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왜 사회자본과 교양을 포기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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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왜 사회자본과 교양을 포기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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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모습은 마치 보이지않는 지성의 유리천장에 갇혀있는 형국

지난 세대 세계가 주목하고 부러워하던 경제신흥강국 한국은 현재 미래상은 피폐하며 국가적 우울증을 앓고 있는 중이다. 한국병으로 치부되는 국가지도력 실종은 만성화되고 경제도 장기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이면에는 지식자본주의라는 현대사회의 지식문제에 대한 잘못되고 미흡한 우리사회의 대처에 있다고 진단한다.

흔히 한국의 교육열은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교육현장을 접한 사람들은 곧 조롱으로 돌아선다. 세계최고의 대학진학율에도 정작 대학과 지성은 사라졌다고 아우성이다. 관심과 투자만으로 좋은 결과가 보장되지 않음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의 우화가 극명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잘못된 시스템의 결과로 노동(자원)을 투입할 수록 결과는 오히려 더 나빠질 수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지식과 지성은 하향평준화와 이념적 오염 즉 좌파편향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오늘날의 "지식은 아는 것이 힘이다"는 베이컨경의 시대가 아니다. 소위 과학과 지식의 혁명시대이다. 지식의 양은 폭발하고 있으며 지식간의 이종교배(융합) 역시도 폭증하고 있다. 이제 지식 자체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새롭게 정리되어야할 시점이다.

먼저 지식의 종류와 차원이다. 지식은 크게 보아 일차원적 지식 즉 상식적 지식이 있다. 여기에는 사실을 포함한 단순하고 상황적이며 대중선호적 지식의 세계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은 선각자들이나 철학자들도 부터 경원되는 비교양적 무용지식이다.

2차원적 지식에는 체계적이며 논리적인 전문적 과학적 지식이다. 이것은 지식의 대명사인 동시에 직업을 보장하며 현대사회를 이끄는 지식이다. 또한 지식폭발의 장이며 가시적인 국가경쟁력을 구성하는 지식의 영역이다.

하지만 전문적 과학적 지식은 양식적 지식이란 3차원적 지식과 대비된다. 이러한 지식은 문학, 철학, 역사를 필두로 다양한 인문학적 영역으로 구성되며 계층, 직업과 세대를 넘어 소통할 수 있는 문화적 자원이다. 흔히 교양이라고 불리우는 이러한 지식의 원형은 동서양 문명에서도 공유한 지혜와 문화의 코드이다. 무엇보다 스스로 인격형성을 주도하는 마법의 세계이다.

지식의 최고 차원에는 영성적 지식이 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과 사회의 지침이되는 영역이며 오이켄이 말하는 초월적 영성이다. 흔히 신의 세계라는 영혼과 정신의 영역으로 인류애, 종교, 세계관 등이 해당된다. 정신과 영혼의 안식처일 뿐 아니라 문화인의 코드를 제공하는 점에서 인류의 구원의 영역이다.

이러한 지식의 구분은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문화양식로서 갖춰야할 지적 영역에 대한 명쾌한 이해와 함께 지성, 지혜, 현명함 등 동의어와 함께 지식간의 소통과 교류의 잠재력을 보여준다. 예컨대 과학적 지식과 교양이 결합한 지성이 좋은 예이다. 무엇보다 지성은 사회의 기본적 가치인 부, 권력, 명예를 초월하는 '초가치(super value)'이다. 과학세계에서 과학간의 결합과 소통이 창조의 관건이 되듯이 지성은 보다 창조적이며 사회적이며 미래 지향적 비전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선진국들이 교양(윤리)와 독서를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근세사와 세계지도에 나타난 서구의 우위는 한편으로 지식의 우위였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발전된 학문과 지적 기반에서 이미 서양의 우위는 현저했다. 아테네 아카데미아의 전통과 알랙산드리아 도서관은 혁명적 진화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근대국가는 국민독서국가였다. 일반인들의 서재에서부터 살롱, 학술원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문화양식이 되었었다. 선진국의 공통점은 대학, 도서관, 체육관의 축적된 인프라에 있다. 지금 선진국들은 중세시대엔 지식 폭증이 도시와 대학을 통해 관리할 수 있었으나 프로슈머시대엔 국민 생활자체가 지식의 세계에 있음을 자각한다는 점이다.

세계은행은 최근 국부를 재정의하였다. 이에 따르면 국가의 천연자원, 물적자원, 인적자원, 사회자본을 포괄하고 있다. 천연자원은 토지, 수자원, 광물, 목재, 그 외의 천연자원의 가치이며, 물적자본은 기계류, 건물, 공공시설물의 가치이며, 사회자본은 사회를 결속시키는 가족, 공동체 및 다양한 조직의 가치이며, 인적자원은 국민의 생산적 가치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사회자본이다.

