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와 1905년의 명암 (극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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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와 1905년의 명암 (극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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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일전쟁 때 재미 본 일본의 해군 기지 독도

일본 국회의원 몇사람이 독도가 자기들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직접 방문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이때, 우리 국민은 독도와 관련한 한.일 관계의 역사를 다시 들추어 봐야 할 책임이 있다.

본인은 <극일> 시리즈로 한.일 역사를 엮어 뒤돌아 보고자 한다.

[극일 1]

‘독도’와 한말 1905년 (1편)

지금은 2011년이다. 지금부터 106년을 거슬려 올라가면 1905년 된다.

1905년 3월 당시에 대한제국의 총 인구수는 약 2천만 명으로 추정한다. 그 때 생존하였던 우리들의 선대(先代)들은 이미 다 고인이 되어버렸고 살아계신 분이 있다 해도, 지금 백세를 넘기신 어르신들이고 그 당시에는 갓 태어난 애기였을 것은 두말할 것 없다.

이런 1세기 전 선대들이 당시인 1905년 2월 15일에 일본 내무성이 한국 영토인 독도를 다케시마로 개칭하여 일본 소유로 강제 편입한 사실에 관하여 알 리가 만무하다.

그 때를 돌이켜보면, 러시아는 해외식민지 개척에 필요한 태평양 쪽의 부동항이 필요하여 동해에 눈을 돌렸다. 당연히 동해를 끼고 있는 조선 정부에 접근하게 된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일본의 북진 정책과 대결을 피할 수 없었고, 이에 대응하여 일본은 마침내 1904년 2월 러시아 함대가 정박하고 있던 뤼순항을 기습공격 하여 두 나라는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조선정부에 영향력이 컸던 일본은 유리하게 전쟁을 벌이면서 한해를 넘기고, 1905년 2월에 독도를 강점한 후 해군기지로 삼았고, 8월 19일에는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고 동해에 침투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하여 전승의 기회를 잡았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는 당시 조선의 대부분 백성들은 더더욱 몰랐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 이후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일본은 1905년의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과 재정권을 사실상 지배하고, 드디어 1910년 강압에 의한 한일합방으로 조선을 식민지화 하는데 성공하였다.

우리는 그 때부터 40여년 뒤인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국에 패함으로서 강점되었던 독도의 영유권을 되찾게 되었는데 이를 살펴보면, 일본천황으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아 낸 연합군 최고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이 1946년 1월29일 훈령을 통해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시켰던 확실한 기록이 있고, 또 1952년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설명서와 함께 올린 지도에 보면, 분명하게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고 표기해 두었음도 이를 입증한다.

그럼에도 일본은 패전 후 반세기가 흘러가자, 또다시 독도 침탈의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마침내 일본의 중앙 정부가 아닌 지방 자치정부인 시마네 현 의회를 통해 매년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한다는 조례를 통과 시켰다.

시마네 현 의회가 일본 정부를 대신하여 다케시마를 일본 영토라고 총대를 메고 나선 과정을 살펴보면, 위서 지적한 바대로 1905년 2월 22일에 중앙정부 내무성이 독도를 시마네 현에 강제 편입하자, 뒤이어 위 현이 다음 달 3월 26일, 현청 게시판에 『독도의 명칭을 다케시마로 하고 오키 섬의 관할로 정한다』는 내용의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를 공표한 바가 있었는데, 그 발표 일의 1백주년을 기념한다는 형식을 통해 매년 2월 22일을「다케시마의 날」로 정하여 그 들의 속내를 덜어내었다.

이렇게 중앙 정부가 일개 자치단체인 시마네 현을 이용하여 독도 소유권을 주장하도록 함으로서 독도 소유권을 더욱 구체화 시키고, 중앙정부는 뒤에서 조종하는 간교함을 보이고 있다.

일본의 행정구조는 자치제이다. 광역자치단체로는 1도(都) 1도(道) 2부(俯) 43현(縣)으로 되어 있고, 기초단체로 3000여개가 넘은 시,정,촌이 있다. 시마네 현은 광역 단체의 하나이다. 일본 중앙정부가 자치단체가 자율적으로 정한 조례를 간섭 할 수 없다는 견해를 보임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민의 전쟁 피해자 보상청구 재판에서 일 최고 재판소가 기각판결 하는 국가적 조치 등과는 구별된다.

