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과 원균의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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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원균의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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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 사극 '불멸의 이순신' 타이틀^^^
이순신은 서기 1545년 음력 3월 8일, 양력으로는 4월 28일에 한양 건천동에서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변씨 사이에서 4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항간에는 이순신의 태몽으로 꿈에 이순신의 증조부인 이거가 나타나 한 말에 따라 이름을 순임금의 신하인 순신이라 지었다는 말이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순신의 형제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장남이 삼황오제 중 한 명인 복희의 신하라는 의미의 희신, 둘째가 요임금의 신하라는 요신, 이순신의 동생이 우임금의 신하인 우신이라는 점을 보면 순신이란 이름은 다른 형제들의 이름을 지은 것을 이은 것임을 알 수 있으며 태몽이야기는 후대에 지어진 듯 하다.

원균은 이순신보다 5년 가량 먼저 태어났으며 출생지는 지금의 평택시 도일동이다. 원주 원씨는 이 지역의 유력가문이기도 하다.

최근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순신과 유성룡, 원균이 건천동에서 같이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이순신이 원균을 형님처럼 따르며 그를 닮고 싶어했다는 설정을 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순신은 유약한 아이였으나 원균처럼 용감해지고 싶어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설정은 김탁환의 원작소설에서부터 비롯된 것인데 김탁환은 그 근거로 다음의 기록을 제시하고 있다.

나의 친가(親家)는 건천동(乾川洞)에 있었다. 청녕공주(靑寧公主) 저택(邸宅)의 뒤로 본방교(本房橋)까지 겨우 서른네 집인데, 이곳에서 국조 이래로 명인(名人)이 많이 나왔다.

김종서ㆍ정인지ㆍ이계동(李季仝)이 같은 때였고, 양성지(梁誠之)ㆍ김수온(金守溫)ㆍ이병정(李秉正)이 한 시대였으며, 유순정(柳順汀)ㆍ권민수(權敏手)ㆍ유담년(柳?年)이 같은 시대였다. 그 후에도 노 정승(盧政丞 노수신(盧守愼)을 가리킴)과 나의 선친 및 지사(知事) 변협(邊協)이 같은 때이며, 근세에는 유서애(柳西厓 서애는 유성룡(柳成龍)의 호)와 가형(家兄) 및 덕풍군(德豊君) 이순신(李舜臣)ㆍ원성군(原城君) 원균(元均)이 한 시대이다. 서애는 국가를 중흥(中興)시킨 공이 있었고, 원ㆍ이 두 장수는 나라를 구원한 공이 있었으니 이때에 와서 더욱 성하였다.

내가 일찍이 이런 일을 들어서 오성 상공에게 이야기하니 상공이,
"그 동네에 무장(武將)이 있는가?"
하기에 내가,
"성우길(成佑吉, 1571-1623)의 관직이 가장 높습니다."
하니 다시,
"그대와 상대해도 괜찮을까?"
하므로 내가 웃으면서,
"성(成)도 북문(北門)에서 공을 세우면 후세에서 오늘날을 볼 때, 오늘날 예전 일을 보는 것과 같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니, 상공이 크게 웃었다.

-허균 <<성소부부고>>중에서

한편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제작진 역시 역사왜곡 논란에 대한 해명 글에서 이순신의 어린 시절 부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략) 1. 이순신, 류성룡, 원균이 어린 날 ‘지기’였다는 설정에 대하여..

허균의 『성소부부고』에 이순신, 류성룡, 원균이 ‘건천동’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허균 또한 건천동 출신입니다) 당시 한 마을에 가구 수가 얼마 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세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드라마를 쓰는 작가는 이 한 줄의 기록을 통해 다양한 상상을 해 보게 마련입니다. 세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면 능히 한 서당을 다닐 수도, 긴밀히 교유할 수도 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2. 이순신이 ‘겁쟁이’였고, 원균을 ‘형님’으로 믿고 따랐다는 설정에 대하여..

이 부분이 가장 큰 논란을 불러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이순신에 대한 심각한 ‘폄훼’가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이순신은 후일 조선과 일본간에 벌어진 7년 전쟁에서 23전 23승, 불패의 신화를 창조한 ‘영웅’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론 만으로 어려서부터 용맹성이 극에 달했을 것란 추론은 너무 상식선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순신은 28세의 늦은 나이로 무과에 처음 응시했으며, 32세에 식년무과에 병과(12등 정도)로 급제했던 다소 평범하고, 같은 장수들과 상대평가하자면 오히려 열등했던 이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작가는 이 부분에 주목해 보았습니다. 타고난 것이 많지 않은 ‘노력형의 인간’이 바로 이순신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도 유년기의 아이들은 누가 키가 더 큰지, 또 누가 더 힘이 센지로 우열이 가리지 않던가요? 그러나 힘세고 키 큰 아이들이 다 우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삶의 긴 여정을 통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겁’이 많은 아이의 이면은 ‘생각’이 많은 아이입니다. 많은 생각이 그 아이에게 사려깊음과 지혜로움이란 선물로 주겠지요.

