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기본조약 제2조는 대일 외교의 '아키레스건' 이다 (극일9)
한일 기본조약 제2조는 대일 외교의 '아키레스건' 이다 (극일9)
  • 이헌진 칼럼니스트
  • 승인 2011.10.04 12:2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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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침탈 증거를 두고도 대 일본 벙어리행세

1965년 한일 간 국교를 정상화한 후 반세기가 다가오는 지금에도 양국 간에 맺혀 있는 앙금들이 계속 남아있어 외교적 측면에서 북한문제 다음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역사왜곡과 독도 소유권문제가 바로 그것인데 이보다 더 급한 현안이 있으니 바로 한일기본조약과 부속협정에 관한문제이다.

위 첫 번째는 기본조약 제2조에 관한문제이고, 두 번째는 부속협정인 한일청구권 및 경제협력에 관한 문제이다.

지금 시중에서는 두 번째인 부속협정의 문제가 급부상하고 있으나 사실은 그보다 더 크고 근본적인 문제는 기본조약 제2조의 문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꼭 집고 넘어가야할 문제를 다루는 론단 이다보니 장문의 글이다. 숙독을 부탁드림.

● 먼저 ‘청구권 및 경제협력에 관한 부속 협정 제2조1항’에 관하여 살펴본다.

1. 1965년에 한일 간에 체결된 기본조약의 부속협정인‘청구권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1조는 일본이 우리정부에 무상3억불 등을 지급한다는 조항이고, 동 협정 제2조1항’은 위 지급된 3억불 등에는 일제가 벌인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우리국민에 대한 배상부분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해결되었다고 하는 조항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위 돈은 제3공화국 정부가 받아썼을 뿐, 전쟁피해국민에게는 한 푼도 건네 지지 아니하였으니, 정부가 일본과 협상을 재개하여 국민피해부분을 다시 받아오던지 아니면 정부가 책임지고 해결해 달라는 문제인 것이다.

2. 헌법재판소도 지난 8월 30일에 선고한 2006 헌마788사건과 2008 헌마648사건에 대한 판결에서 동 협정 제2조 1항에서 일본정부가 한국에 무상 3억불, 차관2억불을 제공하는 것만으로 한국 국민의 피해까지‘최종적으로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규정한 것은 동 협정목적에도 위배되는 바, 우리정부가 동 협정 제3조에 따라 외교경로를 통해 일본국에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한 것은 국가가 국민의 권리보호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한 부작위로 위헌임을 확인한다. 라는 취지의‘인용판결’을 내렸다.

3. 위 인용판결에 따라 현 김성환 외교통상부장관도 일본에 이의를 제기하겠다는 막연한 소신을 피력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나 후속 수단을 어떻게 취할지 기대해 볼 뿐이다. 그러나 안이하게 대응 할 때 일본의 술수에 또 말려들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점을 국민의 한사람으로 경고하는 바이다.

4. 동 협정의 전재가 된 한일기본조약의 전문에 보면, ‘대한민국과 일본은 양국 국민 관계의 역사적 배경과, 선린 관계와 주권 상호 존중의 원칙에 입각한 양국 관계 정상화에 ---’ 라는 구절이 있어 이는 양 국가뿐만 아니라 양 국민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 또 위 전자인 한일기본조약 제2조는 우리에겐 ‘가슴속의 암' 과 같이 속히 수술로 도려내지 아니하면 아니 될 병인이다.

1. 1965년에 맺은 ‘한일기본조약 제2조’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라는 조항인데 이 조문은 우리의 이익과 자존을 해하는 큰 함정이 분명함에도 우리정부가 그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도 별 다른 대책을 강구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한 업무해태 내지 직무유기에 관한문제다.

