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팥이 가득 들어있는 찐빵을 먹자니 과거 찐빵과 관련된 어떤 가슴 시리는 단상이 떠올라 이처럼 몇 자 적어본다. 때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즈음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역산하자면 어언 30년도 훨씬 더 지난 시절의 일이다.
지금이야 집집마다 세탁기와 다리미가 다 있으며 직접 세탁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전화만 해도 세탁소에서 부리나케 달려와 옷을 수거해 가는 좋은 시절이다. 그러나 당시엔 다들 그렇게 살기가 어렵던 시절이었다. 하여 세탁기는 언감생심이고 다리미조차도 없는 집이 태반이었다.
같은 동네에 당시 다리미를 월부로 팔러 다니는 아저씨가 한 분 살고 계셨다. 그 아저씨는 평소 아버지께 "형님"이라고 부르며 간혹 술도 나누시곤 하였기에 나도 그분을 아저씨라고 부르던 터였다. 당시 겨울방학을 맞았지만 딱히 할 일도 없고 하여 또래들과 얼음이나 지치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 아저씨가 오후에 찾아오셨다.
내일은 병천 장날이어서 그리로 가는데 나도 따라나서면 용돈을 두둑이 주겠다는 것이었다. 견물생심에 혹하여 흔쾌히 그러마고 대답을 했고 이튿날 아침 일찍 우리집으로 찾아오신 그 아저씨의 뒤를 따라 병천장으로 갔다. 그 아저씨는 포장박스에 들어있는 다리미 열 개를 줄로 묶어 등에 지셨고 내게는 다섯개를 지라고 주셨다.
버스를 타고 병천장에 갔는데 하지만 점심 때가 되도록 다리미는 하나도 팔지를 못 하였다. 날씨는 춥고 배는 마구 고파서 눈이 뱅글뱅글 돌 지경이었으나 그 아저씨의 입에서 "점심 먹고 하자"는 말씀은 없었다. 수중에 일 원 한 푼조차도 없던 나로서는 달리 방법이 있을 리 만무였다.
아저씨는 다리미를 현금으로 팔건 할부로 팔건 간에 일단 한 대라도 파는 양이면 계약금을 받아 그 돈으로 점심을 해결햐려는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오후 땅거미가 다 지도록 그 아저씨의 등에 걸린 다리미의 숫자는 줄어줄지 않았다.
겨울 삭풍은 험하게 몰아치고 배는 등에 가서 붙어서 나는 그야말로 기진맥진 금방이라도 탈진할 듯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어느 푸줏간 근방에서 기운이 없어 내가 지고 간 다리미 다섯 개를 포개고 앉았다. 고개를 파묻고 배고픔과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에 와들와들 얼마나 떨었을까... 내 이름을 부르는 아저씨의 목소리에 아까와는 달리 힘이 붙었음은 바로 그 때였다.
그제서야 겨우 한 대의 다리미를 파신 아저씨는 극구 미안한 표정을 지으시더니만 우선 난장에서 파는 찐빵부터 사 주시는 것이었다. 맛은 꿀맛이었지만 목은 왜 그리도 메였고 또한 왜 그리도 눈물은 앞을 가렸던지... 그날 아저씨는 연신 미안하다며 아버지가 드실 찐빵까지도 덤으로 사 주셨다.
그날 내가 고생한 얘길 고자질하자 아버지는 "다신 그런 데 따라 나서지 말고 공부나 해라!"며 그날 아들이 고생한 이력을 아셔서 였는지 어쨌는지 여하튼 그 맛난 찐빵을 한 개도 안 드시고 죄 나에게만 주셔서 나는 그날 모처럼 배가 터져라 찐빵을 잔뜩 먹을 수 있었다.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 아버지도 그 아저씨도 이젠 내 곁에 안 계신다. 찐빵은 여전히 달콤하고 맛이 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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