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이 아닌 시작의 땅, 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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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이 아닌 시작의 땅, 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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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자연, 이야기가 흐르는 땅끝마을

^^^▲ 전망대에서 바라본 땅끝마을의 전경
ⓒ 송인웅^^^

흔히 전라남도 해남군을 '땅끝마을'이라고 부른다. 나름대로 "많은 곳을 보았다"고 자부하여왔지만 해남이란 곳은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단지 사람들이 땅끝마을이라고 부르는 것만 알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해남에 도착하자 펼쳐진 땅끝마을의 풍경은 우리 나라 땅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땅의 시작이었다.

대전 유성에서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정읍 IC를 나와 부안에서 서해안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목포 IC를 통과하여 1번국도로 해남방향으로 진행하다가 1,2번 국도가 갈리는 곳에서 2번국도로 진입하여 영산호 대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며 대불공단방면으로 직진 진행하면 ‘해남군 문내면 울둘목’이라는 곳이 나온다.

바로 이 울둘목이 현재 KBS TV에서 방영하는 '불멸의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12척의 배로 왜선 133척을 부수었다."는 명량대첩이 일어난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울둘목이 있는 우수영(右水營)으로 진을 옮긴 뒤 장병들에게 “必死卽生, 必生卽死(필사즉생 필생즉사)”라고 말하고 필승의 신념으로 적의 내습을 기다려 9월 16일 왜선 133척이 어란포를 떠나 명량으로 공격해오자, 12척의 전선과 군사를 정비하여 대승을 이룬 곳이다.

1597년 7월 16일, 도원수 권율로부터 일본군이 주둔중인 부산본영을 치라는 군령을 받은 원균함대는, 칠철량에서 전멸되었고 경상우수사 배설 휘하 판옥선12척만이 가조도로 퇴각했다. 134척 조선연합함대 중 12척만이 살아남았고 무적을 자랑하던 조선함대 122척이 격침된 곳이다.

^^^▲ 명령해전 대첩비우수영관광단지에 세워져 있다.
ⓒ 송인웅^^^

울둘목이라는 천혜의 지형을 이용한 대승리

다음은 당시 명량대첩 당시의 상황을 기술한 것이다.

"패전소식을 전해들은 조선조정은 백의종군중인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복직시켰고(7월23일), 이순신은 9명의 군관을 대동하고 21일 노량진에 도착하여 결전을 벌일 장소로 노량해협 울둘목으로 정해두고 있었다.

1.5km가량 되는 울둘목은 수심이 얕아 배가 지나갈 수 있는 폭은 400m도 되지 않는다. 폭이 이처럼 좁기 때문에 십수척의 포함으로 200척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벽파진은 울둘목으로부터 15km지점이며 이순신은 보름 넘게 벽파진에 머무르며 일본주력 함대를 유인했다. 일본수군은 이순신을 배후에 두고 한강으로 올라갈 수 없어서 조선잔여 함대12척을 깨기 위해 좁은 명량해협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첩보를 받은 이순신은 즉시 함대를 움직여 해남 우수영 앞바다로 나아갔다. 그리고 해남 우수영에서 수병이 없는 판옥선 한척을 함대에 포함시켰고 백성들의 고깃배 100여척도 함대로 위장시켰다.

그리하여 조선함대 총병력은 판옥선 13척에 협선 32척이었다. 9월 16일 척후로부터 적함 200여척이 접근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고 이순신 함대는 울둘목으로 이동하여 조류에 밀리지 않도록 닻을 내렸다. 정오 무렵 왜선 200여 척이 노량해협을 덮어왔다. 그리고 곧바로 130여 척이 공격해 들어왔고 70여척은 후방 노량해협 입구에 대기했다. 이순신이 전 함대에 닻을 올리고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 전시관에 전시된 임진왜란 당시 무기들우수영관광단지 내에 전시관이 있다.
ⓒ 송인웅^^^

율돌목은 조류가 급해 소용돌이 치는 곳이 많아 일본군은 지휘관의 명령대로 진형을 갖출 수가 없었고 판옥선과는 달리 일본 안택선은 바닥이 뾰족하여 선회할 때 충분한 면적이 필요한데 폭이 300여m도 안되는 율돌목에 130여척이 뒤엉켜 있으니 이동이 불가능한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발이 묶인 상태로 마냥 앉아서 조선수군의 불벼락을 맞고 한척씩 한척씩 격침된 것이다. 그사이 정오가 넘어 오후로 접어들면서 조류가 바뀌어 일본군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일본수군의 전략은 접근하여 싸우는 것인데 조류에 밀리게 되어 조선함대에 접근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뒤로 밀리거나 제자리였다. 그리고 판옥선은 쌍돛이라 역풍을 헤치고 갈수 있지만 일본선은 단돛으로 순풍에서는 빠르지만 역풍에서는 느리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류가 일본군 쪽으로 거세게 흘렀고 조선함대는 포격전을 중지하고 충파전을 감행했다. 닥치는대로 들이 받아 11척이 가라앉았고 다른 배도 전선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만신창이가 되었다.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일본 수군은 퇴각을 시작했고 조선군은 추격하여 박살냈다. 전투가 끝난 후 조선수군의 피해는 단 한척의 전함도 부서지지 않았고 100여명의 사상자가 났다. 그리고 일본은 완파되어 격침된 배만 31척이고 나머지 170여척 또한 조선군의 대장군전과 조란환 사격 등으로 인해서 반파된 배가 절반정도 될 것이며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배는 전투 중 입구에 대기했던 70여척과 전투에 참전한 전함 10척에 불과했다.