동 조약 제2조에 관하여 명지대학교 김명기 명예교수는 위 조약 문언 중 ‘이미 무효’란 어절이 문서화되기 전, 한국은 ‘당초(1910)부터 무효’라고 표기하자 했고, 일본 측은 ‘1945년부터 무효’ 라고 표기하자고 서로 고집하다가 최종 교섭과정에서 결국 ‘이미 무효’란 어절을 쓰기로 절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무효’ 란 어절 안에는 1910년과 1945년이란 두 시점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는 ‘일어이의(一語二意)’의 모순이 그대로 남아 있어, 동 협정 말미에 적시한 영어 본으로 해석해도 해결될 문제가 아님이 너무나 명확하다.

2. 그럼 위 기본조약 제2조에서‘이미 무효’에 대한 시점이 왜 문제인가부터 챙겨 보자.

가. 위 ‘이미 무효’ 가 된 시기를 일본의 주장대로 1945년이라고 하면, 일제가 한국을 병합한 1910부터 해방된 1945까지의 36년간은 한일합방조약이 살아 있어 동 조약이 적법한 조약임을 우리가 동의하는 꼴이 되고, 그들이 주장한 내선일체의 이론인 '한일동조동근론', '임나일본부설' 등 조선민족‘혼’말살의 허구의 논리까지도 우리가 수용하는 꼴이 된다.

따라서 그 동안 한일 간에 분쟁이 되어온 독도 소유권 문제나 일본의 역사 왜곡문제, 일본이 그들의 전쟁에 동원한 한국인 군인, 징용, 군속, 위안부 등에 대한 인권유린 등 반인륜적 행위사실까지도 일본정부의 일본인에 대한 통치로 취급될 뿐 아니라, 일본국의 ‘내정문제’라고 우리가 인정하는 자승자박(自繩自縛)의 어리석은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그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 36년간은 한국이 국가의 객관적 지위를 잃은 것이고, 1945년까지의 한국인 국적은 한국 국적이 아니고 일본 국적이며, 그 동안의 한국침탈도 이론상 일본국법에 의한 적법한 통치가 된다.

나. 반면에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뺏은 1910년을 ‘당초부터’의 시점이라 지적 하면,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36년간은 ‘일제강점기’로 한국은 주권만 빼앗겼을 뿐, 엄연하게 국가는 존속하였다 하겠고, 따라서 한국인의 지위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국적을 소유한 한국인인 것이다.

당연히 한국인의 전쟁피해에 대한 모든 배상 역시 일본정부에 책임이 있고, 독도 소유권 주장이나 역사 왜곡 교과서 등도 원인 무효로 더 이상 일본이 이의제기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 그럼에도 염려되는 것은 국제학술회의에서 영국의 국제법 전문가인 케임브리지대 J.크로포드 교수 등은 "스스로 살아나갈 수 없는 국가에 대해 주변국가가 국제적 질서의 관점에서 그 나라를 강점하는 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흔히 있었던 일"이라며, "한일합방 조약은 국제법상 불법이 아니었다" 고 한 주장들도 있다는 점을 되새김질해봐야 한다.

물론 위 교수는 우리를 더 이상 스스로 살아 갈 수 없는 미개한 국가 민족으로 치부한 것은 무력으로 한일합방 할 당시 벌어진 사실관계를 오인한 경거망동이요, 한편 자국 영국이 세계 곳곳을 식민지화한 자기변명의 논리일 뿐이다.

