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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대한국 침략의 상징인 벚꽃을 뽑아 불태워야
 김민수_
 2013-04-10 09:05:23  |   조회: 5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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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대한국 침략의 상징인 벚꽃을 뽑아 불태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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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벚꽃이 피는 우리나라 왕벚나무는 궁(宮), 묘(廟), 전(殿), 단(壇), 능(陵)에는 심지 않았던 제주도에 자생하는 화목(花木)이다.1453년 5월 12일 의정부에서 “한성(漢城)과 지방의 큰 길의 좌우에 흙의 알맞은 데에 따라서 소나무·잣나무·배나무·밤나무·느티나무·버드나무 등의 나무를 많이 심고서 그 것을 벌목(伐木)하는 것을 금지하소서.” 아뢰니 단종이 그대로 따랐다. 대한시대 대한광복운동기인 1913년 4월 7일 요시노 다자에몽(1906년 9월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부 기관지로 창간 후 1910년 일제 총독부 기관지로 변경된 일본어로 발행되는 친일 신문사 사장)이 일본 벚꽃나무 500그루를 창덕궁 상림원(上林苑)에 심었고 1986년 여의도 국회 앞에 옮겨 심은 일제의 대한국 침략의 상징인 벚꽃나무를 뽑아 불태워야 한다. 창덕궁(昌德宮) 돈화문(敦化門) 안에는 괴목(槐木)인 느티나무,회화나무를, 대조전(大造殿) 앞에는 소나무,단풍나무를, 상림원(上林苑)의 부용지(芙蓉池)에는 소나무,연꽃을, 주합루 어수문 옆에는 버들고리,패랭이꽃,범부채를, 연경당(演慶堂)에는 배나무를, 승화루(承華樓)에는 배나무,감나무를, 폄우사(砭愚榭)에는 은행나무를 심었다. 후원(後苑) 상림원(上林苑)에는 뽕나무,때죽나무,팥배나무,느티나무,주목,회화나무,참나무,음나무,다래나무,향나무,살구나무,밤나무,주엽나무,앵두나무,상수리나무,복숭아나무,철쭉,진달래를 심었다. 1484년 10월 16일 성종이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와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를 위해 궁장 밖에서 바라보이는 것을 가려 막고자 창경궁(昌慶宮)에 버드나무를 심었다. 경복궁(景福宮) 광화문(光化門) 안과 궐내각사(闕內各司) 앞에는 괴목(槐木)인 느티나무,회화나무를 심었다. 주(周)나라가 괴목(槐木) 아래에서 삼공(三公)이 앉아 정사를 보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하며 왕궁의 별칭이 괴신(槐宸),정승의 직위를 괴위(槐位)라고 한다. 경회루 북편 후원(後苑) 상림원(上林苑)에는 홍도(紅桃),옥매화(玉梅花),출단화(黜壇花)를, 향원지(香園池)에는 배나무,소나무,느티나무,회화나무,산사나무,버드나무,참나무,단풍나무를 심었다. 아미산(峨嵋山) 화계(花階)의 아래에는 매화, 모란, 반송, 철쭉, 앵두나무를 위에는 소나무, 느티나무, 살구나무를 심었다. 대한국 황실 사당인 태묘(太廟)에는 느티나무,참나무,소나무,단풍나무,서어나무,버드나무,향나무를 심었으며 사직단(社稷壇)의 단(壇) 주위는 담장 유(壝)를 설치하여 신성시했고 유(壝) 안에는 수목을 심지 않고 유(壝) 외곽에는 느티나무,참나무,향나무를 심었다. 선농단(先農壇)에는 향나무,소나무를 선잠단(先蠶壇),경복궁,창덕궁,연희궁(衍禧宮),아차산(峨嵯山),낙천정(樂天亭)의 잠실(蠶室),율도(栗島), 관아 담장 아래와 밭에는 뽕나무를 심었고 우사단(雩祀壇),산천단(山川壇)에는 소나무를, 영희전(永禧殿) 동쪽 담장 안에 버드나무를, 조선국 왕릉과 대한국 황제릉의 능역(陵域)에는 소나무,잣나무,밤나무,전나무,버드나무를 심었다.













