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기능을 보여주는 영화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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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기능을 보여주는 영화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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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지난 영화산책] 영화로 무엇을 보나

^^^▲ ▲ 영화 <피아노> 포스터
ⓒ 영화사^^^
제인 켐페인, 그의 영화 <피아노>를 본다. 예술을 잃고 돼지에게 의탁하는 창녀(?)가 되었다가 불륜을 통해 다시 예술로 부활하는 내용이니 시종일관 긴장이다.

예술작품이란, 새삼스럽지만 정의를 내려보자면 아마도 야성의 영혼들을 모아놓고 각각의 임무에 따라 색깔을 입힌 것쯤 되리라. 그 영혼들이 제 기능을 원활히 발휘할 수 있도록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야성이란 당연한 얘기겠지만 길들여지지 않은 것, 체제라는 이름으로 구획되지 않은 어떤 것을 지칭한다. 때문에 체제에 길들여지고 관행에 찌든 사람은 예술작품을 정서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감을 갖거나 환상에 빠지거나 악세사리의 선에서 멈춘다.

예술은 일차적으로 창녀의 속성을 지닌다. 창녀를 모르거나 혹은 오해하는 사람은 이게 무슨 벼락맞을 소리냐고 눈을 부라릴 것이다. 창녀를 아시는가? 창녀의 영혼과 대화를 해보았는가? 창녀가 사랑을 할 때 어떤 광휘를 뿜어내는가 들어본 적이 있는가? 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다면 창녀가 무엇인가에 대해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운 정신으로 탐구해볼 것을 권한다.

창녀라는 단어에서 주어가 되는 창(娼)을 파자하면 여자여(女)변에 창성할창(昌)이다. 창성하다는 건 기운이 왕성하다는 것이니 세상을 능히 헤아려 관리한다는 뜻으로 이어진다. 토끼장 같은 곳에 가둬놓고 그저 몸이나 열게하는 오늘날의 창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게 있다면 자신을 알아주고 찾아주는 이에게 마음을 연다는 것, 그 정도일 것이다.

창녀는 스스로를 말하지 않는다. 예술작품 또한 스스로를 말하지 않는다. 예술은 기본적으로 벙어리이다. 앉은뱅이이기도 하다. 자립의 능력도 없다. 창녀는 기본적으로 벙어리이고 앉은뱅이이고 자립의 능력도 없다. 따라서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눈밝은 자의 눈에 띄었을 때 그 존재는 세상의 모든 것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어 휘황하게 다가온다.

이때의 예술은, 창녀는 벙어리가 아니고 앉은뱅이도 아니고 무능력하지도 않다. 당연하게도 그 존재는 세상의 모든 어두운 것들과 밝은 것들 그리고 비밀에 쌓인 생명의 샘을 열어젖혀 보여준다. 창녀는 고대로부터 신전을 관리하며 신과 소통하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오늘날에도 무녀(巫女)들에게 그 유습은 남아 있다.

영화 <피아노>에서 창녀는 예술의 원형이요 완성태이면서 또한 기초라 할만하다. 감독이 그녀를 벙어리로 설정한 의도를 주목하자. 그녀는 영혼으로 말한다. 영혼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자는 당연하게도 제한적이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도 듣는 이가 있고 전혀 못듣는 이가 있다.

돼지는 그녀의 말을 들을 수가 없다. 탐욕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한 그는 영원히 그녀를 들을 수 없고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면의 진정에 충실할 수 있다면, 허세와 허영과 자기기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그도 마침내 그녀를, 예술을 알게 될 것이다.

돼지는 야성의 숲속에서 산다. 이 돼지 한 마리가 어느 날 예술을 잃고 배가 고파진 여자 하나를 매입한다. 이 여자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어째서 예술을 잃었는가 모호하듯이 그녀의 이 딸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가 또한 애매하다. 이것은 여자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을 성립시키기도 하지만, 창녀의 기원과 예술의 기원을 푸는 열쇠이기도 하다. 생각을 조금 더 깊이 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사람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하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표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배가 고픈 그녀는 몇 개의 짐보따리와 피아노 한 대 그리고 딸과 함께 돼지들의 숲속으로 팔려온다. 이제부터 그녀는 그녀 자신에 대해 아무런 권한이 없다. 돼지에게 팔려온 것이니 돼지의 뜻에 따라야 한다. 돼지에게 피아노는 아무 쓸모가 없는 물건이다. 그래서 피아노를 바닷가에 버려버린다.

그런데 세상이란, 어떤 부류의 어떤 세상이 되었건 세상이란 하나의 틀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만약에 단 하나의 틀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우리는 아마 일 년도 못 살고 질식할 것이다. 돼지의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일상에 매몰되어 세상이란 오직 그것뿐인 줄 알고 살지만 어느 날 문득 그게 아니라는 자각에 이르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자각을 했다 해서 모두가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은 물론 아니다. 용기 있는 극소수만이 세상을 보다 깊고 그리고 넓게 살아보자, 결단을 내리고 행동에 나선다. 그 행동은 고통스럽지만, 고통 뒤에 얻어질 행복에 대한 기대는 크고 이 큰 기대에서 열정은 샘처럼 솟는다.

팔려온 여자의 존재방식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리둥절해 하는 돼지들 가운데 한 마리의 돼지가 그녀를 주목하고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가 보여준 첫 번째 행동은 의미심장하다. 바닷가에 버려둔 피아노와 자신의 전재산인 토지를 맞바꾸자는 것, 다만 여자로 하여금 피아노렛슨을 해주게 해달라는 것, 여자의 남편 자격을 갖고 있는 돼지가 볼때 이 제안은 황당하기 짝이없지만 그러나 거절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돼지란 원래 먹어도 먹어도 배가 부른 줄을 모르는 탐욕의 상징이니까.

