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장발장'이 돼버린 노인 탈영병의 기구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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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장발장'이 돼버린 노인 탈영병의 기구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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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부조차 사망신고 해버려, '죽은 사람' 신세

지금으로부터 38년 전, 23세의 한 청년이 군 생활 20개월 만에 악질고참과의 악연으로 탈영을 하게 됐다. 그는 6년 만에 검거돼 남한산성 육군형무소에서 10개월의 혹독한 수감생활을 마치고 재입대 복귀근무를 하다 다시 탈영했다.

이후 환갑을 넘어서도 36년여를 헌병이 자신을 쫓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도망자로 살아온 기구한 박씨. 그가 바로 박창호(가명, 62세. 주거불명)다.

탈영범의 공소시효는 7년으로 31~2세 때엔 이미 죗값을 다 치렀음에도 지난 달까지만해도 헌병대에 잡히면 '나는 죽는다'는 일념 하나로 살아온 사연을 얘기했다.

1975년 어느 날인가 그의 친부는 시도 때도 없이 자식을 잡으러 오는 헌병들의 등쌀이 지겨워 탈영병 아들을 사망신고를 해버렸고, 아들은 37년 동안 그 사실도 모른 채 헌병도 피하고 경찰도 피하는 '한국판 장발장'이 돼버린 것이다.

제주도는 신분 없이도 살 수 있을 곳이란 막연한 생각으로 바다를 건넜고 이때부터 스스로 택한 유배생활은 시작된다.

입대 전 서울 모 공대 전기과 1학년 시절에 따둔 운전면허 덕에 차량정비 공장이나 트럭 조수 생활로 움막집에 자며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 지인이 생기면서 신원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싫어 다시 어부가 됐고, 바다생활 등으로 17년을 보냈다.

그 긴 세월동안 그는 천사같이 살아야했고 무쇠 덩어리로 살아야 했다. '천사여서 무쇠여서'가 아니고 차에 치여 병원에 실려 가서도 신분확인이 될까 두려워 절뚝거리며 도망쳤고, 취객에게 죽도록 얻어맞고도 살려달라고 빌어야 했다. 경찰서에 가서 탈영한 사실이 들통이 나면 또다시 그 지옥 같은 육군형무소에서 보내야 한다는 불안 때문에.

그러던 어느 날, 마흔여덟이 되던 어느 날 새벽 죽을 것 같은 통증 때문에 눈을 뜬 그는 가족과 친지들이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됐다.

네 살 때 어머니를 여윈 그는 가족이라야 서울에 계신 부친 한분과 초중고 고향친구들 몇 명 뿐이었다.

35년 만에 서울 땅을 밟고도 아버지를 찾질 않은 것은 아버지는 탈영기간 동안 새 가정을 꾸며 세 명의 이복동생들과 단란하게 살고 있다는 친구의 귀띔 때문이었다.

다시 학창시절을 보낸 대구로 내려온 노인 탈영병은 친구가 운영하는 갈빗집 주차요원으로 취업해, 삼년을 보내다가 IMF로 문을 닫자 건설현장의 일용잡부로 품을 해 삼시세끼는 해결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고부터 시작된 불경기, 특히 대구의 건설경기가 바닥을 치자 노인의 삶은 더욱 비참해졌다.

점심과 저녁은 무료급식소를 찾아다니면서 요기를 때울 수 있었으나 추운 겨울 발을 뻗고 누울 자리를 찾질 못하는 날이 많아졌고 "이러다가는 얼어 죽는다, 이러다가는 얼어 죽는다"하며, 자수해 광명 찾고 잘 자리도 찾자는 결심을 하게 됐다.

지난달 말순 소주 두어 병을 마신 노인은 수성경찰서를 찾아 자수를 했고 거기서 다시 오산 공군헌병대로 이송돼 군수사관 앞에 앉게 된다.

아들 같은 수사관은 사시나무 떨던 노인을 위로하고 안심시키기에 진땀을 뺐다. "어르신 이제는 조서도 다 꾸몄고 확인절차도 다 마쳤으니 안심하고 귀가하십시오. 1975년에 이미 시효는 만료되어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라고 공손하게 설명하면서 여비 5만원을 호주머니에 넣어주기까지 했다.

정문 앞에는 이복동생(46세)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38년 만에 아버지를 뵙게 됐으나 아버지에게서 들은 얘기라고는 36년 전에 자기 자식을 죽었다고 사망신고를 했다는 사실 하나였다. 그날로 무덤 속을 파고 나온 귀신 바라보는 듯 하는 새 가족의 눈총이 따가워 집도 절도 없는 대구로 또다시 내려 왔던 것이다.

고교동창회 사무실을 잠자리로 제공받은 박 노인은 죽어버린 자기를 살려달라고 동창친구들에게 하소연했다. 친구 몇의 조언으로 신분회복판결에 필요한 제출서류 준비에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해결돼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고 했다.

제일의 난관은 37년 전에 실종신고도 없이 어떻게 군 당국에서 사망신고가 받아들여졌느냐 인데 당시에 인우증명을 해 준 사람들은 아버지(86세) 이외엔 모두 고인이 됐다고 한다.

자칫 아버지조차도 법정에 불려가 처벌을 받을 지도 모를 일을 저지른 불효를 하게 됐다면서 때늦은 자수를 머릴 뜯으며 후회하고 있었다.

기막힌 사연을 알게 된 뜻있는 몇몇 지인은 당국의 선처를 호소하고 있다.

그는 아직 혈혈단신 총각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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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돌 2005-04-08 09:47:35
실제로 이런 경우가 있군요. 관심을 끄는 내용의 글입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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