3. 위와 같이 동 조약 제2조가 해석상 양국 간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일본의 일방적 해석을 우리정부가 묵과해 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가. 우리정부는 일본이 1996년 200해리 EEZ(배타적경제수역)를 선포하고.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 부속협정 중 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여 새로운 어업협정을 재체결하자고 요구해 오자, 1997년 7차례, 1998년 8차례의 공식협상을 거쳐 그해 10월 9일 김대중 정부는 ‘신한일어업협정’에 가서명(假署名)하고, 11월 28일 서명한 데 이어, 이듬해 1월 6일 국회 비준을 거쳐 1월 22일부터 1965년의 ‘구 한일어업협정’을 ‘신 한일어업협정’으로 개정한 사실이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나. 그런 전례가 있음에도 왜, 우리 정부는 굴욕적인 벙어리 외교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고, 정권을 잡아보겠다고 싸움질 하는 정당이나, 대통령에 뜻을 둔 후보들조차 위 조약과 협정의 개정문제를 어째서 공약으로 내세우지 못하는가 생각하면, 정치지도자가 외교문외한이 아니면 ‘또라이(멍청하고 머리가 빈)’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고, ‘민족 혼’조차 없는 허수아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다. 동아일보 1994.9.10 자 기사에 의하면, 동경대학 와다하루키 교수도 1994년 9월 7일에 위 조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고 했다.

‘지난 1965년에 체결된 한일협정은 양측이 각자 원하는 대로 문안을 해석하도록 만들어 놓은 애매모호한 조약이다. 한일합방조약에 관한 제2조의 경우 일본 정부는 한국독립에 의해 비로소 합방조약이 무효화 되었으며, 따라서 일제 통치는 합법적이라고 해석하는 반면 한국정부는 합방조약은 처음(1910)부터 무효로 일본 측의 반성 없이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짐으로서 처음부터 양국관계는 왜곡되어 있다. 이 왜곡된 한일협정의 새 해석을 위한 협상을 재개하여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 보상을 해야 한다---’라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는 것이다.

위 교수는 일본의 학자임에도 일본의 조선 통치는 불법임을 고발하고 있고, 위 조약 제2조의 개정을 촉구하고 있는데 오히려 우리 역대 정부는 ‘강 건너 불 보듯’남의 일처럼 방관해 온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한일기본조약 제2조는 우리 대한민국 심장부 속에 자라는 ‘암’과 같은 존재이다.

4. 시재 ‘1910년’의 보편적이며 객관성 있는 형식논리에 관하여.

가. 일반 관례는 어떤 계약이나 협약이 일단 문서로 완성되어 쌍방이 날인하고 동 문서를 서로 나눠 가졌다면, 그 문서 작성 이전에 어떤 과정이 있었고, 어떤 논란이 있었는지는 상관없이 문서의 기재내용만이 계약당사자를 구속하는 효력을 가지며, 법정 시비가 생기더라도 그 문서의 내용이 판단의 기준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제2조의 조문을 어법적으로 위‘이미 무효’에 관해 정답이 있는지 없는지는 일단 살펴보기로 한다.

나. 가령 20세기 초반에 있었던 한일관계의 역사를 모르는 어문 학자에게 위 한일기본조약 제2조 인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 일본제국 간에 체결 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 한다. 라는 문장을 보이며,

위 문장에서 ‘이미 무효’시기가 언제이가 하고 묻는다면, 그 어떤 어문학자라도 1945년부터 무효라고 지적하지는 아니할 것이고, 어문 법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은 ‘이미 무효’의 시점은 1910년이라고 답할 것이 너무나 뻔하다. 왜냐하면,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라는 문장에서 쓰인 그 란 단어의 어문법상 의미는‘관형사’로 ‘앞서 이미 이야기한 대상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라고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 그렇다면, 한일기본조약 제2조의 이미 무효의 시재는 어법 상 ‘그’앞에 쓰여 있는 ‘1910년 8월 22일의 시간대를 지적한 관형사임이 명백한 것이다.

즉 이미무효는 애당초 무효=1910.8.22이 객관성이 있는 정답인 것이다.

● 1910년의 ‘이미 무효’에 대한 사실적 증거에 관하여 살펴보자.

1. 1905년의 을사조약 이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편입되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그 후 위 한일합방조약은 1910년 8월 22일에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대한제국은 그 시점부터 국권(주권)을 상실하게 된다.

