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내리던 못잊을 선운사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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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내리던 못잊을 선운사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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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타운

지난 1월28일 오전 10시 40분경에 선운사(禪雲寺,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소재, 대한불교 조계종 24교구 본사) 대웅보전 큰 법당에서는 나의 은사이신 운기(雲起)스님의 34주년 제사를 받들고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선운사에는 60센치라는 눈이 많이 내려 있었다. 묵직한 걸망을 메고 나는 눈 길을 조심스럽게 걸어 선운사 산문격인 사천왕상이 있는 전각 앞에 서서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탁조(木鐸鳥)소리를 들으면서 못잊을 추억에 잠겼다. 40여년 전 내가 승려가 되기 위해 처음 선운사를 찾았릏 때도 눈발 사이로 목탁조 소리가 들려왔었다.

예전에 목탁조는 오래전에 죽었고, 그 후예들이 나에게 목탁 내리는 것같은 소리를 또 들려주며 아득한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왜 중이 되려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당시 선운사 주지이던 60대 중반의 운기노사(雲起老師)스님이 무릎을 꿇고 있는 나에게 주는 첫마디 말씀이었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운기스님은 동국대 전신인 혜화전문학교 교장이요, 종정격인 교정직을 역임한 석전(石顚) 박한영 조사님의 전강제자인 대학자였다. 운기스님 자신도 겨울 날에 승려가 되기위해 선운사에 찾아왔다는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날로 선운사 행자(行者)로 받아 들여졌고, 부엌에서 군불때기, 법당 앞에 있는 장명등(長明燈)을 청소하고, 석유를 보충하고, 때가 되면 불을 밝히고, 불을 소등하는 보직을 맡았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기초 염불인 천수경, 예불문 등 부지런히 외워야 했다. 부지깽이로 군불때는 아궁이 벽을 목탁치듯 장단을 맞추어 염불문을 외우고 있는데, 운기스님이 나를 불러서 이렇게 말씀했다.

“너는 훗날 정치시상가가 될 것이다. 불교와 모든종교를 망치는 좌익사상가가 되어서는 안된다. 불교와 모든 종교의 자유가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하기 바란다.”

기초염불을 외워 선운사 새벽 도량석을 하고, 예불을 제시간에 모셔야 하는 초짜인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가는 말씀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훗날 40년이 흘러서야 스승의 예언 말씀을 비로서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모든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태극기를 들고 애국집회에 나가고, 대한민국 수호의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운기노사는 행자 노릇을 하는 나의 얼굴을 보고 40년 후의 나의 모습에 예언을 하신 것이다. 놀라운 미래 통찰력의 혜안이라고 나는 감탄한다. 나는 종교의 자유가 없는 김일성교(敎)가 들어오면 불교는 물론 모든 종교는 종지부를 찍게 된다는 주장을 하면서, 태극기를 든 애국시민을 찾아 위로하고 응원에 나서는 것이다.

전북, 전남 지역에는 6,25 김일성의 남침전쟁을 지지하고 협조하는 토착 빨갱이들이 총을 든 인민군 보다 더 악랄하게 죽창 등의 무기로 지주 등 군인과 경찰 가족 등에 기습 학살을 자행한 잔혹한 지역이었다.

토착 빨갱이들은 인민군의 승리를 철석같이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의 사령관 워커 중장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자 인민군은 야반도주(夜半逃走)하듯 토착 빨갱이들을 버리고 북으로 패주했다.

하루아침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같이 버려진 토착 빨갱이들은 국군과 경찰이 진주해오자 이번에는 토착 빨갱이들에 의해 기습 살해된 유가족들이 보복 살인에 나섰다. 그 후, 토착 빨갱이들의 후예들과 토착 빨갱이들의 살해에 피해자들인 후예들이 전남북의 명산 고찰에 투신했다. 부처님의 도량은 좌우의 후예들을 모두 받아들였고, 사찰은 불교인재를 양성한다는 차원에서 좌우의 후예들에게 학교에서 교육울 받는 기회를 주기도 했다. 나는 사찰에서 불교교육으로 양성된 토착 빨갱이들의 후예는 대부분 “붉은 죽순이 부활하듯” 또다시 부모가 걸어보인 좌익운동에 나서고 있다는 것을 보고, 내심 크게 놀랐다.

선운사에도 토착 빨갱이들이 무자비하게 살인의 처형극이 벌인 곳이었다. 주장의 근거로서 선운사 입구 쪽 비석(碑石)들이 잇는 곳에는 자비무적(慈悲無敵)이라는 논평을 듣는 노스님인 선운사 전 주지 호명(浩明)스님의 비석이 서 있다. 당시 토착 빨갱이들은 호명스님을 붙잡아 목에 새끼줄을 걸어 개끌듯 하여 ‘희애재’라는 골짜기의 나무에 결박하여 낫으로 열두 토막으로 살해했다는 호명스님의 상좌인 향엄(香嚴)스님의 증언이 있다.

