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3년 6월 24일 하성절사(賀聖節使)인 판3사사(判三司事) 윤호(尹虎)가 금암역(金巖驛)에서 졸(卒)하였다. 부고(訃告)가 들리니 태조 이단이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게 하였다. 윤호의 자는 중문(仲文)이니 파평군(坡平君) 윤해(尹侅)의 아들이다. 천성이 정직하고 글씨를 조금 잘 썼다. 일찍이 공민왕대에 벼슬하였는데, 공민왕이 그와 더불어 바둑인 위기(圍棋)를 두니, 윤호는 이기지 아니하였다. 1398년 1월 15일 간관(諫官)이 중추(中樞) 류운(柳雲)·정용수(鄭龍壽) 등을 탄핵하였으니, 류운과 정용수가 상의문하(商議 門下) 도흥(都興), 중추(中樞) 김승(金陞)·이인수(李仁壽), 학사(學士) 조화(趙禾), 한성 윤(漢城 尹) 신효창(申孝昌)·송전(宋㙉) 등과 더불어 도당(都堂)에 앉았다가 가만히 옆방 익실(翼室)로 나가서 바둑인 저기(著碁)를 두어 희롱하였기 때문이었다.
1404년 9월 23일 태종이 상호군(上護軍) 권희달(權希達)을 파면시켰다. 처음에 권희달이 총제(摠制) 이밀(李密)과 더불어 바둑 박혁(博奕)을 두는 것으로 인하여, 영승추부사(領承樞府事) 조영무(趙英茂)의 곁에서 무례하게 구니, 조영무가 노하여 이밀의 종리(從吏)를 가두고, 권희달에게 베 1백 필을 징수하였다. 1406(태종 6)년 윤7월 22일 이저(李佇)와 그 아우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이 바둑 위기(圍棋)를 두면서 즐거워하였다. 1408년 9월 15일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가 죽었다. 민제(閔霽)는 날마다 바둑판 기국(碁局)과 더불어 스스로 즐기고, 시(詩)를 잘 평론하였다. 1413년 1월 27일 태종은 이르기를 “전 개성 유후(開城 留後) 류담(柳湛)은 곧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의 바둑 벗 기붕(碁朋)이다.” 하였다.



1413년 6월 7일 내관(內官) 송지도(宋之道)·약방 의원(藥房 醫員) 이헌(李軒)을 순금사(巡禁司)에 내렸다가 3일만에 석방하니, 송지도와 이헌이 창덕궁(昌德宮)에서 장기 바둑인 박혁(博奕)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1416(태종 16)년 9월 19일 세자(世子)가 흥덕사(興德寺)에 가서 신의 왕후(神懿王后) 기신(忌晨)에 소향(燒香)하고 나서 바둑 두는 기자(碁者) 2,3인을 불러서 바둑 위기(圍棋)를 두었다. 1420년 윤1월 11일 세종이 교지를 내리기를, “판광주목사(判廣州牧事) 문계종(文繼宗)과 판관(判官) 김경(金俓)이 두 번이나 양녕(讓寧)에게 나가 놀기를 청하여, 술을 마시며 활쏘기·고기잡는 포어(捕魚)·장기와 바둑인 박혁(博奕)하며 놀았으니, 그런 거동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할 직책에 있으면서 도리어 함께 놀이를 하였음은 다만 대체를 돌아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탁한 취지에 어긋나는 것이다.”하였다.
1444년 7월 23일 세종이 화의 영(和義 令) 이영(李瓔)이 황양(黃良)·강처정(姜處貞)·우지(牛知) 등 간사한 소인(小人)의 무리들을 불러 들여 윷놀이 사희(柶戲)를 하고 바둑인 위기(圍棊)를 두며, 거문고를 타는 탄금(彈琴)하고 노래 부르며 춤추는 가무(歌舞)하는 것을 발각하여 황양 등은 의금부(義禁府)에 내려 중죄인을 국청(鞫廳)에서 신문하는 국문(鞫問)하고 이영의 관직을 임명할 때 주는 임명장인 고신(告身)을 회수하였으며 황양 등은 모두 군역(軍役)에 충용(充用)하였다. 1465년 6월 5일 영의정(領議政) 신숙주(申叔舟)·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좌의정 구치관(具致寬)·우의정 황수신(黃守身)·좌참찬(左參贊) 최항(崔恒). 육전청 당상(六典廳 堂上)과 승지(承旨) 등을 불러, 내구마(內廐馬) 3필(匹)로 내기 밑천을 삼고, 입시(入侍)한 재추(宰樞)로 하여금 국희(局戲)를 하게 하니, 신숙주·한명회·구치관 등이 노름을 잘하였다. 또 황수신·최항에게도 말 1필(匹)씩을 내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