가. 1907년 일본은 정미조약을 통해 차관정치로 행정권을 모두 뺏은 후 한국의 국호마저 박탈하기로 1909년 7월 일본은 내각회의를 열고 확정했다. 이듬해인 1910년 6월 30일에 한국의 경찰권을 빼앗은 다음, 7월 12일엔 '병합 후의 대한(對韓) 통치방침'이란 계획서를 만들고, 조선통감으로 임명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이 문서를 휴대하여 경성에 부임함으로써 본격적으로 국권침탈에 대한 공작을 전개하였다.

나. 동년 8월 16일 데라우치는 총리대신 이완용과 농상공부대신 조중응(趙重應)을 통감관저로 불러 병합조약의 구체안을 밀의(密議)하고, 18일 각의(閣議)에서 합의를 보게 한 다음 22일 순종황제 앞에서 형식만의 어전회의를 거쳐 그날로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조인을 완료하였다.

이 사실은 1주일간 비밀에 부쳐졌다가 8월 29일 이완용이 윤덕영(尹德榮)을 시켜 황제의 어새(御璽)를 날인하여 이른바 칙유(勅諭)와 함께 병합조약을 반포(頒布)하였다.

2. 이런 합방조약이 되기까지 과정을 살펴본다.

가. 조선 후기 친일정치가 송병준은 이준열사의 헤이그 특사사건 후에는 이완용과 함께 고종 황제 양위운동을 벌여 친일활동에 앞장섰고, 1907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 내부대신을 역임하면서 국권피탈을 위한 상주문을 제출하는가 하면 1909년 2월엔 일본으로 건너가 여러 차례 이토 히로부미와 가쓰라 다로(桂太郞) 수상 등 일본 조야 정객들을 상대로 ‘한일합병’을 설득하고, 자신의 내각구성을 조건으로 삼아 정치 흥정까지 했다.

한편 통감부에서는 송병준이 이완용 내각을 와해시키고 내각을 구성하도록 할 것이라는 소문을 돌게 하여 이완용과 송병준 두 사람이 충성 경쟁을 부추기는 전술을 썼다. 이에 놀아난 이완용은 자신의 내각이 붕괴될 것이 두려워 “자신 외에 더 친일적인 내각은 나올 수 없다.”면서 자기 내각만이 합방 조약을 맺을 수 있는 적격자라고 통감부를 설득하였다.

나. 일본은 이런 시나리오를 연출하면서 점차 ‘병합’의 시기가 무르익어가고 있다고 판단, 일진회고문 스기야마 시게마루를 내세우고 이용구·송병준 등을 이용하여 ‘합방청원서’를 만들도록 부추겼던 것이다. 또한 일본 제국은 조약계획이 누출되면 반대소요 등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나남·청진·함흥·대구 등에 주둔한 일본제국군대를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야밤을 틈타 서울로 이동시켰다.

다. 1910년 8월 4일 총리대신 이완용은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에 일본에 유학했던 이인직을 심복 비서로 삼고, 그를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스 미도리에게 보내 합방을 청원하고, 22일에는 이완용이 내각 회의를 소집하여 합병에 반대하는 학부대신 이용직을 회의장에서 쫒아내고 이른바 경술국적이라고 불리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 승녕부총관 조민희 등 8명의 친일파 대신들이 조약 체결에 찬성, 한일 합병 안을 승인하고, 29일에 합방을 공식 발표하게 되었다.

라. 합방 직 후 일본은 조선의 왕족, 유생, 효자 등 89,000명에게 총 3,000만 엔을 풀어먹여 저항치 못하도록 입을 막았다. 그 후 위 8명의 친일 국적에게 일본 귀족의 작위를 수여하였다.

3. 합방조약 내용을 보면, 더욱 치가 떨린다.

가. 조약 전문은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 조항에 기재된 넘겨준다고 지적한 것을 수락하는 동시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 한다.

?제3조?제7조까지 생략.