이를 보더라도 독도문제는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 정부가 담당하도록 하여, 한국정부와 자국의 지방정부가 이전투구 하도록 유인하여 국제적 웃음거리로 만들고, 한국 민의 자존심에 타격을 주겠다는 속셈임을 읽을 수 있었다. 만약의 경우 일이 꼬일 때, 중앙정부는 발뺌할 수 있다는 계산을 깔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자명하다. 독도 영유권 주장은 실효 지배로 끝나는 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는 데서 완성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수 년 전, 어느 5월 일본 내 최고 독도 전문가 중의 한 명인 나이토 세이추 시마네대학 명예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다케시마가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일본 외무성 주장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나 근거가 없다”면서도 “그렇다고 한국 영토라고 하는 결정적인 증거도 없다”고 말했다. 그의 표현은 심정적으로 한국 영토인 것 같지만, 한국 영토임을 국제적으로 입증받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와 사료 발굴이 필요하다는 지적인 것이다.

일본 정부가 중학교 교과서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을 명기한 데 이어 미국 지명위원회(BGN)가 독도를 한때 ‘주권 미지정 지역’으로 규정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온 나라가 들끓은 때도 있었다. 독도의 역사적·안보적·경제적 가치는 물론 한·일 민족감정까지 겹쳐 우리 국민의 분노가 용광로의 쇳물처럼 끓어오르는 것이다.

지금 일본 의원이 독도를 방문한다는 사실적 상황을 맞게 된 우리는 국가 차원의 고차원적 대응책으로 국교 단절의 경우까지도 뛰어 넘는 대응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세계적 대 역사가인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와 어머니 되는 지구’란 책에서 「과거의 기록인 역사가 남아서 존재하는 한 그 기록된 사건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불변의 과거가 언제 어느 곳에서나 동일한 외관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시간과 장소가 달라지면 그 모습은 달라진다. 사건에 대한 정보의 증감에 따라 그 모습이 바뀔 수도 있다.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의 피차(彼此)관계, 상대성과 중요성, 그리고 그 의의에 대한 우리의 견해 차이에 따라 그 외양은 계속 변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돌이켜 보면, 독도는 광복 이후 반세기를 넘기도록 실효적으로 점유하고 있으니 일본이 아무리 꾐수를 부리더라도 우리의 것이라고 방심하고 있다가, 이번에 곤욕을 치루지 아니하였는가.

우리는 일본과의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제 문제에서 국익우선이란 정책에 매달리다 보니 100년 전 일제의 침탈 과정 그리고 합방 후에 36년간에 걸친 핍박과 착취 등 에 대한 치욕의 역사를 서서히 망각하면서 일본을 향한 자존과 긍지도 퇴색하여 반 체념의 상태에 도달하여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일 간 우호증진 정책, 욘사마, 아이돌 등 한류 열풍, 6자회담의 공조 등 새로운 이웃으로 변모해 가는 듯한 문화 외교 통상의 흐름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독도문제로 우리는 일본의 참 모습을 재발견한 이상 일세기 전으로부터 광복, 그리고 광복 후 지금까지의 대 일본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들추어 되돌아보고 새로운 시각 새로운 인식을 다져 재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인류가 그 이상(理想)을 향하여 걸어 온 긴 시간의 결과물이다. 현재는 과거에서 걸어온 도달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를 제일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 올바른 이해는 미래의 행동지침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한없이 미래로 계속되는 것뿐만 아니라, 긴 시간을 포함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즉 현재는 과거의 계속이요, 미래는 현재의 연장이다.

우리는 일본과의 긴 악연 가운데서 독도영유권이 강제로 일본에 편입될 당시인 1905년을 전후한 구한말 당시 국권을 침탈하고 병합하기 위해 취하여 온 파렴치한 일본의 참 모습의 사례(역사적 기록사실)들을 하나하나 들추어 살펴봐야한다.

1905년 당시 한국 조정과 한민족에게는 사실 독도의 일본 편입문제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고, 또 국가적 차원에서도 국권의 침몰이 경각에 달려있는 판에 조그마한 돌섬 무인도인 독도의 소유권은 문제는 큰 국가 대사가 아니었음을 역사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1905년을 전후하여 일본은 조선의 강토를 빼앗고 국권을 찬탈하기위해 조정 대신들을 회유내지 협박하고, 왕실에 가한 모욕과 궁박들에 관하여 이번 기회를 통하여 만사를 제쳐놓고라도 곱씹어 보지 않을 수 없다.

다음 [극일2] 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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