세계은행이 '국부(國富)는 어디에 있는가(Where Is the Wealth of Nations)'라는 보고서를 통해 '보이지 않는 자본'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똑같은 일을 하고도 미국에서는 멕시코에 비해 다섯 배의 임금을 받는다. 이 보고서는 미국인이 멕시코인보다 높은 임금을 받는 이유를 국부에서 찾았다. 미국이 멕시코보다 부자 나라로서 이미 쌓여 있는 부(富)는 곧 자본이다. 자본은 생산성을 높여 주기 때문에 같은 노력을 해도 생산성이 높은 만큼 임금을 더 받는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의 탁월함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자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자본의 중요성을 일깨운 데 있다. 자본은 국토, 석유, 천연가스 등 '자연자본'과 기계와 장비, 도로, 항만, 통신망 등 '돈으로 만들어 낸 자본' 그리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보이지 않는 자본' 으로 분류된다. 그중 선진국이 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본은 '보이지 않는 자본' 이라는 것이다. 선진국의 경우 국부를 만들어 내는 데 '자연자본'은 기껏해야 1~3%, 도로, 항만, 기계 등 '만들어 낸 자본'은 17%, 나머지 80%는 '보이지 않는 자본'이 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자본' 또는 '사회적 자본'(社會的 資本 social capital)’은 바로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 법질서를 포함한 시민정신, 공평한 사법제도, 효율적인 정부, 기업의 투명한 지배구조 등이다. 이런 가치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지만 생산성을 높여 국부를 만들어 낸다. 석유가 아무리 많이 나와도, 다이아몬드 광산이 아무리 커도, 시골 구석구석까지 도로가 포장되었다 하더라도 사회적 자본이 부족하다면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세계은행은 이를 21세기형 국부라고 했다.

이처럼 국가 간 경쟁에 있어서 보이는 자본보다도 상호신뢰와 법질서 준수 등 사회갈등을 해결하고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는 사회적 자본이 중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 국민은 성숙된 시민의식을 가져야 하고 모든 분야에서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져야 하고 정부나 기업의 운영이 투명하고 공정해야 한다.

실제로 우리의 사회적 자본은 상당히 취약하다. 사회통합위원회가 2천여 명을 대상으로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도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국회와 정당을 신뢰한다는 비율은 3%, 정부는 19.6%, 법원은 16.8%로 나타났다. 정부의 3대 기둥인 입법, 행정, 사법부에 대한 국민 신뢰도가 이 정도이면 대한민국 정체(政體)의 위기라 할 수 있다.

다른 여론조사들을 보면 국회에 대한 신뢰도는 1996년 49%에서 2003년 15%로, 정부 신뢰도는 62%에서 26%로 추락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6년 한국 개발연구원(KDI) 조사에서 국민들은 '공무원들이 부패했따(70%)', '공무원들이 법을 잘 지키지 않는다(61%)'라고 응답했다. 특히, 국회와 정당, 그리고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모르는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의 신뢰도인 4.0점보다 낮은 수준이다.

설상가상으로 우리의 사회적 자본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세계가치관 조사가 실시된 1982년과 2001년 사이에만 한국의 사회적 신뢰지수는 11%나 떨어졌다. 사회적 자본이 이렇게 내려가는 상황에선 아무리 기업투자를 늘리고 생산성을 높여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반대로 경제발전을 위해 필요한 다른 노력이 없더라도 우리의 법질서와 사회적 신뢰를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면 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은 곧바로 갑절로 치솟을 것이고 10년 넘게 '국민소득 2만 달러 덫'에 빠져 있는 우리 경제가 또 한 번 도약하는 계기를 맞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제품을 만드는 물리적 기술(physical technology)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의 효율은 사람들의 활동을 조직하는 사회적 기술(social technology)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 사회적 기술이 발달되어 있으면 경제활동이 잘 조직되고 거래 비용이 줄어들어 물리적 기술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사회적 기술이 부족하다. 우리는 20세기형 '보이는 것'에 관심이 쏠려 있지만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자본이 더 커져야 한다.

또한 사회적 자본은 지식적으로는 양식적 지식(교양)과 직결된다. 19세기 동서문명의 대충돌기 일본의 경우 선진국의 문명을 따라잡기(catch-up) 위한 (국제)교양에 대한 국가적 강렬한 구상이 있었으나, 한국과 중국은 결여되었었다. 특히, 한국은 일제 식민지의 암울한 시기를 겪었으며 한국동란의 참화에 빠졌다.

이후 30년간 산업화의 놀라운 성과를 이루었으나 군부와 관료가 중심이 되어 교양의 주류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교양이란 현실의 의사소통에 나타나는 비천함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내면성의 한 형식으로 존재해온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와 88올림픽에서의 성공은 더욱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급조된(폐쇄형, 자아도취형) 민족적 자긍심, 이념의 갈등, 정파간의 합종연횡, 정치적 리더십의 실종 등에 의해 교양은 제6공화국에서 탈진하여 마비되고 말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국가경쟁력 저하의 이면에는 우리나라의 산업화(근대화)와 민주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수도권과 지방, 엘리트와 대중이 함께할 상호이해와 인식을 가능케 하는 의사소통의 기본 자산인 교양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교양은 정신과 몸 그리고 문화가 함께 하나의 인격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거울에 자기를 비추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최근 대학(인문학계)과 언론(신문)에서 '교양=국가경쟁력', '인문학의 위기와 반지성주의', '독서문화의 재창조', '교양과 도덕의 재무장' 등이 제기되는 것이 만시지탄의 것이지만 우리 시대의 절박함을 대변한다고 하겠다.

반면 줄기차게 변화와 개혁을 외치는 한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한국의 교육이념과 정책은 제대로 인가. 대학을 중심한 교육현장은 어떠한가. 또한 정치지도자들의 인식은 어느 정도인가. 지식세계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자체는 있는가.

경쟁과 협력, 과학과 교양, 개인과 사회, 이념과 현장이 균형잡지 못하여 전문성에 천착하여 세계와 지식의 흐름에 거슬러가는 한국의 모습은 마치 보이지않는 지성의 유리천장에 갇혀있는 형국이다. 조상이 남겨준 최고의 과학적 언어 한글에도 불구하고 책읽지 않는 책맹의 사회가 계속되는 한 문화도 경쟁력도 미래도 한낱 구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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