호명스님의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禪師의 法名은 佳誠이요, 俗姓은 陳氏茂長人이다.(중략)…. 庚寅年에 六二五動亂을 逢着하여 火坑중에 全燒당할 禪雲寺를 換身救出하시고 壬辰九月 二十七日 世緣己盡 하시여 入寂하시니 法臘七十三이요 世歲 八十六이러라”였다. 토착 빨갱이들은 86세의 선운사 주지인 호명스님을 열두 토막으로 살해한 것이다.

또, 선운사 뒷산 내웡골(도솔천 내원궁을 의미)에서도 토착 빨갱이들은 1백여 명의 남녀노소들을 어디선가 붙잡아 와서 죽창 등으로 집단학살을 자행했다. “제발 살려주세요!”울부짖는 소리와 귀족성(鬼哭聲)이 들려와 집단 학살이 있은 후 비오는 닐이면 내원골에는 인적이 끊긴지 오래이다.

내가 처음 선운사에서 행자 생활을 할 때, 선운사 밑에는 작고 초라한 ‘선운여관’이 있었다. 선운여관은 유일한 숙박업소였다. 그 숙박업소에 20대 초반의 청년이 노동을 하고 있었다. 어느 해 서울에서 숙명여대 졸업반 여학생들이 졸업여행으로 선운사를 찾았고, 선운여관에서 숙박을 하게 되었는데, 여대생 가운데, 한 여대생이 여관에서 노동을 하는 청년을 사랑하게 되었다. 미인형의 숙대 졸업생과 여관에서 노동하는 학벌도 없고 돈도 없는 청년과의 사랑 이야기는 믿어지지 않는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였다.

여대생의 부모의 만류가 강력했지만, 그 여대생은 사랑을 위해 집을 나왔고, 선운사 밑에서 장어구이를 장사를 시작했다. 역시 대학을 나온 여성이라 선운사 밑에서는 충천장어구이가 돈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선운사 밑 풍천장어 먹거리의 원조가 되었다. 젊은 부부는 억척같이 돈을 벌어서 마침내 선운사 밑에 호텔과 모텔 등 사업체를 이루었다. 나는 사랑을 위해 선운사 밑에 안착한 그날의 여대생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고, 큰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그녀의 러브스토리는 선운사의 멋진 드라마같은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제사를 마치고 선운사를 걸어 나오면서 잠시 우두커니 서서 내년에도 내가 올 수 있을까? 자문(自問)했다. 그날 출가위승(出家爲僧)하려던 홍안의 소년인 나는 이제 칠순이 다 되었고, 무엇보다 지병(持病)이 깊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년에는 눈속에 선운사를 찾아나서는 것 보다는 내가 모시고 있는 불상 앞에 촛불을 밝히고, 향을 피우며 스승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것으로 대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눈덮힌 선운사를 마치 마지막으로 보듯이 보고, 목탁조 소리를 더욱 가슴에 새겼다.

내가 선운사에서 처음 만난 스승과 사형들은 어디로 갔을까? 제행무상에 의해 모두 세상을 떠나갔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는 행성(行星)이 아닌 시간이 흐르지 않는 항성(恒星)의 국토를 찾아 왕생한 것인가? 아니면 지구에 집착하여 또다른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 다시 사찰을 찾아온 것인가. 분명한 것은 종교를 믿던 안 믿던 수행하여 진리를 깨달았거나, 아니면 진리를 깨닫지 못해도 지구라는 행성은 영겁의 시간을 두고 태양계를 돌고 도는 가운데 태어난 자는 그 누구던 제행무상에 의해 어김없이 사라지게 한다는 것이다. 빛이 일체를 삼키게 한다는 광탄만상(光呑萬像)하면서 말이다.

내가 소속해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단은 이승만 전 대통령 덕에 한국의 명산대찰의 주인이 되었다. 일제로의 해방 후 비구승이 50여 명 밖에 안되는 숫자였는데, 전국의 명산대찰을 차지할 수 있게 된 원인은 이승만 대통령이 군경(軍警)을 동원하고, 6차례나 대통령 유시(諭示)로 명산대찰은 비구승에게 내주라는 엄명하고 도와 준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전통사찰관리법을 만들어 마구 도적질 당하는 불교재산을 법적으로 수호해주고, 명산대찰을 복원해주었다.

끝으로, 당시 50여 명 밖에 안되는 비구승은 이승만 전 대통령 덕에 수억평의 사찰재산과 수입금으로 만석군이 부럽지 않게 되었다. 제정신이 있는 비구승들이라면 이승만, 박정희 두 분 대통령의 공덕비를 건립하여 지중한 은덕을 만세에 기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국 사찰에 이승만, 박정희 두 분의 공덕비는 없다. 대처승을 쫓아내고, 은처승(隱妻僧)이 난무하고, 김일성을 추종하는 승려들의 전성기이다. 내가 죽고 나면 이러한 글도 자취를 감추는 암울한 시절만 전망된다. 중국 선사는 산은 산, 물은 물(山卽山 水卽水)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성철 종정스님이 다시 그 명언을 국민에 교훈으로 각인시켜 주었다. 나는 바꾸어 주장한다. 도적은 도적이고, 부처는 부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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