그리하여 여자는 남편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돼지의 집을 드나들게 된다. 피아노렛슨이라는 명목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명목일 뿐이다. 이 색다른 돼지는 애당초 피아노 따위를 배울 목적으로 자신의 전재산과 피아노를 맞바꾼 게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야성의 숲속에 살면서 언제라도 마음을 기울이면 들려오는 소리를 이미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들을 줄 아는 귀를 갖고 있었으니까. 요컨대 예술을 향유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으니까. 따라서 그가 새로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예술의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의 근원에 대한 탐구였던 것이다.

여자가 선생 자격으로 자신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피아노를 치는 여자의 밑으로 납작 엎드려서 페티코트 속으로 보일락 말락 드러난 여자의 살을 보려한다. 여자는 당연하게도 화를 내고, 이때부터 거래가 시작된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속살을 한 번 보기만 하는 데에 피아노건반 하나, 손이나 어깨를 만질 때는 피아노건반 두 개, 옷을 입은 채로 나란히 누워서 손이든 어깨든 무엇이든 만지는 걸 허락하면 다섯 개의 건반을 주기로 한다. 요컨대 피아노를 다시 그녀에게 돌려준다는 것이다. 여자의 입장에서는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예술을 잃고 피아노마저 빼앗긴 뒤로 그녀의 삶은 살아도 산 것 같지가 않았으니까.

“옷을 벗고 함께 나란히 눕고 싶소. 몇 개면 되겠소?”

어느 날 남자는 마침내 여기까지 온다. 아하, 이건 뭐 당연한 수순이다. 여자를 가까이서 보기만 하면 예술의 비밀을 알 것 같았는데 알아지지가 않았으니까. 그래서 만져보면 알아질까 했는데 그래도 안 되었으니까. 그래서 나란히 누워보면 알아질까 했지만 그것 역시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이젠 옷을 벗고 나란히 누워보고 싶은 것. 그 다음은?

어쨌든 여자의 입장은 무엇이냐. 옷을 벗는다 해서 근본적으로 달라질 무엇이 있는가? 아니다. 게다가 그녀는 그때쯤 새로운 사실을 알아채고 있기도 하다. 남편과 똑같은 돼지로만 알았는데 자신의 존재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라는 것. 따라서 그녀는 굳이 피아노건반이 아니라도 옷을 벗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거래는 거래. 그녀는 열 개를 요구한다. 그리하여 피아노건반 열 개를 조건으로 여자는 옷을 벗고 남자 또한 옷을 벗고 나란히 눕는다.

자, 이제 거래는 끝났다. 피아노는 원래의 주인인 여자의 집으로 옮겨지고, 알거지가 된 남자의 잠못 이루는 밤이 시작된다. 괴롭다. 무엇인가 알아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하나도 알아진 것은 없다는 것, 알아지기는커녕 전에 없었던 갈증이 찾아왔다는 것, 이것은 대단히 고통스럽지만 그러나 황홀하다. 안 먹어도 배가 고픈 줄을 모르고, 얼굴이 날로 수척해가지만 생사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하나도 없다.

남자가 그렇다면, 여자는 어떤가. 피아노를 되찾은 그녀의 삶은 행복해졌는가? 아니다. 그녀는 실로 운명과도 같이, 돼지들만 우글거리는 숲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는 남자를 발견했던 것, 피아노를 되찾은 데서 오는 흥분도, 기쁨도, 흥미도 모두 잃어버린 채 전전긍긍하던 그녀는 결국 남자를 찾아간다.

“왜 왔어요?"

남자의 반응은 이렇게도 시큰둥하다. 아니다. 시큰둥한 것이 아니라 그러는 척한다. 여자는 화가 난다.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왔는데 겨우 이런 거야? 그녀는 남자의 가슴을 사정없이 둥당둥당 두드려댄다. 그러다가 슬픔을 못 이겨 남자의 어깨에 안겨버린다. 자, 이제부터 이른바 불륜이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여자의 남편, 이 배부른 돼지는 집에 온통 철창을 해서 아내를 가둬보기도 하고,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도끼로 아내의 손가락을 잘라보기도 하고 벼라별 짓을 다해보지만,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의 소유물인 아내는 자신으로부터 더욱더 멀어져 간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에 빠진다. 그런데 세상이란 참 조화로운 것이어서, 절망이 깊고 무거우면 그럴수록 뜻하지 않은 것을 얻어낼 수도 있게 되어 있다. 깨달음이라는 것, 이 거대한 우주 속 한 점 티끌에 불과한 인간의 저 깊은 진실을 탐지하는 순간.

“내 아내는 말을 못해. 벙어리야. 그런데 내 머릿속으로 말야. 내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어느 날 한밤중에 돼지는 권총을 들고 아내의 정부를 찾아가서 이런 밑도끝도 없는 얘기를 한다. 아내의 정부를 권총으로 쏘아 죽이기라도 할 것 같지만, 그러나 그런 유치한 짓을 하기에는 이미 뭔가를 알아도 한참 깊이 알아 버리고 있었던 것, 그것을 그는 말하려하는 것이다.

“내 아내가 말야. 이러는 거야. 난 당신을 떠나고 싶어요. 내 정부와 함께, 남편인 당신을 떠나고 싶단 말이에요. 이런 말을 하고 있었어. 내 아내가, 내 머릿속으로 말야.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

구차한 해석이 더 필요할까? 여기서 뚝 잘라 간단하게 정리하고 말자. 돼지는 요컨대 권총을 들고 한밤중에 아내의 정부를 찾아가서 둘이 같이 떠나라고, 떠나달라고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의 기능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자유를 잃고 허둥거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의 본질을 알아차리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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