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창궐위기 대한민국에서 사명대사를 그리워함
좌익창궐위기 대한민국에서 사명대사를 그리워함
  • 이법철 대불총지도법사
  • 승인 2013.09.01 11:2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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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호국사상으로 총궐기하여 공산역도와 종북세력척결

▲ 사명대사
해마다 대불총(大佛總 : 상임대표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은 하계 수련대회를 열어오는 바 2013년 하계 수련대회는 9월 2일부터 예산군의 수련장에서 수련대회를 갖게 되었다.

나는 수련회에서 작금에 지난 좌파 대통령들의 농간에 한국불교의 전통인 호국불교사상이 희미해지는 것에 통탄하여 호국불교사상을 앙양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선 임난(壬亂)의 구국의 승장(僧將) 사명대사에 대한, 민족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비사상과 나라에 공을 세우면 물러나야 한다는 공수신퇴(功遂身退) 사상에 대하여 얘기하려고 한다.

사명대사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민족을 걱정한다 사명대사의 비석은 두 곳에 있다. 당시 조정은 사명대사의 구국 공로를 인정하여 사명대사의 출생지인 밀양에 표충사(表忠祠)라는 편액을 내리고 사당을 지어 비석을 세워 공적을 기리고, 매년 제향을 받들게 했다. 또 사명대사가 만년에 주석하시다 입적하신 합천 해인사 홍제암에 사명대사의 진영(眞影)과 사명대사의 행장이 담겨있는 비석이 있다. 신비한 것은 두 곳의 비석에서는 국가의 위기가 닥칠 때면 눈물같은 물이 흘러 내리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고정세작(固定細作)적인 종북 좌파에 의해 정체성이 위협받는 위기의 이때에 사명대사의 비석은 또다시 우리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하듯이 눈물을 보이고 있다. 나라와 민족의 영원한 수호신이 되신 사명대사를 추모하며 사명대사의 행장(行狀)을 간략히 소개한다.

사명대사의 속성(俗姓)은 풍천임씨(豊川任氏)요, 이름은 유정(惟政)이며, 자(字)는 이환(離幻)이고, 호는 종봉(鍾峯), 송운(松雲) 또는 사명(四溟)이라 하고.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 한다. 조선조 중종 39년(서기 1544년) 갑진(甲辰) 10월17일에 밀양의 삼강동에서 아버지 임수성(任守成)과 어머니 달성서씨(達城徐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사명대사의 증조부 효곤(孝昆)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악원정(掌樂院正)이며, 조부는 괴과(魁科)에 급제하여 강계부사를 지낸 것을 보아 사명대사의 가문은 소위 양반 족보가 있는 집안이 분명하다. 그러나 부처님을 위시하여 역대 조사들 대부분이 일찍 부모를 사별하여 그 충격으로 출가위승(出家爲僧)의 동기가 되었듯이 사명대사 역시 일찍이 부모를 사별하는 비운을 겪었다.

사명대사가 갑오년 9월에 선조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에는 “신은 풍천임씨의 후예로서 조부 때 영남 밀양에 이적(移籍)하여 밀양 부민이 되어 살았는데 불행하게도 신의 나이 15세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연달아 16세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거목무친(擧目無親)이요, 고경혈립이라 드디어 무부무군(無父無君)의 한 죄인으로 부평초 같은 신세가 되어 산림에 들어가서 생애를 운조(雲鳥)와 함께 하였습니다.”라고 했다.

“백성은 보호하고, 우리가 죽어야 한다” 당시 조정은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으로 불교계를 박해, 탄압하여 고통을 주고 있는 때에 사명대사는 김천의 황악산 직지사(直指寺)에 16세에 입산출가하여 신묵화상(信默和尙)의 상좌가 되어 촌음을 아끼어 수행정진 하였다.

1561년 문정왕후의 배려로 시작된 불교의 승가시험인 선과(禪科 : 지금의 국가시험)에 장원급제 했다. 당시 나이는 18세 였다 조선의 임진난은 끝모르는 당쟁 탓에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조정은 일본의 수령인 관백(關伯) 히데요시가 조선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첩보를 입수 하고, 조정의 관리들을 일본에 파견되어 전쟁의 징후를 분석, 판단하고자 진력했다.