1393년 3월 24일 벌레가 송악(松嶽)의 소나무를 갉아먹었다. 1398년 4월 16일 태조가 경복궁(景福宮) 좌강(左岡)의 솔이 마르므로, 그 가까이 있는 인가(人家)를 철거할 것을 명령하였다.1404년 8월 16일 오얏나무·살구나무·능금나무에 꽃이 피었다.1405년 10월 3일 행주(幸州)의 사과(능금)나무인 임금(林檎)이 다시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었다.1407년 4월 7일 각도의 수령에게 명하여 정월에 소나무를 심게 하였다. 충청도(忠淸道) 경차관(敬差官) 한옹(韓雍)이 상언(上言)하기를, “근래에 병선(兵船)을 만드는 일로 인하여 소나무가 거의 다 되었으니, 비옵건대, 각도(各道)의 각관(各官)으로 하여금 소나무가 성장(成長)할 수 있는 산에 불을 금하고, 벌채(伐採)를 금하며, 매양 정월에 수령이 친히 감독하여 소나무를 심게 하소서.”하니, 태종이 그대로 따랐다.1408년 9월 15일 한성(漢城) 안 민가(民家)에 자두(오얏)나무,복숭아나무에 모두 꽃이 피었다. 11월 26일 태종이 상왕(上王)과 더불어 건원릉(健元陵)에 나가 동지제(冬至祭)를 행하니, 각사(各司)에서 한 관원(官員)씩 호종(扈從)하였다. 상왕이 초헌(初獻), 주상(主上)이 아헌(亞獻),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윤(河崙)이 종헌(終獻)하였다. 제사를 마치고 능 옆에 올라 산세(山勢)를 두루 보고, 임금이 공조 판서(工曹 判書) 박자청(朴子靑)에게 “능침(陵寢)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없는 것은 예전 법이 아니다. 잡풀을 베어버리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두루 심으라.”일렀다.

















1409년 1월 18일 태종이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능인 건원릉(建元陵)에 소나무를 심도록 명하였다. 3월 1일 태종이 궁원(宮園)에 뽕나무를 심도록 명하였다. 1410년 1월 3일 창덕궁(昌德宮)과 건원릉(健元陵)에 소나무를 심으라고 명하였다.1411년 1월 7일 공조 판서 박자청(朴子靑)을 한경(漢京)에 보내어 각령의 대장(隊長)·대부(隊副) 5백 명씩과 경기(京畿)의 정부(丁夫) 3천 명을 데리고 남산(南山)과 태평관(太平館)의 북쪽에 무릇 20일 동안 소나무를 심게 하였다.6월 14일 태종이 상왕(上王)을 모시고 술자리를 광연루(廣延樓)에 베풀고 연꽃을 구경하였다.1412년 4월 12일 상왕(上王)이 광연루(廣延樓)에서 꽃을 감상하고자 하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다. 상왕이 지신사(知申事) 김여지(金汝知)를 불러 “명일에 광연루(廣延樓)에 가서 작약(芍藥)이 만개한 것을 보고자 한다.”하였다. 4월 20일 교하현(交河縣) 청라암(靑羅巖)의 오얏나무가 벼락을 맞았다. 7월 17일 큰 바람이 불어 백악산(白岳山)의 소나무 21주(株), 성산(城山)의 소나무 14주가 뿌리째 뽑혀버렸다.8월 18일 도성(都城) 안에서는 배꽃이 피고, 완산부(完山府)에는 배·살구·홰나무인 괴(槐)·오얏(자두)·앵두·능금 등의 꽃이 활짝 피었다. 1413년 6월 19일 각사 종으로 하여금 경복궁 북서편 장의동(藏義洞)에 소나무를 심으라고 명하였다.1414년 5월 5일 단오(端午)이므로 태종이 건원릉(健元陵)에 참배하였다. 산릉에 수목(樹木)이 무성한 것을 보고, 일자(日者) 이양달(李陽達)을 불러 묻기를, “소나무와 밤나무를 함께 심었으니 소나무에 해로울까 생각된다. 밤나무를 제거하면 어떻겠는가?”하니, 이양달이 “밤나무는 노쇠하기 쉬우니, 번거롭게 베어낼 것이 없습니다.” 대답하였다. 1417년 3월 30일 이 해 봄에 복숭아와 자두(오얏)나무에 꽃이 피지 않았다. 1421년 1월 9일 세종이 풍양 이궁(豐壤離宮)·서이궁(西離宮)·헌릉·광효전의 뒤 언덕에 소나무를 심게 하였다.2월 1일 판부사(判府事) 박자청(朴子靑)과 예조 참의 허해(許晐)를 헌릉에 보내어 도랑을 파고 버들나무를 심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다.

