?제8조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의 결재를 받은 것이니 공포하는 날로부터 이 조약을 실행한다. 이상의 증거로써 두 전권 위원은 본 조약에 이름을 쓰고 조인한다.

위 조약문 제1.2조를 보면 한국임금이 스스로 일본에게 통치권을 넘겨준다고 했고, 일본 황제는 넘겨주는 한국통치권을 마지못해 받은 거럼 되어 있다. 정말 가증한 짓거리다.

나. 또 위 조약은 1910. 8. 22에 조인되었을 뿐 한국황제의 비준이 되지 아니하였는데 한국황제의 결재를 받았다는 제8조의 내용을 보면, 허위임을 증거하고 있다.

이런 조약을 맺게 된 진실을 우리 정치인들과 정부당국이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심히 궁금하다.

4. 대한제국 마지막 임금인 순종황제가 1926년 임종하기 직전 "日韓倂合條約(韓日합방조약)은 무효"라고 선언한 유서를 남긴 사실에 대해 연합뉴스가 1997.11.13에 입력한 기사를 옮겨보면,

서울대 이태진(李泰鎭) 규장각관장은 2010년 8월 13일 "대한제국의 순종황제가 1926년 4월26일 붕어하기 직전 병합조약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므로 파기돼야 한다고 밝힌 유조(遺詔:왕이 백성들에게 유언으로 남기는 조칙)가 신한민보(`新韓民報)의 1926년 7월8일자에 보도된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위 신문은 1907년 도산 안창호 선생(島山 安昌浩) 등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한 교민신문으로 李교수는 남가주대(USC)에서 이 신문의 마이크로필름을 확보했다.

李교수는 순종이 궁내부대신 조정구(趙鼎九)에게 조칙(詔勅. 임금의 명령을 일반에게 알리기위해 받아적은 문서)을 받아 적도록 했으며 지금까지 순종이 이 같은 발언을 했다는 주장이 일부 제기되기는 했으나 유조 형식으로 신문에 보도됐다는 사실은 처음 확인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위 신문은 `순종 황제의 칙유문(勅諭文. 임금의 이름이나 말씀의 포고문) 등 병합조약과 관련된 문서에는 국새(國璽)가 찍혀있지 않고 모든 법령에 들어가는 황제의 친필 서명이 없는 대신 행정적 결재에만 사용한 어새(御璽)가 찍혀 있어 국제법적으로 무효'라고 이전부터 주장해 온 李교수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증거여서 주목해야 한다. (한일 기본조약 제2조의 ‘이미 무효’ 시점이 1910년임을 입증 자료이다)

또 순종은 유소(遺詔)에서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强隣. 이웃의 힘센 나라. 일본을 가리킴)이 역신(逆臣)의 무리(李完用 등을 가리킴)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제멋대로 선포한 것으로 나를 유폐하고 협박하여 한 것"이라고 밝혔다.

순종은 이어 "경(卿. 궁내부대신 조정구를 지칭)에게 위탁하노니 이 조칙을 대외에 선포하여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백성들에게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라고 강조했다.

순종은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어둠 속에서 여러분을 도우리라"라고 덧붙였다. (원한에 사무친 순종의 처절한 외침이다)

한편 李교수는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가 2010년 8월 14일 주최하는 ‘`동아시아에서의 한일관계' 제하의 국제학술대회에서 위와 같은 내용을 학계에 공식 발표한다.

李교수는 "일본 정치지도자들이 병합은 합법적이었다는 `망언을 여전히 되풀이하고 있는 상황에서 순종황제의 공포한 조칙이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고 밝히는 진술이 유조로 확인된 이상 일본 정부는 한국민과 한국정부에 대해 진정한 사과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이 연합신문의 보도 내용이다.

위 조약 주체인 순종황제의 유언 문서가 1910년의 합방조약에 반대하여 자신이 날인하지 아니하였음을 명백하게 증거로 남기고 있음에도 외교 당국은 눈먼 봉사인가 왜 보지 못하며, 아니면 보고도 외면하는 쓸개 없는 멍텅구리인지--. 어찌했건 통분을 금할 수 없다.