그러나 파견된 관리들이 각각 당쟁하는 당파에 소속 되어있는 탓에 선조 임금에게 조만간 전쟁이 발발 할 수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전쟁은 없다”고 거짓 보고를 해 버렸다. 선조는 “전쟁은 없다”는 거짓 보고에 기만당했다.

결국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인 임진난(壬辰亂)을 무방비 속에 당하여 연전연패(連戰連敗)속에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도주하기 직전의 상황에 처하게 되고, 억울한 백성은 일본군의 총칼에 도륙(屠戮)되듯 죽고, 납치를 당해야 했다.

백성들이 떼죽음을 당할 때, 사명대사는 스승인 서산대사와 함께 팔도 의승군(義僧軍)을 모집하여 이렇게 외쳤다. “백성은 보호하고, 우리가 죽어야 한다” 불살생(不殺生)은 불교의 수행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지엄한 불교의 계율이다. 그러나 독사가 인간을 해치려할 때는 불교인은 주저없이 독사를 죽여야 한다. 인간의 생명이 독사보다 더 귀중하기 때문이다.

나라와 민족이 외적의 침략에 의해 패망되고 도륙(屠戮)되는 위기에 처하면 불교인들은 불살생의 계율을 파하더라도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길로 나서야 한다. 이것이 호국불교사상이다. 나라와 민족이 없으면 불교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는 판단으로 사명대사는 구국의 원을 세워 승병들과 함께 전쟁터로 향한 것이다.

사명대사와 가등청정(加藤淸正) 임진난 때 일본군은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지휘하는 군(軍)과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지휘하는 군(軍)의 양군이 선봉부대로 침략해왔다. 어느날 사명대사가 조정의 내밀(內密)한 명을 받고 울산에 주둔한 가등청정을 만났다.

사명대사와 가등청정과의 일화가 밀양 표충사에 있는 ‘밀양표충사송운대사영당비문’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사명대사는 선조 27년(갑오년)4월, 7월, 12월의 3차에 걸쳐 일본군 사령관 가요마사(淸正)을 만나 조선침략에 대한 부당성에 대하여 쟁변(爭辨)했다.

가등청정은 사명대사의 명성을 듣고 있던 차에 사명대사를 만나게 되어 시험해보고 싶었다. 일본군들에게 창칼을 뽑아 좌우로 도열하게 하고, 그 중간으로 사명대사를 걸어오게 했다. 일본군들은 죽일듯이 사명대사를 무섭게 노려보게 했다. 그러나 사명대사는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부하로부터 사명대사가 전혀 겁먹지 않는다는 보고를 접한 청정은 내심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며 경탄했다고 한다.

가등청정이 사나운 얼굴로 사명대사에게 물었다. “조선에 값진 보물(寶物)이 있습니까?” “우리나라에는 보물이 없습니다. 보물은 일본에 있습니다.” “어찌하여 보물이 일본에 있다는 말이요?” 사명대사는 손으로 들어 가등청정의 머리를 가리키며 태연히 답했다. “장군의 머리에는 큰 상금이 걸려 있어서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장군의 머리를 베고자 하니 장군의 머리가 값진 보물이지 않습니까?” 사명대사의 말을 들은 가등청정은 놀라 돌연 얼굴이 창백해지며 스스로 손으로 목을 만지며 “내 목이 조선의 보물인 줄 모르고, 대사에게 조선의 보물을 물었구려. 내가 어리석었소.” 가등청정은 군막(軍幕)이 떠나가라 앙천대소(仰天大笑)했다. 사명대사도 큰소리로 웃었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의 내용을 들은 일본군들도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 내용, 설보(說寶)의 이야기는 조선에 출병한 전 일본군의 웃음을 자아냈고, 일본에까지 전해졌다. 히데요시도 배를 잡고 웃으면서 “청정이 졌다! 그 기백이 충천한 설보 화상이 보고싶구나.” 도꾸가와도 웃음을 터뜨렸다. 전 일본이 웃었다. “맹장, 가등이 졌다!” 일본에 끌려간 포로 3천500백명을 데리고 온 사명대사 일본은 조선침략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새로운 실권자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등장했다.

일본조정은 조선과 화친하기를 위협적으로 강요해왔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일본이 두려워 사신을 보내야 했지만, 일본이 무서워 사신으로 나가려는 정치인이 없었다. 선조 37년 6월, 사명대사가 자원했다. 당시 조정은 통신사(通信使)라기 보다는 불교적 의미를 부여하여 널리 일본을 제도(普濟扶桑)한다는 취지에서 파견하는 한심한 외교적 작태를 부렸다.