1424년 1월 20일 예조에서 봉상시(奉常寺)의 첩정(牒呈)에 의하여 계하기를, “선농단(先農壇),우사단(雩祀壇),산천단(山川壇)은 방(方)으로 1백 보(步) 되게 하고, 그 안에서 단(壇)에 가는 거리가 10보쯤 되는 주위에다 소나무를 심으소서.”하니,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1427년 2월 2일 소나무를 성균관(成均館)의 주산(主山)에 심었다. 1428년 1월 6일 병조에서 계하기를, “청컨대 경복궁(景福宮)의 주산(主山)과 좌비산맥(左臂山脈)에 소나무를 심고 그 근방의 인가(人家)를 모두 옮기소서.”하니, 세종이 명하기를, “내년 봄에 솔을 심고 인가(人家)는 금년 10월까지 옮기도록 하고, 또 집을 지을 땅을 주도록 하라.”하였다.1434년 4월 24일 병조에 전지하기를, “남산의 안팎쪽과 백악산(白岳山)·무악산(毋岳山)·성균관동(成均館洞)·인왕산(仁王山) 등과 같이 소나무가 희소한 곳에는 잣나무나 상수리나무 등을 심게 하라.”하였다.8월 20일 상림원 침장고(沈藏庫)에 심은 정월우하초(正月雨下草) 씨가 이제야 성하게 자라서 꽃이 피니, 이는 바로 마료초(馬蓼草)였다.1437년 8월 29일 이 달에 한성(漢城) 안에서 자두꽃(오얏꽃)·배꽃·회화나무꽃이 피었다.1447년 8월 10일 경기도와 충청도 감사에게 지시하기를, “도성(都城) 사산(四山)의 소나무가 벌레의 피해로 말라 죽기가 쉬우므로 밤나무를 심으려고 하니, 밤 종자 10여 석을 준비하여 상림원(上林園)으로 보내라.”하였다.1452년 3월 14일 문종이 공조(工曹)에 명하기를, “진관사(津寬寺)를 조성(造成)하는 재목은 도봉산(道峰山)과 삼각산(三角山)의 소나무를 베어서 사용하게 하라.”하였다. 1453년 5월 12일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오는 봄부터 한성(漢城)과 지방의 큰 길 좌우에 흙의 알맞은 데에 따라서 소나무·잣나무·배나무·밤나무·느티나무·버드나무 등의 나무를 많이 심고서 그것을 벌목(伐木)하는 것을 금지하소서.”하니, 단종이 그대로 따랐다.

