이순신이 후일 조선 최고의 지장이 된 이면에는, 어린 날 그가 다른 사람이 보기엔 유약하나 다분히 ‘생각 많은’ 아이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또한 지금도 “사내가 왜 그리 맥이 없고, 용기도 없냐”는 지청구를 받는 그 수많은 아이들이 사실은 ‘생각 많은’ 아이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용기는 나의 부족함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부족함을 인정하고, 나보다 뛰어난 사람에게 겸손히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배우려는 자세를 가진 이. 그를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나도 용감해 지고 싶은 거야, 균이 형님처럼..”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어린 날 순신이야 말로 참된 용기를 가진 아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후략)

이런 내용만 본다면 소설과 드라마의 설정은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진짜 그럴까?

이런 예를 들어 보자. 요즘 병역비리로 시끄러운 탤런트 송승헌은 필자의 고등학교 선배이다. 만일 필자도 유명해진다면 먼 훗날의 학교 후배는 송승헌과 필자를 같은 ‘시대’의 대표적인 선배들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송승헌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다 송승헌은 필자가 고등학교를 다니기 전에 졸업한 탓에 학교에서 볼 일은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같은 ‘시대’와 같은 ‘시기’는 엄연히 다른 문제이다. 즉, 이순신, 유성룡, 원균이 같이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그들이 같은 시대 건천동 출신이라는 자료가 아닌 같은 시기에 건천동에 살았다는 자료가 필요하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원균은 도일동에서 태어나 중도에 건천동으로 옮겼다. 이순신은 10살 무렵 충청도 아산으로 이사를 하였고 유성룡은 본래 경상도 출생이나 건천동으로 이사하였다. 이런 이사 시기의 차이를 고려하면 이들 셋이 한 시기 건천동에 살아서 친하게 지냈다고 단언할 수 없다. 이들의 친분을 드러내주는 증거가 필요하다. 적어도 이순신과 유성룡의 관계라면 자료가 있다. 바로 선조실록의 기록과 유성룡이 남긴 <징비록>이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신의 집이 이순신과 같은 동네에 있기 때문에 신이 이순신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성(京城)사람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성종(成宗) 때 사람 이거의 자손인데, 직사(職事)를 감당할 만하다고 여겨 당초에 신이 조산 만호(造山萬戶)로 천거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글을 잘하는 사람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성품이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아 제법 취할 만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느 곳 수령으로 있을 때 신이 수사(水使)로 천거했습니다. 임진년에 신이 차령(車嶺)에 있을 때 이순신이 정헌(正憲)이 되고, 원균이 가선(嘉善)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작상(爵賞)이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무장(武將)은 지기(志氣)가 교만해지면 쓸 수가 없게 됩니다.”

- 이상 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27일 기사 중에서

이순신의 자는 여해이고, 그의 본관은 덕수이다.

그의 선조에 이변이라는 이는 벼슬이 판부사에 이르렀는데 강직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증조인 이거는 성종을 섬겼는데 연산이 동궁에 있을 때 그는 강관이 되어 엄격하므로 그 꺼림을 당하였다. 그가 일찍이 장령이 되었을 때에 탄핵당하는 것을 회피하지 않으니 만조백관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호랑이 장령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할아버지인 이백록은 가문의 덕으로 벼슬을 하였고, 아버지인 이정은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어렸을 때 영특하고 활달하였다. 그는 여러 아이들과 함께 놀 때에도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가지고 거리에서 놀았는데, 그 마음을 거스르는 사람이 만나면 그의 눈을 쏘려고 하였으므로 어른들도 혹은 그를 꺼려 감히 그 군문 앞을 함부로 지나가지 못하였다.

- 이상 유성룡 <징비록>중에서

유성룡은 조정 회의에서 자신은 이순신과 같은 동네에 살았음을 말하고 자신의 저서에도 이순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위에 인용한 실록은 수군의 지휘권에 대한 회의 내용의 일부로 원균 역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유성룡은 원균에 대해서는 어린 시절의 인연 같은 건 말하지 않음은 물론 징비록에서도 기록하지 않고 있다. 만일 소설이나 드라마의 내용대로라면 유성룡은 징비록에 원균의 어린 시절 역시 언급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소설가 김탁환이 그린 이수신 유성룡, 원균의 관계가 순전히 허구임은 작가 자신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본래 몇 년 전 나온 소설 <불멸>에서는 이들의 관계가 어릴 때부터 악연으로 그려졌으나 개작된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드라마에서처럼 관계가 그려진다. 아마도 소설적 허구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역사적 고증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

또한 징비록의 내용을 따르자면 이순신은 어린 시절 활과 화살을 만들어 노는 골목대장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에 나오는 유약한 이순신의 이미지가 아니다. 이순신의 어린 시절을 기록을 무시하고 창작해낸 것이다.

드라마의 제작진은 허균의 성성부부고를 제시하면서 ‘작가는 이 한 줄의 기록을 통해 다양한 상상을 해 보게 마련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은 실록에 몇줄 만 나오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드라마를 만든 대장금 제작진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이순신의 어린 시절과 원균 과의 관계는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알 수 있다. 서점에서 징비록을 구매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고 KBS 방송국에는 폐지되었다지만 역사스페셜 같은 역사 다큐 제작진이 활용하던 조선왕조실록 CD도 있을 것인데 그런 노력도 안 하고 이순신 드라마를 제작하는 것인가.

다양한 상상은 기록이 전혀 없을 때 하면 된다. 자신들의 상상이 얼마나 권위가 있길래 확실한 사료를 무시하는 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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