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이 38년간 도망자로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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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이 38년간 도망자로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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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잔발장(4) - 2005년 늦겨울 나기

2005년 늦겨울 늦은 시간 대구 신천 고수부지 한켠 상동파출소에 남루한 취객이 들어섰다.

“자수하러 왔는데요”

툭하면 성가신 노숙자 방문이 지겹던 근무 경찰관은 “할아버지 한잔 하셨네. 돌아가요” 팔뚝을 잡아끌며 문밖으로 내 몰았다.

‘이봐요. 조사해 보면 알꺼 아니요. 탈영병이란 말이요 탈영병! 제발 날잡아 영창에 넣어요 영창에!“

절규하며 울부짖는 노인의 행동을 수성경찰서에 보고했고 다시 K-2 공군부대 수사관 앞에 앉게 된다. 조사를 마친 아들 같은 수사관은 노인의 기구한 사연에 잠시 멍해졌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지금으로부터 38년 전 K-2 공군부대의 한 상병이 악질고참병과의 인연으로 탈영을 하게 된다. 모 공대 1년 때 배워둔 운전 실력으로 영업용택시를 몰며 2년 동안은 숨어 살 수 있었지만 결국 검거되었다.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서 지옥 같은 10개월 형을 마치고 남은 군 복무기간을 채우려고 복귀했지만 다시 시작된 내무반서의 따돌림과 고참들의 구타를 견디지 못하고 재 탈영했다. 당시 남한산성 형무관들이 노인탈영병에게 안긴 형벌의 기억은 한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리고도 남았다.

눈 뜨면 시작되는 한나절의 각종 점호와 구타는 저녁 무렵 피투성이를 담요에 둘둘 말아 군용침대 밑으로 굴러 넣고야 끝이 났다고 몸서리치며 진술했다.

1967년, 재 탈영!

이 때부터 시작된 모진 형벌의 세월은 38년 동안 계속된다.

헌병들은 탈영병을 잡으려고 새 가정을 이룬 아버지를 시시때때로 찾아왔다. 8년 동안 얼굴 한번 본 일이 없는 행방불명된 아들을 사망신고 해버렸고 집과는 담을 쌓았던 탈영병은 이 사실을 알리가 없었다.

제주도는 신분을 숨기고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된 그는 바다를 건넜다. 고분고분한 성격 탓에 지역유지 차량의 관리를 도맡아 해주면서 신용도 얻어 목돈을 쥐어보기도 했단다. 어느 날 경찰 간부차량의 기사가 “우리 과장이 당신의 신분을 확인해 오라는 데요”라는 귀띔을 듣고 밤새도록 가슴 떨다가 다음날 어촌으로 숨어들었다.

이후 18년간을 어부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온갖 역경을 눈물로서 진술했다.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가서도 피투성이인 채로 절뚝거리며 중환자실을 도망쳐 나왔고 술판시비로 이유 없이 두들겨 맞고도 무릎 꿇고 “살려 달라”고 애원한 것은 경찰에 잡혀 가 탈영한 사실이 밝혀지면 “나는 또 지옥 같은 남한산성 형무소에서 살아오지 못 한다”는 검거망상 때문이었다고 했다.

몇 년만에 실시하는 주민등록증 일제정비기간이 오면 불심검문이 두려워 바닷가 단칸셋방에서 한달이고 두 달이고 두문불출했으며 모아둔 돈도 있었지만 주민등록증을 요구하는 은행출입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객지에서 도망자가 살갑게 정을 붙일 곳이라고는 소주잔을 나눌 노숙자와 매춘부와의 동침뿐 이었던 것은 그들은 탈영병에게 의심의 눈꼴이 없었고 자기를 고발할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섬 생활 18년, 그럭저럭 알게 된 지인이 100여명이 될 즈음 개중에서 “당신 무엇했던 사람이요?”를 듣게 되자 제주도가 싫어졌고 마흔 둘에 고향 대구로 다시 도망쳐 나왔다.

10년 동안 친구가 운영하는 갈빗집 주차관리인으로 근무하기도 하고 건설인부, 파지줍기 등으로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으나 정권이 바뀌면서부터 불어 닥친 불경기로 대구 경제가 바닥을 치자 탈영병은 그야말로 춥고 배고파 얻어먹는 거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밤이면 대구역 대합실을 찾았고 새벽이면 구청에서 주는 무료급식으로 배를 채우던 박씨가 38년만에 자수를 결심하게 된 것은 2005년 1월의 혹독한 추위 때문이었다고 했다.

대구역 바닥을 기던 탈영병은 “차라리 자수해서 형무소에 가면 밥도 얻어먹고 얼어 죽지는 않겠지” 소주 두어 병을 마시고 고교동창회 사무실근처에 있는 상동파출소를 찾아갔던 것이다.

진술을 마친 노인탈영병에게 수사관은 “어르신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30년 전에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되었거든요. 그리고 어르신은 30년 전에 사망처리 된 분입니다. 여기 제적등본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수사관은 교통비 5만원을 호주머니에 넣어주면서 “서울에서 어르신을 신병 인수하러 동생분이 왔습니다”라고 말했단다.

공군헌병대 정문에서 이복동생을 만났고 그날 밤 아버지(88세)를 뵈었으나 무덤을 헤치고 나온 귀신 바라보듯 하는 가족의 시선이 너무 따가와 큰절만 올리고 집을 나와 버렸다. 그 후 2005년 8월에 몇몇 친구가 인우보증을 서 주었고 관계당국의 선처로 신분회복 판결을 얻었고 38년만에 행자부로부터 주민등록증을 받았다.

박창호 440101-12**** 대구광역시 수성구 상동 619-7
2005. 08. 08 대구광역시 수성구청장이라고 인쇄된 고작 딱지한장!

38년 만에 자유를 찾은 박창호씨는 자활봉사대에서 일하는 12급공무원 신분을 우쭐거렸고 무료로 진료 받을 수 있다는 건강보험증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 이 사람 박창호 !

누가 소설속에서 그려진 주인공 '잔발장"보다, 게오르규 25시의 순수한 농부 '모리츠'보다 더 모질고 가혹한 삶을 살아온 이 노인을 손가락질 할 것인가?

10월 초겨울의 문턱에서 노인은 동창회에서 제공한 잠자리 냉골바닥을 감사해 하며 일당 2만8천원의 자활봉사대 일터로 신나게 향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혈혈단신 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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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운 2005-10-29 11:16:24
아주 감동적인 기사다.끝까지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세요!

그녀는 2005-10-29 12:08:10
감동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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