1464년 9월 29일 종친(宗親)·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에서 세조에게 문안(問安)하였다. 종친(宗親) 등이 보루각(報漏閣)문 앞에 있는데, 누군가 홀연히 말하기를, “근정전(勤政殿) 위에 서기(瑞氣)가 바로 나오는데 연기와 같다.”고하므로, 사람들이 다투어 쳐다보았으나,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때 서기(瑞氣)가 자주 나왔으므로, 사람들이 의혹(疑惑)스럽게 여겼는데, 혹은 말하기를, “사헌부(司憲府)의 느티나무 위에 서기(瑞氣)가 있다.”고 하고, 혹은 말하기를, “상림원(上林苑)의 과수(果樹) 위에 서기(瑞氣)가 있다.”고 하였다. 1471년 11월 10일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지난 번에 전교(傳敎)를 받자오니, ‘병조(兵曹) 및 각 지방 관청에서 매년 사계(四季)의 입절일(入節日)과 늦여름의 토왕일(土旺日)에 나무를 서로 비비어 불을 새로 만들어 궁전(宮殿)에 진상(進上)하고 민가(民家)에 나누어 주고 전의 불을 끄게 하던 개화(改火)의 법은 한성과 지방인 경외(京外)가 같지 아니하니, 금후로는 옛 제도를 따라 시행(施行)하라.’ 하였으므로, 삼가 주례(周禮)를 안험하니, ‘사관(司爟)이 불씨를 새롭게 하는 행화(行火)하는 정령(政令)을 맡아, 4시(四時)로 국화(國火)를 변화시켜서 때때로 퍼지는 질병을 구원하였다.’ 하고 그 주(註)에 이르기를, ‘봄에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에서 불을 취하고, 여름에는 대추나무와 은행나무에서 불을 취하며, 하계(夏季)에는 뽕나무와 산뽕나무에서 불을 취하고, 가을에는 갈참나무와 느릅나무에서 불을 취하며, 겨울에는 느티나무와 박달나무에서 불을 취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경중(京中)은 옛 법을 준용(遵用)하되 외방(外方)은 봉행(奉行)하지 않으니 청컨대 금후로는 경중은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불을 예조에서 받아 5부(五部)에 나누어 주게 하고, 외방도 또한 이 예(例)를 따르게 하여, 여러 고을로 하여금 집집마다 나누어 주는 것을 일제(一齊)히 거행하게 하여 어기는 자는 과죄(科罪)하게 하소서.”하니, 성종이 그대로 따랐다.













1475년 2월 16일 공조(工曹)에서 아뢰기를, “전번 수교(受敎)에, ‘연희궁(衍禧宮)·아차산(峨嵯山)·낙천정(樂天亭)의 세 잠실(蠶室)에 심은 뽕나무 묘목(苗木)을 제사(諸司)로 하여금 나누어 받아서 율도(栗島)에 옮겨 심게 하고, 옮겨 심은 뒤에는 제사(諸司)에서 스스로 뽕나무 묘목을 준비하여 해마다 심게 하며, 그 숫자를 회계(會計)에 기록하여 해마다 상례(常例)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뽕나무는 들판 곳곳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제사에서 뽕나무 묘목을 스스로 준비할 때에 대개 민가에서 강탈하여 취하고, 혹은 다른 관사(官司)에서 심은 것을 몰래 서로 훔쳐서 옮겨 심으니 그 폐단이 작지 아니합니다. 청컨대 이제부터 세 잠실과 제사에서 어린 뽕나무를 많이 길러서 해마다 옮겨 심게 하고, 섬 안에 사는 사포서(司圃署)·봉상시(奉常寺)·제용감(濟用監)의 노예로 하여금 나누어 받아서 지키게 하소서. 그리고 만일 마음을 쓰지 아니하여 말라 죽게 하면, 그 사(司)의 관리를 아울러 죄주고, 또 병조(兵曹)로 하여금 4산(四山)의 예(例)에 의하여 간수하는 군인 3명을 정하고, 뽕나무를 베는 자도 소나무를 베는 예에 의하여 과죄(科罪)하게 하소서.”하니, 성종이 그대로 따랐다.













