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쫒는 야생마 [시대극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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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쫒는 야생마 [시대극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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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 일제의 정치와 한국지배 과정 얘기

정치풍자 희곡 '정치괴물'의 연재가 끝나 광복 기념일을 맞은 지금, 반세기를 훨신 넘긴 1945년 전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연재 물을 띄워 본다.


[시대극1] ‘태양’을 쫒는 야생마


작품기흭 의도

얼마 전 정부가 8.15 행사를 '건국60주년' 이란 타이틀 아래 치르자 일부 층에서 반대의 논리를 펴며 ‘광복절’ 로 환원하여야 한다고 물의를 일으킨바가 있다.

반대하는 세력들은 집권 정부를 향해 친일파라 몰아새우며, --현 집권층이 민족의 최대 기념일인 광복절을 건국절로 개칭하고자 하는 이유는 '광복'을 앞세울 때 친일파는 영원한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 되지만 '건국'을 내세운다면 그들은 건국과 근대화의 주축세력으로 포장되어 정당성을 부여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매도하며, 아직까지도 민족 절반에 불과한 정부를 온전한 '건국'이라고 치부하는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라고 반론을 펴고 있다.

이런 때 본인은 첫 작품 본 희곡 1부를 쓰면서, 『반세기를 훌쩍 넘긴 오늘까지, 내가 밟고 다져온 이 땅, 내가 속한 이 체제가 온전한 내 나라가 아니라면, 내 나라는 언제 건국 될 것이며, 지금 나는 나라 없는 백성인가』 라고 질문부터 먼저 던져 본다.


작품의 성격

이 희곡은 레제드라마 형식이다. 동시에 무대 공연을 가능하게 썼다.

해방을 전후하여 6.25동란 직후까지 한 반도에서 일어난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대구와 합천의 인물 몇몇이 벌이는 우정과 사랑 그리고 항일과 좌우 갈등으로 점철된 삶의 흔적을 그려낼 연작 중 첫 번째(1부) 창작물이다.


시대배경

일본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는 1937년에서 1939년까지 제 34대 총리를 거쳐, 뒤이은 히로누마 기이치로(35대), 아베노 부유키(36대), 요나이 미쓰마사(37대)총리를 건너 그 다음 1940년에 제38대, 제39대 총리직을 중임한 후, 1941년에 태평양 전쟁 주범 도조 히데키에게 정권을 물려주었다.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는 1891년 10월 12일 도쿄(東京)에서 출생하였다. 1917년 교토대학교 법과를 졸업한 후 내무성(內務省)에 들어갔다. 1920년 귀족원(貴族院) 의원이 되었고 1933년 귀족원 의장이 되었다.

 

그는 평화주의자 총리였지만 군부의 농간에 의해 중일전쟁에 휘말렸으나 중국과 화평을 추구하고 대미(對美) 평화 교섭을 시도했다. 1941년 10월엔 대미 강경론자인 외무장관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를 경질하고 제3차 내각을 조직하였으나 희망을 걸고 있던 대미교섭이 군부의 독주(獨走)로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자 총리직을 사임하고 도조 히데키에게 정권을 넘겼다.

한편 식민지 조선에서는 1936년, 제 7대 조선총독(1936~1941)에 일본의 군 출신 정치인인 미나미 지로가 착임하여 재임 6년 동안, 일본어 상용, 창씨개명(創氏改名), 지원병제도 등을 실시하여 한민족문화 말살정책을 강행하였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 정부는 전쟁물자 수급에 필요한 금 수요가 더욱 절실해지자 마침내 미나미 총독은 1938년 1월4일 ‘조선총독부령 제2호’ 를 공고하여 9금 이상을 사용한 금지환, 금비녀 제품 및 금실, 금박, 금가루, 금액(金液) 등의 제조를 일체 금했고, 8월 20일에는 ‘금사용전면금지령’을 내리고 금을 정부책정 가격으로 강제로 매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금재금(金再禁)조치가 실시되자 조선에서는 이때부터 금 밀매 및 투기시대로 접어든다.

이에 앞서 구식이가 유소년에서 대담한 청소년으로 성장하든 전 후시기의 조선 사회경제의 배경을 살펴보면, 일제가 조선을 점령하자, 일본이 절실히 필요한 미곡의 부족분은 대부분 조선에서 충당하고 그 나머지를 국내에서 소비하였다. 그래서 일제 당국에서는 1920년대 초에 인천을 필두로 부산, 군산, 대구 등지에 미두취인소(미두장)를 설치하여 미곡의 원활한 수집과 품질.가격의 표준화, 그리고 미곡개량 화를 촉진하여 양질의 미곡을 대량 일본에 수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런 순기능을 목표로 한 미두장이 차츰 차츰 투기의 현장으로 변하여 쌀의 현물거래와는 직접적 관련이 없이 청산 거래방식을 통한 ‘결재의 권리’ 만을 파고 사는 투기시장이 되어 십여 년이 흘렀다. 그러다 1937년경에 쌀이 전시통제물자로 바뀌게 되자 미두장 투기는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고, 대신 전쟁물자와 군수공장의 신설 및 확장을 위해 금 수요가 절실해져 일제가 금확대정책을 펴자 조선의 시중에서는 금 투기현상이 일어났다.

