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 한국군 포병에는 눈이 달렸다!
베트남전쟁, 한국군 포병에는 눈이 달렸다!
  • 지만원 박사
  • 승인 2014.03.04 22:4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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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기간 1년 중에서 나는 10개월 동안 그야말로 강도 높은 고생을 했다. 다른 포병 소위들이 한 개의 중대를 지원할 때, 나는 2개 중대, 그것도 전투 강도와 빈도가 가장 높은 수색중대와 기동타격중대를 동시에 지원했다. 수색중대가 작전에 나가면 수색중대에 투입됐고, 3중대가 작전에 나가면 3중대에 투입됐다. 이는 좀 과한 조치였다. 그게 안쓰러웠던지 새로 부임한 포병 대대장은 나를 즉시 뽑아내 사단 사령부 월남어 교육대로 보냈다. 월남어를 배우도록 하기 위한 게 아니라 귀국을 연장시키기 위한 하나의 보상수단이었다.

월남어 과정을 졸업한 후 나는 곧바로 중위로 진급하여 월남어를 전혀 쓰지 않는 사격지휘 장교로 보직되어 벙커상황실에 투입됐다. 다른 부대에서는 대위 두 사람이 교대하면서 근무하는 자리를 나는 혼자서 지켰다. 대대장님은 나의 요약보고를 매우 좋아하셨다. 다른 장교들이 보고를 하면 자주 역정을 내셨다.

상황실에는 매일 수많은 첩보가 접수됐다. 첩보의 신뢰성에 따라 A급부터 D급까지 분류돼 있었다. 이들 첩보들은 접수되는 순서대로 두꺼운 첩보일지에 기록됐다. 한 달이면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200쪽이 넘는 책이 됐다. 하루에도 7-8쪽이나 되는 첩보내용을 장교들이 일일이 읽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상황실 선임하사가 중요하다고 표시해주는 첩보만 대강 훑어봤다. “응, 그렇구먼. 이 지역이 늘 말썽이군.”

일단 날짜가 지나면 모든 내용들이 두꺼운 첩보철 속에 묻히고 만다. 하루 이전의 첩보 내용, 열흘 이전의 첩보 내용을 다시 들춰내 읽는 사람은 없다. 자료는 많지만 모두가 땅 속에 묻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치 보석의 원석이 땅 속에 방치돼 있듯이! 그런데도 사람들은 “저 첩보일지 속에는 모든 첩보가 다 들어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많은 첩보를 즉시즉시 사용할 수 있도록 가공하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는 중사에게 똑같은 지도판을 3개 만들라고 했다. 중사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급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여유가 있어 보였다. “중위님, 상황판을 3개씩이나 만들어 무얼 하시게요?” “나도 몰라. 일단 한번 만들어 봐.” “합, 옛.써 즉각 대령하겠습니다.” 중사는 다섯 손가락을 꼬부려 장난스레 거수경례를 하고 돌아갔다.

“김중사. 하나는 초저녁용, 또 하나는 밤중용,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새벽용이야. 상부로부터 첩보 내용을 받아 적을 때마다 상황판을 골라 표정을 하라구. A급은 적색, B급은 청색, C 및 D급은 노랑색으로. 알았어?” “아! 존경하는 중위님, 이제야 감이 옵니다. 돌아가겠습니다”

첩보를 받아 적는 노력이 10 이라면 지도판 위에 점 하나를 표시하는 노력은 1 도 안됐다. 하나하나의 점은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여러 날에 걸쳐 표시된 수많은 점들은 일련의 분포와 추세를 나타냈다. 시간대별로 베트콩이 어떻게 이동해 다니는지에 대해 훤히 읽을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통계의 묘미였다.

매일 밤 나는 이 상황도에 따라 사격을 했다. 구태여 내가 사격을 해야 할 좌표를 찍어줄 필요가 없었다. 누구라도 상황판만 보면 언제 어디에 사격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잠이 들더라도 병사들은 정해진 시스템에 의해 포를 날렸다.

얼마 후, 체포된 베트콩의 진술이 나왔다. “한국 포병에는 눈이 달렸다.” 시간이 갈수록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병사들이 점점 더 많이 메워 줬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대위 두 사람이 해야 할 업무를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매일 아침, 나는 밤새 있었던 상황들을 손바닥만 한 쪽지에 요약하여 대대장 숙소로 직접 가져다 드렸다. 구두로 보고를 하지 않아도 그 쪽지만 읽고도 만족해 하셨다. 무섭기로 소문난 대대장이었지만 내가 가면 언제나 즐거운 모양이었다. “응, 응, 알았어. 그래그래, 수고했어. 어서 가봐. 아니 우유 한잔 줄까?”

