉아 있고, 그 앞에는 시줏돈을 바라는 큰 불전통(佛錢桶)이 놓여 있었다.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문을 주신 성철대종사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는 자의 상혼(商魂)이 보였다. 나는 합장하여 예배를 드리며, “어쩌다가 이런 모습을….” 박정희 대통령이 “만나자”요청을 해도 각기 국민을 위해 헌신봉사 하면 되는 것이지 만나 뭐하겠소?“ 당당하던 성철대종사가 동상이 되어 시줏돈을 바라고 있었다. 백련암에 바라건대 조사전(祖師殿)에 성철대종사를 모시고, 깨달음의 법문만 남기고 불전통은 자제해야 한다고 나는 간망(懇望)한다.

대구시에서 만난 해인승가대학 11회 동창들을 몇 명 만나 꿈 같은 과거지사를 논하며 박장대소 하는 데, 결론은 우리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해인사의 많은 수행자들이 대부분 여자와 이층(二層)을 이루기 위해 떠나갔다는 것에 동의했다. 박모 교수도 또 누구, 누구도 여자 곁으로 회향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쓰게 웃었다. 무소유를 강변하던 법정스님은 사후 현찰과 통장에 72억이나 발견되었다는 동창생의 주장에 가장 박장대소가 터졌다. 생전에 돈이 없어 자살하고 돈이 없어 진학 못하는 소년소녀들에게 보시하고 떠날 일이지 마지막까지 무소유가 아닌 수전노(守錢奴)같은 이야기는 중생에 대해 위선의 극치 같은 공범 같아 우리는 공동으로 참회했다.

끝으로, 동대구역으로 가는 데, 한 짓궂은 동창생이 큰소리로 외쳐 나에게 물었다. “자네 진짜 시봉보살이 없는 진짜 비구승인가? 진짜 무소유 맞아?” 나는 말없이 웃으며 마지막 같은 작별의 손을 흔들었다. 나는 고속으로 달려가는 열차의 창에서 해인사의 까마귀들이 환영처럼 보였다. 도대체 해인사 까마귀들은 전생에 누구의 환생인가? 매불(賣佛)로 돈을 벌고, 선량한 중생을 기만하고 돈을 챙기는 위선의 승려들이 환생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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