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원이 그날 5월 18일 오후 한시경 금남로에 약 300명의 시위대를 불러모았으나 도무지 시위 열기가 일지 않았다. 학생들은 박관현 학생회장도 없는데 모인 목적을 모르겠다며 해산하려 하였을 때 누군가가 "경찰이 박관현을 죽였다"고 외쳤다. 그 소리에 인근 행인들이 자극되어 금방 시위대 수가 3천명으로 불어나 파출서들을 파괴하기 시작하였으며, "박관현 사망설"이 퍼져나갈수록 시위대 수는 크게 불어났다. 첫날에는 화염병과 돌만 던지던 시위대가 다음날부터 무장하기 시작하여 시민군이 편성되었는데, 광주사태 내내 시민군은 "박관현 사망설"을 사실로 여기고 있었으며, 시민을 선동 자극하는 또 다른 악성 유언비어들이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지금 두 달이 넘도록 계속되는 광우병 괴담 폭동과 비교하면 광주사태가 얼마나 빠르게 진행되었는지 아래 사진을 보라. 5월 18일 시위대의 시위장비는 주로 화염병과 돌이었다. 그런데 사흘 만에 아래 사진처럼 중무장하고 도청을 향해 돌격하는 시민군이 등장했던 것이다.
인터넷 영상 매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광우병 괴담 폭동은 좌익과 우익 양편에서 사진 찍고 동영샹 올리면서 과격시위냐 강경진압이냐를 따진다. 그러나, 광주사태 때는 시민군 편에서만 사진을 찍었으며, 시민군쪽에 불리한 사진은 압수하였기에 군인이 애매한 누명을 써왔다. 그러나 한 사진 작가가 포착한 아래 장면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