어느 날 미군 중령이 나의 직속상관인 작전참모를 찾아왔다. 나의 직속상관은 소령이었다. 내가 통역을 맡았다. 미군 중령은 포병 대대장이었고, 예하 포대들이 월맹 접경지역에서 아직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포들을 헬기로 공수를 해야 한다는 취지의 전후사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헬리콥터로 포를 수송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시험용으로 1개포만 잠시 빌려 줄 수 없겠느냐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 시범에는 미군 장성들이 많이 참석할 것이라며 시범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나의 직속상관인 작전참모는 이를 쾌히 승낙했고 대대장님도 이를 허락했다. 다음날, 나는 1개 분대를 포차에 태우고, 차 뒤에는 포를 매단 채 미군부대로 나갔다. 하지만 그 미군 중령은 없고 대신 뚱뚱하게 생긴 미군 소령이 나와 있었다. 그는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트럭에 타고 있는 우리 병사들을 거만한 표정으로 훑어보더니 모두들 차에서 내려와 일렬로 서라고 했다.

예상 외의 행동에 기분이 몹시 상했다. 하지만 나는 정중한 표현을 써서 물었다. “혹시 무엇 때문인지 말해 줄 수 있습니까?” “검열을 해야겠다” “나는 미군 중령 아무개의 부탁을 받고 도와주러 온 사람이다. 당신한테 검열을 받으러 온 게 아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나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고문관을 지냈다. 한국군 장군들도 내 명령에 순순히 따랐다” “검열을 하려거든 한국에 가서 그런 장군들에게나 해라” 소령이 무의식중에 내게 달려들려고 했다.

나는 선 자리에서 미군 소령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아주 낮은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말했다. “야, 오늘 이 건방진 놈, 손 한번 봐주자. 이놈 발밑에다 일제히 조준 사격을 가하라. 얼른 쏴버려” 따따따따닥 . . ! 수많은 총알이 그의 발 밑, 모래 바닥에 꽂혔다. 그는 체신이고 뭐고 내팽개친 채 혼비백산 도망을 쳤다. 지프차도 내팽개쳤다. 병사들이 그의 발밑을 따라가며 조준 사격을 가했다. 그는 아마 십 년 이상 감수했을 것이다. 병사들이 웃어대며 그를 야유했다. 그에겐 일생일대의 모욕이었을 것이다.

의외로 빨리 돌아온 내게 작전참모가 사유를 물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내가 경솔하게 큰일을 저질렀다며 질책을 가했다. 나는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직속상관은 감히 어디라고 미군을 그렇게 건드렸느냐며 겁을 냈다. “과장님, 미군에 대해서는 배알도 없이 대해야 하나요?” “어~어~ 이 친구, 뭘 한참 모르는구먼!” 작전참모는 내게 그가 한국에서 겪어 본 미 고문관의 위력에 대한 사례들을 설명해 주면서 내가 큰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려 했다.

대대장의 예쁨을 받고, 또 대대장님을 위한 통역이라면 도맡아 하는 내게 작전과장이라고 해서 그 이상의 야단을 칠 수도 없었다. 이튿날이었다. 미군 중령이 다시 찾아와 중위에 불과한 내게 정중히 사과했다. “나도 그 소령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곧 다른 곳으로 갈 것입니다. 그는 어제 제 계획을 망쳐놓았습니다. 하사관 한 명을 파견할 터이니 우리가 요청할 때, 포를 좀 지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때부터 나는 미군 하사관과 함께 근무하면서 약간의 회화능력을 더 기를 수 있었다.

이렇게 8개월을 지하 벙커 속에서 보냈다. 햇빛을 보지 못하는 벙커생활은 힘든 것이긴 했지만 그런 대로 재미있었다. 그런데 햇빛이 유난히도 밝던 어느 날, 갑자기 코피가 쏟아졌다. 그리고 졸도했다. 들것에 실려 나가 생전 처음 알부민이라는 주사를 맞았다. “안되겠다. 내가 좀 편하자고 저놈 하나 부려먹다가 사람 잡겠다. 당장 미군부대로 보내.” 그래서 나는 졸지에 미군부대 연락장교가 됐다. 그때의 몸무게는 47kg. 26세의 청년 사관에겐 어울리지 않는 몸매였다.

미군부대는 동지나해의 아름다운 모래 위에 있었다. 부대 위치 자체로 휴양지였다. 깊은 바다 속까지 투명하게 보이는 맑은 바닷물, 희고 고운 모래밭, 한가로이 흔들리는 야자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물 색깔, 파도만이 주인인 적막함, 이 모두가 쉽게 접할 수 없는 감추어진 아름다움이었다. 낮에는 자연 속에서 하루를 보냈고, 밤에는 맥주, 밴드, 춤이 자아내는 미 병영 문화권 속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휴양생활을 보냈다.

대대장님이 귀국하시고 신임 대대장님이 부임하셨다. 신임 대대장님이 맨 먼저 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자매 마을에 가서 신고를 하는 일이었다. 대대장 당번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신임 대대장님이 자매 마을에 가서 잔치를 베풀고 연설을 할 때 통역을 하라는 것이었다. 월남어 교육대에서 1등을 했으니 얼마나 잘하겠느냐는 게 참모들의 중론이었다 했다.

