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릉비(廣開土太王陵碑)의 입비(立碑) 목적은 '於(是:山陵)立碑 銘記勳積 以示後世 어시(광개토태왕릉)입비 명기훈적 이시후세' 로서 광개토태왕릉(廣開土太王陵)에 비석을 세워 광개토태왕의 훈적(勳積)을 명기(銘記)하여 이를 후세에 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광개토태왕릉비(廣開土太王陵碑) 능비문(陵碑文)의 훈적(勳積)을 명기(銘記)한 문장의 주어는 당연히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이며 굳이 능비문(陵碑文)의 매 문장마다 명기(銘記)할 필요가 없다. 고구려(高句麗)가 배반한 백제(百濟)를 적대시하여 낮춰 부르는 백잔(百殘)의 비칭(卑稱))에서 고구려의 백제에 대한 적대적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高句麗)에 속하는 옛 백성이었으나 배반하여 조공(朝貢)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역학관계의 변화를 확인할 수있고 고구려의 향후 백제에 대한 강경정책을 예상할 수 있다. 백제(百濟)의 국력이 강성해져 고구려(高句麗)에 조공하지 않고 강성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왜(倭:일본)를 제후국으로 삼았고 고구려는 옛 날 조공(朝貢)해오다가 배반하여 조공(朝貢)하지 않는 백제를 괘씸죄를 적용해 응징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의 고구려 국왕 즉위 후 백잔(百殘:백제)의 제후국 왜(倭:일본)가 백제(百濟)에 조공(朝貢)하러 신묘년(辛卯年:391년)에 바다를 건너오자 백제와 왜(倭:일본)에 대한 응징을 단단히 벼르고 있던 왕(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이 기다렸다는 듯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백잔(百殘:백제)과 백제(百濟)에 조공(朝貢)하러 바다를 건너온 왜(倭:일본)를 격파(고구려를 배반한 백제 응징이 목적)하여 응징하고 상대적으로 적대시하지 않은 신라는 다시 신민으로 삼았다.

광개토태왕릉비(廣開土太王陵碑) 능비문(陵碑文)의 신묘년(辛卯年) 기사는 '百殘新羅 舊是(高句麗)屬民 (中叛不貢). / 由來朝貢(於百殘)而 倭以辛卯年來渡海 / 王破百殘與倭 新羅以爲臣民 백잔신라 구시(고구려)속민(중반불공). / 유래조공(어백잔)이 왜이신묘년내도해 / 왕파백잔여왜 신라이위신민' 이다. '百殘新羅舊是(高句麗)屬民 (中叛不貢). / 由來朝貢(於百殘)而 倭以辛卯年來渡海 / 王破百殘與倭 新羅以爲臣民' 의 신묘년(辛卯年) 기사는 일제가 일본에 유리하게 악의적으로 잘못 띄어읽고 해석한 능비문(陵碑文)의 문장을 올바로 띄어읽고 해석하여야 하며 일본에 불리한 '王破百殘與倭 新羅以爲臣民' 의 '與倭 新' 은 일제가 고의로 지운 것이다.백잔(百殘:고구려가 배반한 백제(百濟)를 적대시하여 낮춰 부르는 비칭(卑稱))과 신라는 (고구려(高句麗))에 속하는 옛 백성이었으나 배반하여 조공(朝貢)하지 않았다. 백잔(百殘)이 고구려의 백제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배반하여 조공(朝貢)하지 않았고 왜를 제후국으로 삼아 조공받았으며 고구려가 백제 응징을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는 것은 능비문(陵碑文)에 명기(銘記)하지 않았으나 문맥의 흐름을 보면 알 수 있다. 중반불공(中叛不貢)이 삼국의 역학관계의 변화를 확인시켜주고 고구려의 향후 대 백제 강경정책을 예상할 수 있다. 백제(百濟)는 국력이 강성해져 고구려(高句麗)에 조공하지 않고 강성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왜(倭:일본)를 제후국으로 삼아 조공을 받았고 고구려는 배반한 백제를 괘씸죄를 적용하여 응징하려 하였다. 백잔(百殘:백제)의 제후국 왜(倭:일본)가 백제(百濟)에 조공(朝貢)하러 신묘년(辛卯年:391년)에 바다를 건너오자 배반한 백제와 왜(倭:일본)를 응징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던 왕(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이 기다렸다는 듯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백잔(百殘:백제)과 백제(百濟)에 조공(朝貢)하러 바다를 건너온 왜(倭:일본)를 격파(고구려를 배반한 백제(百濟) 응징이 목적)하였고 (상대적으로 적대시하지 않은) 신라는 다시 신민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