1505년 7월 25일 10대 국왕 연조(묘호 추상)가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오늘 대비를 모시고 경회루(慶會樓)에 가서 연꽃을 구경하고자 하니 연꽃 구경과 축수 올리는 뜻으로 절구(節句)를 지어 바치라.”하였다.1513년 2월 28일 크게 천둥과 번개인 뇌전(雷電)이 일어 태묘(太廟)의 소나무 두 그루에 벼락이 떨어졌다. 7월 18일 큰 바람에 집상전(集祥殿)의 소나무와 상서원(尙瑞院)의 느티나무가 뽑혔다. 1515년 7월 29일 복숭아나무와 자두(오얏)나무에 꽃이 피었다. 1516년 6월 27일 문소전 제조(文昭殿 提調) 이계맹(李繼孟)이 “신(臣)이 문소전에 가서 직접 찾아보았으나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전(殿) 동쪽 담모퉁이 안팎에 사람의 자취가 있고 담 밖에 작은 느티나무가 있으니, 이 나무로 올라가 담을 넘었을 것입니다. 그 발자취를 따라갔는데, 성 밑에 이르러 또 사람의 자취가 있으니, 성을 넘어서 들어온 것도 분명합니다.”아뢰었다. 1519년 8월 1일 경상도 진해현(鎭海縣)에서 자두꽃(오얏꽃),복숭아꽃이 피어 열매를 맺었다.자두꽃(오얏꽃),복숭아꽃이 피는 진해(鎭海)에 일본이 기증하여 식재된 일제의 대한국 침략의 상징인 벚꽃을 뽑아 불태워야 한다.8월 8일 홍문관 앞 뜰 배나무에 꽃이 피었다.9월 29일 전라도 흥양현(興陽縣) 점암리(簟巖里)에 아가위꽃과 배꽃이 곳곳마다 피었다.10월 6일 전라도 흥양현(興陽縣)에 매화(梅花)가 피었다. 11월 15일 강원도 강릉부(江陵府)에 날마다 이어서 장마가 지고 날씨가 따뜻하여 동백꽃이 피었다.1529년 11월 14일 중종이 석강에 나아갔다. 예기를 강(講)하다가 시강관 김희열(金希說)이 글에 임하여 “이 책에 ‘서인(庶人)은 그냥 하관(下棺)하고 봉(封)하지도 않고 심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대개 관혼상제(冠婚喪祭)에는 존비(尊卑)와 귀천(貴賤)에 따라 높이거나 깎아내리는 등급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봉(封)이라는 것은 무덤인 구롱(丘壟)이라는 것이고, 심는다는 것은 나무 심는 것을 말합니다. 천자는 소나무를, 제후는 잣나무를, 대부는 밤나무를, 사(士)는 느티나무를 심고, 서인은 나무를 심지 못하는 등 장사지내는 등급이 이같이 엄격합니다.”아뢰었다.













1537년 3월 14일 중종이 두 사신과 함께 동쪽 계단으로 해서 내려왔는데, 두 사신이 바로 후원(後苑) 상림원(上林苑)으로 향했다. 충순당(忠順堂)을 지나 북교(北橋) 위에 이르러 두 사신에게 말하기를, “정원 속이라 꽃을 꽂을 만합니다.”하니, 두 사신이 각기 홍도(紅桃) 꽃을 가져다 모자의 좌우(左右)에 요란하게 꽂았다. 두 사신이 중종도 꽃을 꽂기를 청하므로, 중종이 즉시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홍도 한 가지를 가져다가 익선관(翼善冠)에 꽂았다. 부사가 길가의 꽃떨기를 가리키며 두목을 시켜 꺾어 오도록 하여 들고서 구경하며 말하기를, “이 꽃 이름이 무엇입니까?”하니, 이응성이 대답하기를, “옥매화(玉梅花)입니다.”하였다. 취로정(翠露亭)에 이르러 잠깐 쉬는데 정사가 뜰 앞 섬돌 위의 떨기진 꽃을 가리키며 두목으로 하여금 두어 가지를 꺾어오게 하여 들고서 묻기를, “이 꽃의 이름이 무엇입니까?”하니, 이응성이 대답하기를, “출단화(黜壇花)입니다.”하니, 한 가지를 전하께 올리며 말하기를, “아울러 꽂으시기 바랍니다.”