아뿔사! 월남 말을 배우긴 했지만 8개월이나 쓰지 않아 통 자신이 없었다. 설사 졸업 직후였다 해도 공식 연설을 즉석 통역한다는 건 어림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극복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캔 맥주 한 개를 들고 바닷가로 나갔다. 먼 바다를 바라보다가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바로 내가 대대장이 되는 길이었다. 다음날, 대대장님이 무슨 연설을 하든지 상관없이 내가 대대장이 되어 연설을 하는 것이었다.

방으로 뛰어와 연필을 잡고 내가 대대장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연설문을 작성했다. 그리고 사전을 찾아가면서 월남 말로 옮겼다. 드문드문 웃기는 말도 집어넣었다. 그래야 통역이 잘됐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다음날, 신임 대대장님이 수많은 주민들을 놓고 마이크로 연설을 했다. 연설을 하는 동안 나는 그의 말을 기록하는 척 했다. 대대장님이 한동안 연설을 하시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통역할 차례라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써간 원고를 조금씩 읽었다. 노인들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웃기는 말을 할 때는 ~ 하고 웃었다. 박수도 쳤다. 대대장님이 싱글벙글 하셨다. 주민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웃는 것을 보니 대대장인 자기도 연설을 잘했고, 통역도 잘됐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가져온 떡을 먹고 맥주와 콜라를 마시는 동안 대대장님과 노인들 사이에 많은 대화가 오갔다. 그런 대화 정도는 통역할 수 있었다.

내가 고지식하게 했더라면 대대장님도 나도 모두 난처했을 것이다. 연설을 끝낸 대대장님은 여러 참모들 앞에서 나를 극찬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나를 투이호아 시내에 있는 월남군 연대의 연락장교로 보냈다. 월남군 연대장은 중령이었는데 성장(도지사)을 겸임했다. 주월한국군은 미군과의 유대보다 월남 성장과의 유대를 더 중요시했기 때문에 내가 미군부대를 떠나 월남성장 옆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월남의 군수 자리는 통상 대위-소령들이 겸직했다. 일반적으로 월남군 장교들은 미군에 대해서는 당당하고 추상같은 태도를 취했지만 한국군에 대해서는 친절하고 자상한 형제처럼 대해줬다. 한국군이 그들의 처지와 사정을 잘 이해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내가 알 수 없는 것은 월남 사람들의 생리구조였다. 그들을 지켜주고 있는 미군에 대해 왜 그렇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도시 알 수가 없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 장면들이 떠오른다. 부자의 미남 클라크케이블은 ‘아름답지만 버릇없는’ 비비안리를 인내하며 잘 대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잘해주면 줄수록 콧대를 더 높이 세웠다. 그리고 싸늘하게 버림을 받았다. 떠나는 클라크케이블을 향해 그녀는 가지 말라 울부짖었지만 그 때는 이미 마음을 접은 뒤였다.

고마워 할 줄 모르는 월남 민족, 잘해 주면 해 줄수록 콧대만 세우는 이상한 민족,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려는 월남 민족, 드디어 미국은 마음을 접었다. 미군이 떠나자 그 버릇없던 월남인들은 1975년 4월 30일에 패망을 맞이했다. 천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도망가다 죽고, 물에 빠져 죽고, 재교육 캠프의 이슬로 사라지는 비운을 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운 좋은 사람들은 미국 등으로 건너가 미국의 품에서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 미국을 그토록 싫어했던 사람들이!

정동영과 강정구 등은 미국을 증오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정동영은 자식을 미국으로 유학 보낸 후 자기도 미국으로 가서 장기간 체류 했으며, 강정구의 아들들도 미국에서 산다고 한다. 이처럼 미국의 덕을 크게 보는 사람들이 어째서 미국을 증오하는지 그 2중적 정신구조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온갖 부를 누리며 살고 있는 친북 좌익들, 그들 역시 적화통일이 되면 미국으로 도망들을 갈 것이다. 월남으로부터 망명하여 프랑스에서 명상의 마을 플럼빌리지를 설립-운영하고 있는 틱낫한이라는 중도 월남에서 평화를 외치며 극렬시위에 앞장섰던 사람이다. 그로 인해 월남이 패망했고, 수많은 월남 국민이 죽었다.

그렇게 해놓고 그는 프랑스로 도망가서 고승인체 하면서 잘 살고 있다. 나는 지금 틱낫한처럼 대한민국을 파괴하는 사람들 역시 같은 상황을 맞이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외국으로 도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산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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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drns 2014-03-05 18:06:37
그러나 베트남은 통일을 이루고 잘 살고 있지 않소? 미국이 우리에게 민주통일을 준다면 좋지만 영원한 분열을 준다면 어지 미국을 영원히 좋아할 수 있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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