라. 한일하방조약의 전문을 보면,

‘한국 황제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는 두 나라 간의 특수하고 친밀한 관계를 회원(回願)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코자 하는 바 -이후생략- .

위에서‘상호 행복을 증진한다’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코자 한다’고 한 말들은 거짓임을 한일합방조약 체결 후 일본이 자행한 한국민에 대한 차별과 착취, 태평양 전쟁 유발 등 일제의 만행과 제국주의적 전쟁 도발을 보더라도 허울 좋은 핑계요 사술임을 증거하고 있다 하겠다.

5. 일본은 한일병합조약의 전권자에 대한 위임장, 조약문, 황제의 조칙 등 형식적인 문서들이 요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합법적이라고 주장하는데 관해 살펴본다.

가. 더욱 중요한 사실은 위 이태진 교수가 근거로 든 1910년 8월 29일 공포된 황제칙유에는 대한국새가 아닌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될 때인 1907년 7월에 일본이 빼앗아간 칙명지보(국가간의 조약에는 국새가 찍혀야 하는데, 칙명지보는 행정결제용 옥새를 말한다.)가 찍혀 있다는 점과 1907년 11월 이후 황제의 조칙문에 날인해온 황제의 서명 ‘척(拓.순종의 이름)’ 자가 빠져 있는 점을 들었다. 당시 순종은 일본 측의 강제병합에 직면해 전권위원위임장에는 국새를 찍고 서명할 수밖에 없었으나 마지막 비준절차에 해당하는 칙유서명은 완강히 거부했다.

나. 2010년 5월 10일,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을 맞아 한국의 대표 지식인 109명은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일본 지식인 105명은 도쿄 일본교육회관에서 각각 기자회견을 열고 ‘한일 병합이 원천무효’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한국병합은 대한제국의 황제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격렬한 항의를 군대의 힘으로 짓누르고 실현한 제국주의 만행이며 불의부정(不義不正)한 행위”로 “조약의 전문(前文)도 거짓이고 본문도 거짓”이라고 밝혔다.

다. 이들은 “조약 체결의 절차와 형식에도 중대한 결점과 결함을 보이고 있으며, 한국병합에 이른 과정이 불의 부당하듯 한국병합조약도 불의부당하다”라고 지적했다.

위 양국 대표들은 한일병합 조약을 애초부터 불법 무효로 해석한 한국정부의 해석이 맞으며, 한국의 독립운동 역시 불법운동이 아니라는 취지의 내용도 포함됐다.

6. 서울대 규장각 관장인 이태진 교수가 지난 1994년 갑오경쟁부터 1910년 한일합병 직전까지 조선의 칙령, 조칙, 법률, 의안 등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1905년 ‘을사조약’‘정미7조약’ 등 각 조약과 식민지 법령들이 고종황제의 인준을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수는 일본 측에 의해 황제의 서명이 위조되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가. 위 1905년의 을사조약의 경우 조선의 박제순 외부대신과 주한 일본공사의 날인만 되어 있을 뿐 당시 통수권자인 고종과 일본국왕의 날인이 없으며, 황제가 조약 체결권을 외부대신에게 위임한다는 위임장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순종황제가 즉위한 1907년 8월 이후 반포된 ‘재무감독국관제’ 등 48건의 칙령에는 순종의 서명이 위조된 것을 밝혔고, 규장각 사료연구부는 순종의 황태자시절 서명과 황제 즉위 후 ‘조칙’ 등에 대한 서명을 일일이 대조한 결과 약 48개의 서명 필체가 다른 것을 발견했다.