그러나 사명대사가 일본에 건너가자 일본인들은 유명한 “설보화상(說寶和尙)”이 왔다고 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하였다. 일본의 조정은 물론, 승려들, 귀족, 평민들은 사명대사의 시문(詩文)을 얻으려고 앞다투었고, 사명대사의 인격과 문장과 설법은 숭앙과 격찬을 받았다. 이에야스의 장자 히데야스(당시 32세)는 사명대사에게 선학(禪學)을 묻고 스승으로 예우를 하였다.

사명대사는 혁혁한 외교성과와 함께 귀국길에 일본군에 강제 끌려간 포로 3천6백여명을 데리고 귀환하여 조정과 백성은 놀라고 감탄하였다. 단군이래 적국에 납치된 포로를 데리고 온 외교는 사명대사가 전무후무(前無後無)할 위업을 세운 것이다.

선조는 사명대사의 초인적인 외교능력과 구국의 단심(丹心)에 보답하기 위해 영의정을 하사 했으나, 사명대사는 신하로서 군명(君命)을 어길수는 없다하여 따랐으나 3일 만에 관직을 버리고 해인사 홍제암으로 돌아가버렸다.

‘공을 이루면 물러나야(功遂身退)’한다는 것을 실천해 보였으니 어찌 구국의 성사(聖師)라고 존경하지 않을 것인가. “地,水,火,風, 사대(四大)는 허망하다, 진(眞)으로 돌아간다” 3일 정승을 지내고 해인사 홍제암으로 돌아와 수행정진 하던 사명대사는 입적하기 전에 사부대중을 불러 마지막 유언했다고 한다.

“지,수,화,풍(地,水,火,風) 네가지 요소로 된 이 몸은 허망하다. 이제 나는 진(眞)으로 돌아가려 한다. 무엇하러 번거로이 오가면서 이 허깨비의 몸을 괴롭히겠는가. 나는 죽음에 들어 대자연의 큰 조화에 순응하려 한다.”하고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깨끗이 가사장삼을 입고 정좌하여 고요히 입적하니 세수 67세였다.

사명대사에 관한 기이하고 신통한 전설이 많이 내려온다. 독자 여러분이 사명대사가 열반한 홍제암을 찾는다면, 사명대사의 진짜 영정(影幀)과, 부도전에 가장 큰 비석인 사명대사의 비석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비석을 살피면 크게 네 조각으로 부서진 것을 볼 수 있는 데 부서진 사연이 있다.

한일 합방 후 일제 36년 강점기간에 일본인 합천 경찰서 서장이 조선사람의 가슴에 살아있는 사명대사의 호국불교사상을 철저히 말살하기 위해 비열하게도 홍제암 부도전에 모셔진 사명대사의 비석을 큰 망치로 내리쳐 네 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날 밤 일본인 서장은 코와 입에서 피를 내뿜고 쓰러져 죽고 말았다는 전설이 있다.

설보화상이라고 찬사를 보내던 일본인이 못되는 옹졸한 일본인이 아닐 수 없다. 비석을 깨부순다고 사명대사의 호국사상이 죽는 것인가? 끝으로, 이 땅의 사부대중들은 서산, 사명대사의 호국사상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나라가 태평할 때는 신명을 바쳐 수행정진과 중생구제에 나서고, 나라와 민족이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처하면, 부처님의 불살생계를 파하면서라도 구국전선에 나서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버리는 호국사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김일성 왕조를 만대에 전하려는 3대 세습독재자의 대남적화 공작과 국내 김씨 왕조의 충견같은 종북좌파 정치인은 물론, 그 외 동패들의 내응(內應)음모로 위기에 처해있다. 불교인들은 불교의 호국사상으로 총궐기하여 공산역도인 김씨 왕조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고 번영시키는 데 앞장 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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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례 2014-01-13 14:39:04
오늘도 제가 할아버지께 글을 올립니다. 6세때 중 노릇 할려고 출가를 결심 했지만 전 부모님이 왜 반대를 했는지 이제서야 뼈저리게 늦끼고 있습니다. 간 중년놈들 때문에 16년17년동안 반 노숙자 생활과 추우 겨울 치악산에서 밤을 세웠습니다. 컴퓨터가 없어 삼성 대리점에서 썼습니다. 광주 광천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