격침된 31척을 제외한 약 90여척이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타고 있던 일본수병은 적어도 1만명정도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싸움을 이순신 자신도 하늘의 운이었다고 할만큼 어려운 전투였으며 신화같은 승리였다."

^^^▲ 공룡의 모형우황리 전시관 내에 있다.
ⓒ 송인웅^^^

우황리 공룡,익룡, 새발자국 화석지

다음으로 찾은 곳이 천연기념물 394호로 지정된 우황리 공룡, 익룡, 새발자국 화석지였다.

우항리 공룡 화석지는 1987년 신종물갈퀴새 발자국 발견을 시작으로 1992년 공룡 발자국, 1996년 익룡 발자국이 발견됨으로서 1996년부터 1998년까지 기초학술연구 및 종합학술조사가 시행됐다. 이에 1998년 1998년에는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 394호 “해남 우항리 고생물 화석 산출지 및 퇴적층군”으로 지정됐다.

^^^▲ 익룡의 발자국
ⓒ 송인웅^^^

백악기 후기의 공룡 발자국과 퇴적층이 발달되어 있는 해남 우항리 공룡화석지는 총 5000여개의 발자국과 9개의 보행열이 발견됐다. 이곳에서 발견된 발자국은 71%가 조각류, 즉 초식공룡의 발자국이고 26%가 용각류 즉 목긴공룡의 발자국이고 3%만이 육식공룡인 수각류의 발자국이다.

입구에서부터 5킬로미터에 달하는 중생대백악기의 퇴적층이 교과서적인 퇴적구조를 이루며 길게 펼쳐져있어 자연사학습장으로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해남 우항리 공룡 화석지에서 발견된 특히 익룡에 있어서는 세계 7번째, 아시아 최초의 익룡발자국이 발견이라고 한다. 발자국수로는 세계 기존 30개를 압도적으로 누른 전체 443개, 익룡조류관 429개에 달하는 익룡발자국이 발견됐다.

또, 세계에서 가장 긴 익룡의 보행렬을 관찰할 수 있는데, 주목할 점은 익룡이 4발로 걸었다는 사실이다. 기존에는 익룡의 2족 보행설이 유력했었는데 세계 최초로 사람의 귓바퀴처럼 생긴 앞발자국과 사람의 발자국과 비슷하게 생긴 뒷발자국이 남긴 7.3미터에 달하는 보행흔적을 남겨 익룡이 네발로 걸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더욱이 세계 최초로 동일지층에서 익룡과 공룡과 물갈퀴새의 발자국이 나옴으로써 이들이 같은 시대에 살았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곳이다. 세계적으로 백악기 새발자국은 총 7속 7종이 보고 됐는데 그 중 2속 2종이 해남 우항리에서 산출되었다.

^^^▲ 고천방조제의 갈대숲
ⓒ 송인웅^^^

고천암 철새도래지

고천암 철새도래지는 해남읍 화산면에 소재하는 고천암 방조제를 말하는 곳으로 우선 14Km에 이르는 둘레와 900만평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담수호에 놀라고 55만평에 달하는 갈대숲에 두 번 놀라게 된다.

또한 고천암호수는 14Km 호수 둘레를 따라 갈대가 서식하여 많은 철새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정평이나있는 곳이다. 특히 11월 중순부터 다음해 3월까지 50만마리에 달하는 가창오리떼의 군무 모습에 세 번 놀란다고 한다.

가히 철새들의 낙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서의 광활한 갈대숲에서 갈대의 꽃말이 ‘애절한 사랑’이라고 한다.

^^^▲ 사자봉에 있는 전망대사진의 아래에 땅끝마을이라는 비석이 보인다.
ⓒ 송인웅^^^

땅끝마을의 전망대와 낙조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갈두부락에 위치하는 땅끝마을은 말 그대로 한반도의 땅 끝에 위치한다 하여 얻은 이름이다. 원래 한자로 '지말'로 되어 있는 것을 해방전에 일본 사학자들이 땅끝이면 일본을 표시하는 것이 안된다고 하여 '토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122m의 사자봉 아래 형성된 마을이며, 사자봉의 전망대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다도해와, 날이 좋으면 제주도 한라산까지도 보인다고 한다.

전망대 아래 쪽에는 토말(土末)비가 땅끝을 확인하려는 듯 세워져 있다. 마을 주변에는 송호 해수욕장, 달마산, 두륜산 도립공원 등의 관광지가 있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낙조의 모습
ⓒ 송인웅^^^

해남은 특히 "낙조가 아름답다"며 관광도우미 고유경씨는 해남 자랑을 끝없이 하였다.

천혜적인 자연의 혜택을 받아 볼 것이 너무나 많고, 자연친화적인 생산물이 많아 시식할 것이 많음에도 일정이 짧아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정확히 해남을 이해하고 관광하려면 적어도 3박 4일의 일정이 있어야 되겠다"는 아쉬움을 뒤로 하며 다음을 기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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