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2년 2월 25일 말을 기르는 구목(驅牧)이 산을 감시하는데 한 마리의 큰 멧돼지가 화살에 맞고도 포위망을 뚫고 나와서 임금이 거둥 시에 타는 내구마(內廏馬)를 들이받아 죽게 하였다. 궁중 말과 가마를 관장하는 사복 제조(司僕 提調) 최윤덕·정연 등이 아뢰기를, “여러 관원들이 조심하여 간수하지 않아서 내구마를 죽게 만들었으니, 그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뜻밖에 생긴 일이니 어찌 큰 멧돼지가 꼭 이 말에게 달려와서 부딪힐 줄을 알았겠느냐. 그 일은 거론(擧論)하지 말라.”하였다. 1502년 11월 14일 10대 국왕 연조(연산군:묘호 추상)가 몰래 내관(內官) 무리들을 시켜 나가서 멧돼지를 사냥하여 그 것을 앞뒤에서 어깨에 메는 가마인 견여(肩輿)에 싣고 보자기로 덮어 후원(後苑)의 담을 넘어 대내(大內)로 들여보내게 하고, 바깥 사람들에게는 이를 모르게 하였다.
1518년 1월 27일 영사(領事) 정광필(鄭光弼)이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예종의 비 장순왕후(章順王后)의 단릉(單陵)인 공릉(恭陵) 위를 멧돼지가 파헤쳤다 하오니, 매우 놀랍습니다. 먼저 사유를 고하는 제사를 지내는 일은 으레 행해야 하는 것이므로 지금 관원을 보내어 별도로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수축(修築)한다 하더라도 만일 또다시 그렇게 되면 역시 소용이 없을 것이니, 반드시 그 짐승을 몰아낸 뒤에 함이 옳습니다.”하니, 중종이 이르기를, “대신이 가서 살펴본 뒤에 처리해야 한다. 비록 멧돼지의 소행이라 하더라도 실은 재앙이 되는 괴이한 재이(災異)이다. 사직제(社稷祭) 날이 임박하여 친제(親祭)하기가 어려울 듯하니, 관원을 보내 제사지내는 것이 옳겠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