나. 1907년에 반포돼 일정시대를 통해 언론통제기능을 했던 ‘신문지법’에는 황제나 황태자의 수결 없이 ‘칙령지보’의 어새만 찍혀 있고, ‘광업법 개정안’은 어새를 먼저 찍은 후 그 위에 문안이 쓰여 있는 등을 보더라도 각 조약과 법령들이 황제의 비준을 거치지 않고 일본과 친일 무리들이 제멋대로 위조한 것이어서 무효라고 주장했다.

다. 위 자료들을 검토한 서울대 국제법 교수 백충현씨는 ‘군주제도 하의 국제조약’은 외부대신에 대한 국왕의 위임장과 국왕 자신의 날인이 필수적인데 을사조약과 정미조약은 국왕의 비준 자체가 없어 국제법상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통감부에 의한 조선의 합방조약과 그 후 조선의 통치는 모두 무효라고 강조했다.

7. 고종황제의 ‘을사늑약 무효’ 친서 발굴하다.

가. 동아일보1993.10.24 자 기사를 보면, ‘을사조약무효’ 란 제하에 서울대학 김기석(사범대교율학과)교수는 하바드대 ‘한국학연구소’에 파견 중 고종황제의 ‘을사늑약 무효’ 친서를 발견했다. 이친서에는

첫째 을사조약이 위협과 강제에 의한 늑약조약이며
둘째 자신이 황제로서 정부에 조약체결을 허가한 적이 없으며
셋째 소위 정부회의는 국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대신들을 가두어 둔 채 이루어진 회의임으로 을사조약은 당연히 불법이며 무효라고 지적했다.

고종황제는 친서에서 “짐은 어떤 경우에도 결단코 이 조약을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그러므로 어떤 나라가 짐이 이 조약을 응낙했다고 주장하는 일이 있더라도 원컨대 믿지도 듣지도 말며 그 것이 근거 없는 말임을 알아주길 바란다.”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다.

고종은 또 “이같은 불의를 네델란드 헤이그 만국공판소의 공판에 붙이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고종은 당시 미국인 교육가 호머 B 헐버트를 특사로 임명 특사 위임장을 주어 이 친서 9통을 작성 열강의 국가 원수들에게 전할 것을 명하였다. 그 후 고종의 강제 퇴위로 결국 각 원수들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이 친서는 컬럼비아대 도서관에 맡겨졌다.

위 김교수는 “이 친서는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문서들 보다 가장 확실하게 을사늑약이 불법이며 무효임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 했다.

서울대 신용하 교수는 “지금까지 국내 학계에서는 고종황제의 친서가 있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그 원본이 발견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고 말했다.

결론

필자는 역사바로 세우기니 민족문제연구소니 친일청산이니 하는 문제를 다루는 식자들이나 단체가 있으면서도 한일기본조약 제 2조를 개정하자는 목소리가 왜 없는지 모르겠다.

일본이 한국의 친일청산 진행과 친일 인명 사전을 만드는 그 간의 여러 행적을 보면서 어떻게 우리를 생각하겠는가 하고, 생각해 본 사람이 있는가.

일본은 원흉이 우리요, 그 원인 제공자는 일본인데 한국에선‘꼬시래기 제 살 뜯어 먹듯’ 싸우고 야단법석을 뜨니 우리를 얼마나 비웃겠는가 생각하니--,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내 얼굴이 부끄러워 달아오른다.

정부는 제발 이번 헌법재판소의 한일청구권 경제협력에 관 한 헌법소원의 인용판결로 위 협정 제2조 1항에 대한 개정을 일본 정부에 재해석을 강력하게 요구 할 때, 기본조약 제2조의 재해석문제를 위 논리와 증거를 바탕으로 총력을 다해 대응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사전에 국어 학자와 한일관계 전문 학자 그리고 국제법 학자들로 구성된 특별전담반을 만들어 기어코 한일간 외교에서 국가 이익과 민족 자존을 세울수 있는 새 외교의 틀을 만들어 주기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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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14-01-30 22:22:42
옳으신 말씀. 저와 생각이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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