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이 자리에서 웃고 있었습니다.
(58)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이 자리에서 웃고 있었습니다.
  • 박정수 소설가
  • 승인 2005.08.18 14: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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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핸드백을 들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훈이는 다시 불러들이기가 쑥스러워 그냥 누워 있었다. 별로 재미도 없는 영화를 끝까지 보기는 시간이 아까웠다. 여자에게 딱지를 맞기는 처음이다.

‘그래 잘됐다. 잘 못 건드렸다가는 큰일 날 여자였어.’ 그렇게 마음의 위로를 하고 나니 좀 덜 서운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은 훈이의 발걸음은 외국인 묘지 쪽으로 가고 있었다.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었다.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돌아가신 다음 이곳에 묻혀있는 곳이다. 훈이는 비석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며 돌고 있었다.

-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이 자리에서 웃고 있었습니다.
-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외로워 할 때도 있었습니다.
-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를 하세요.

나도 언젠가는 죽어야 할 몸. 그러나 당신은 행복합니다. 묻힐 장소가 있고, 묻어줄 사람이 있었지만 ‘나’라는 사람은 묻힐 땅 한 평도 없고 묻어줄 사람도 없습니다.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질 운명이요.

당신은 참 행복한 사람이외다. 훈이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한 바퀴를 도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훈이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걸터앉았다. 지나와 결합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 앞부터 깨끗이 정리한 뒤 이혼을 하라고 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을 나온 지 두 달 만에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오랜 만이요. 이혼하려고 해요. 내일 서부지원으로 나오시오.”

훈이는 일방적으로 말을 하고는 끊어버렸다. 곧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꼭 이혼을 해야겠어요?”

“이혼을 하는 것이 당신에게 좋을 것만 같소. 더 이상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어요. 두 달 동안 생각해 보았지만 사랑이 없는 부부로 산다는 것은 비극이요. 당신은 결혼을 잘 못했어요. 당신을 사랑하고, 아껴주고 친절히 대하고 쾌락을 줄 수 있는 남자를 골라야 하는데 나는 그 어느 곳도 당신을 만족 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어요. 우리 30년 가까이 살아온 것만도 너무 오래 살았다고 생각하오.”

“그렇지만 이혼이란 어린아이 장난도 아니잖아요.”

아내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우리는 마음에도 없는 결혼 생활을 했어요. 모든 걸 나는 포기한 사람이요. 내일 법원에서 만나요.”

훈이는 자기 말만 하고 끊어버렸다. 가정법원은 이층에 있었다. 아내로부터 도장을 받아 이혼수속을 밟아 대기실에서 나란히 앉았다. 아내는 남들의 눈이 무서웠던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앉아 있는데 이혼하러 온 부부들중에 어떤 이는 서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이가 되어서인지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도 있었다.

“여보,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 봐요.”

아내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몇 번이나 말해야 하오. 잠깐 이리 나와요.”

훈이는 아내를 데리고 복도로 나왔다.

“나는 당신에게 짐만 될 사람이오. 우리 일단 정리하고 더 생각해 봐요. 나이가 들면서 나는 당신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 주었어요. 당신이 원하는 이혼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거요. 어쩌면 삶을 포기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주시오.”

훈이가 아내에게 설득하고 있는데 판사실에서 불렀다. 아내와 훈이는 나란히 젊은 판사 앞에 앉았다.
“이혼하려고 합니까?”

판사는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네.”

훈이가 대답하자 판사는 도장을 찍었다.

“나가세요. 됐습니다.”

판사는 단 한마디 말할 기회도 아내에게 주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오며 아내는 실감이 나지 않는 듯 말했다.

“이혼이 된 거예요?”

“그래요. 우리는 이제 남남이 된 겁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어요. 우리에게 아무런 부담이 없잖아요. 아들과 딸들은 모두 시집, 장가를 갔으니까요.”

훈이는 혼자 털레털레 법원 정문을 나서는데 아내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평생 여자 꽁무니나 따라다녀라. 그 죄를 어떻게 받을 테냐?”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나다. 오늘 네 엄마와 이혼했다.”

“무슨 말이세요. 왜요?”

“그렇게 되었다. 네가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고 안 해도 좋다. 이제 아버지는 날아갈 것만 같다. 실바람 타고 훨훨 날아가련다.”

“아버지 미쳤어요?”

아들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미친 것이 아니고 돌았다. 절대 너희들의 짐은 되지 않을 것이다. 끊는다.”

훈이는 아들의 말을 끊었다. 몇 번 아들이 전화가 왔지만 받질 않았다.

‘너의 인생은 네가 살고 내 인생은 내가 산다. 내 인생을 네가 대신 살아주지도 않잖아. 추석이면 찾아오기를 해. 설날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얼굴도 비치지 않는 자식이 무슨 자식이냐? 이제 대학까지 시켜주었고, 결혼까지 해 주었으면 내가 할 일은 다 끝난 거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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