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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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까지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햇살 속에서는 먼지의 작은 입자들이 어항 속의 열대어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아주 느리게. 담배의 보라색 연기도 먼지들과 어우러져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긴 머리채를 올올이 풀어가고 있었다. 언제 보아도 햇살 속에서 풀어져가는 보라색 담배 연기는 추상화 같은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태진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여러 개의 파일 중에서 한 개를 끄집어냈다. 그 안에는 스포츠 신문이나 여성지, 주간지 등에서 스크랩한 소영이에 관한 것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에 관한 파일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3년 전 특집극 주인공으로 발탁되면서부터였다.

‘많이 컸어. 그때 내가 주인공으로 캐스팅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사진 속의 그녀는 웃고 있었다.

물보라가 이는 계곡의 바위 위에서, 반구형 탐스런 젖가슴이 환히 비치는 잠자리 날개 같은 슬립과 아슬아슬한 팬티만을 걸친 채, 요염하게 웃고 있었다. 태진은 사진을 들여다 보다가 카메라 앵글을 향해 온몸으로 육체의 향기를 발산하는 그녀의 젖은 입술에 오래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소영아.”

태진은 마치 곁에 그녀가 있는 것처럼 속삭였다. 마리화나를 피울 때면 그녀를 상상 속에서 만나 포르노 비디오에서 본 정사 장면 보다 더 진한 사랑을 나누었다. 뜨거운 정사를 나눈 후에 보면, 실제로 팬티가 후줄근히 젖어있곤 했다. 그녀는 태진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자였다.

태진은 소영이에 관한 한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녀에 관한 것은 단 몇 줄의 기사라도 놓치지 않고 스크랩했다. 몇 개의 서랍 속에 든 파일과 몇 권의 사진첩은 그녀 모르게 찍은 사진과 기사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사진첩 대부분은 스타로서 대중 앞에서 카메라를 의식하고 지은 표정이 아닌, 진솔한 표정과 몸짓이 담겨있었다. 특집극을 촬영하느라 몇 달을 함께 다니면서 찍은 것이 주를 이루었다.

연일 계속되는 밤낮 없는 강행군에 연기자와 스태프들은 모두 지쳐있었다. 잠시만 짬이 나도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어딘가에 몸을 기대고 토막 잠을 자곤 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때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입을 벌린 채 깊은 잠에 빠진 모습. 새참 시간에 뜨거운 컵라면에 밑둥만 자른 배추김치를 손으로 쭉 찢어 먹는 복스런 모습. 촬영 때문에 빙산이 둥둥 떠다니는 남극의 바닷물에 들어갔다 나와서는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채 담요를 뒤집어쓰고는 사람 손에 잡힌 참새 새끼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습.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 뭐가 그리도 우스운지 이를 한껏 드러내고 요절복통을 하고 있는 모습.

하지만 무엇보다도 태진이 가장 아끼는 사진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소영이가 밀림의 수풀 속에서 엉덩이를 드러낸 채 소변을 보는 장면이었다. 크게 확대해 침대 머리맡 위쪽에 걸어두고 보는 것이었다.

촬영이 중반쯤에 접어든 어느 날 오후.

태진이 이 장면을 렌즈에 담은 것은 정말 우연이고 행운이었다. 필리핀 밀림 지대에서였다. 늪 지대에서의 촬영이 끝나 스태프들이 다음 장소로 이동하려고 촬영 장비들을 챙길 때였다. 소영이 촬영 현장에서 슬그머니 벗어나 밀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짚이는 게 있어 서둘러 망원렌즈가 부착된 카메라를 들고,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뒤따랐다. 나뭇잎들이 거의 사람 키 만큼 우거진 수풀이 쉽게 그녀와 태진 사이를 가려주었다.

태진은 한아름이 넘는 나무 뒤에 숨어 카메라 망원렌즈를 소영에게 고정시켰다. 햇살이 나뭇잎들에 가려 그늘이 지긴 했지만, 조리개를 많이 열고 셔터 속도를 느리게 하면 충분한 감도였다. 그녀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서슴없이, 보름달처럼 환하고 커다란 엉덩이를 까내렸다. 그 순간, 카메라의 자동모터가 숨가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망원렌즈로 끌어당긴 그녀의 모습은 거의 환상적이었다. 자동 모터가 돌아가는 동안 숨도 멈춘 채, 그녀의 여자에서 오줌 줄기가 시원스럽게 쏟아져 나오는 순간과 치마를 올리는 장면까지 기가 막히게 잡아냈다. 그것은 예술품이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어느 사진 작가의 전시회에서도 볼 수 없었던 예술품 중의 예술품이었다. 오줌 줄기가 터져나오는 순간, 그녀의 표정과 기하학적으로 잡힌 엉덩이와 허리와 허벅지의 곡선적인 구도는 일부러 연출을 한대도 잡기 어려운 걸작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밀림지대에서의 촬영 때문에 반라에 가까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기에, 주변의 수풀과 어우러져 더욱더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넌 언제 봐도 너무 아름다워!’

불현듯 미치도록 소영이 그리웠다.

오늘 같은 밤, 커튼을 치고, 불을 모두 끄고, 촛불 하나만을 밝힌 이 침대에서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잠 들고 싶었다. 그녀의 가느다랗고 길죽한 하얀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감미로운 감촉을 느끼며…… 상상이 아닌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녀와의 피부 감촉이 그리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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