 

마침내 조선 총독부는 1938년 1월 4일‘총독부령 제2호’를 공포하여‘9금 이상을 사용한 금제품의 제조와 금실, 금박, 금가루, 금액 등의 제조를 금지하였다. 그러나 통제경제란 인위적으로 묶어두는 것임으로 시중에서는 더욱더 은밀한 암거래 시장이 활성화 되어 통제 이전의 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암거래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이에 총독부는 금을 일체 사용할 수 없는 금사용금지 조치를 내리게 되었다.

당시 국책홍보용으로 신문과 잡지에 게재된 기사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전략’--금사용금지로 전국에서 모은 금의 액수는 2천만원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런 소액 절약으로는 국가 목표한 금 확보량에 턱없이 부족하므로 부득이 3억 내지 5억원으로 추정되는 민간인의 퇴장금(退藏金)을 강제로 매상하는 것이 좋다는 설이 제기되는 중이다. 이것이 설에 그치지 않고 실현될지 모른다. 그 때 강제로 매상 당하는 것 보다 지금 선선히 팔아버리는 것이 어떨까.

 

이제 금에 대한 관념을 고칠 때가 왔다--. 이런 언론을 통한 협박성 경고가 시민에게는 무상 공출로 와전되어 밀거래가 더욱 심해졌다. 이에 민간인은 금을 제값에 파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했고, 일선에 매입자 역은 전국각지를 떠도는 기존의 방물장수가 암암리에 담당했던 것이다.

또 일제는 조선에서 금의 확보를 위해 ‘금탐광장려금제도’ 와 ‘저품위금광석매광장려금’ 제도를 실행하여 금광개발에 드는 초기 비용을 수익성을 따지지 않고 보조하고, 광산에서 생산한 금광석을 조선의 재련업자에게 팔 경우 광업권자와 제련업자 모두에게 일정한 장려금을 지원하도록 했다. 그래서 일본의 미쓰비시, 노구이, 미쓰이 등 대재벌이 조선의 금광개발에 뛰어들었고, 당연히 조선의 제 광공업 경기가 활성화 된 것도 사실이었다.

이런 차에 미나미지로(南次郞) 총독은 경성의 일부 조선인 상류 가정의 부녀자들을 모아 애국금차회(愛國金次會)라는 의용 단체를 조직하여 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금비녀와 금반지 등을 헌납토록 하는 운동을 전개시켰다. 애국금차회는 미나미총리가 설립한 민간 어용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협력을 얻어 전국적으로 확대해 나갔다.

미나미 총독은 그에 거치지 않고, 식민지 조선을 대륙 및 동남아 침공의 군수품 조달 및 노동력동원기지로 만들기 위해 종전의 ‘내선융화’를 '내선일체' 정책으로 전환시키고, 어용학자들을 동원하여 ‘내선동조동근론’(內鮮同祖同根論,일본.조선은 같은 조상)을 조작하여 일본인의 시조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신위를 가정마다 모셔야한다는 ‘한민족 혼’ 말살정책까지 폈다.

 

이 무렵 일제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대(對)아시아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한 슬로건 아래 일본인과 조선의 지식인으로 구성된 ‘녹기연맹’을 창설하여 식민지 조선의 대중에게 황민화와 내선일체를 선동하는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그 결과 1940년까지 반도 지역에 징용,징병으로 동원된 조선의 인력이 260여 만 명이 되었고, 일본 및 점령지역에 동원된 인력이 72만 명에 이르렀다. 드디어 일제의 도조 히데키 총리가 1941년 12월에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미나미 지로 후임으로 부임한 고이소 구니아키는 조선 8대 총독으로 그는 일본의 군인이며 정치가로, 우쓰노미야(宇都宮)에서 태어나, 1900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러일전쟁에 종군하였다. 그리고 1916년 참모본부 부원, 1932년 육군차관을 거쳐 육군대장을 지내다가, 조선군사령관을 거쳐 조선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고이소 총독은 재임기간 중인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을 조작하여 독립지사를 검거하는 한편, 조선청년특별연성령(朝鮮靑年特別鍊成令)을 공포, 17∼21세의 청년에게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1943년 8월에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수많은 청년들을 죽음의 전장으로 붙잡아 갔다.

이것도 부족하여, 그는 11월 학도병 지원제를 실시하여 많은 학생들을 전쟁터로 끌고 갔을 뿐만 아니라, 1944년 8월에는 학도동원본부 규정을 공포하고,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4학년 이상에서 대학생까지 동원체제를 확립하여 조선인에게 불행과 고통을 안겨준 것이다.

 

그는 전쟁 주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이 붕괴한 뒤 1944년 총리로 임명되어 제2차 세계대전을 이끌었으며, 1945년 전쟁에서 패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국제전쟁재판소에 기소되어 A급 전범자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하였습니다.



다음 [시대극2]로 이어짐

무대 - 대구달성공원 앞
<한국학생과 일본 학생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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