하고, 또한 부사에게 나누어 주어 다 같이 꽂게 하였다. 1553년 12월 26일 이 달에 전라도에 진달래꽃이 피고 마(麻)가 꽃을 피웠으며, 양맥(兩麥)은 이삭이 패고 오얏나무와 매화나무가 열매를 맺었다.1558년 윤7월 16일 청홍도(淸洪道) 제천(堤川) 객사(客舍)의 능금나무에 꽃이 피었는데 번성하고 화사하여 봄철 같았다. 8월 23일 경기 인천부(仁川府) 객사(客舍)의 배나무에 꽃이 피었다.1559년 11월 30일 경상도(慶尙道) 창원(昌原)에서는 능금나무와 탱자나무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1595년 12월 11일 충청도 아산현(牙山縣)에 진달래꽃·살구꽃이 곳곳에 피었다. 1603년 6월 8일 사직단 신궁(神宮) 북쪽에 있던 소나무가 쓰러졌다. 1630년 2월 14일 태묘(太廟)의 대문 밖에 있는 버드나무에 벼락이 쳤으므로 인조가 위안제(慰安祭)를 거행하였다. 1671년 12월 11일 전라도 영암(靈巖)에서 가을갈이를 한 보리가 이삭이 패어서 익고 진달래·복숭아·살구가 곳곳에서 꽃이 피었다.1692년 3월 9일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金氏)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인 영소전(永昭殿) 담장 안의 느티나무,회화나무인 괴목(槐木)에 벼락이 떨어졌다. 1705년 4월 3일 새벽녘에 영희전(永禧殿) 동쪽 담장 안에 있는 버드나무에 벼락이 쳤다.1713년 7월 25일 큰 바람이 불어 남산의 큰 괴목(槐木) 두 그루가 뽑혀 넘어지고, 대궐 안의 소나무가 부러졌다.













1902년 9월 11일 장례원 경(掌禮院 卿) 이원일(李源逸)이 아뢰기를, “장릉 참봉(章陵 參奉) 김승구(金昇九)의 보고와 관련하여 본원의 주사(主事)를 파견하여 능의 나무를 불법으로 찍은 문제를 적간한 결과 ‘능의 오른쪽 산중턱이 패여서 센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가 쉽사리 뽑히는데 현재 넘어진 중소(中小) 소나무가 총 46그루, 전나무가 17그루이고 썩거나 부러진 것은 이미 화목(火木)으로 찍어쓰고 남은 것이 없습니다.’고 합니다. 능(陵)의 경계인 해자(垓字) 안의 나무가 이렇게 많이 부러지고 상했는데도 애초에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 앞질러 화목을 찍어 땠으니 사체로 보아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당시 수직관(守直官) 민영국(閔泳國)을 엄중하게 견책하며 오른쪽 산중턱의 흙이 패인 곳은 즉시 본군(本郡)에서 모래를 덮고 튼튼히 다지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막중한 곳에서 능의 나무가 이렇게 많이 부러지고 상했는데도 애초에 원(院)에다 보고하지 않고 제멋대로 먼저 찍어 썼으니 해괴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해당 수령을 파면시켜라.”하였다. 1903년 11월 21일 장례원 경(掌禮院 卿) 조정구(趙鼎九)가 아뢰기를, “민회빈(愍懷嬪)의 묘인 영회원(永懷園) 국내(局內)에서 나무를 찍은 흔적이 낭자하다는 말을 듣고 주사(主事)를 보내 적간(摘奸)하게 하였습니다. 중치 소나무 3주(株)와 전나무 2주를 벤 것은 비록 공적인 용도로 쓴 것이 분명하지만 어린 소나무 1주는 함부로 베어낸 데 해당하며, 심지어 국내의 소나무의 곁가지를 애당초 본원(本院)에 보고도 하지 않고 감히 멋대로 이처럼 많이 베도록 하였습니다. 그 소행을 따져 보면 매우 통탄스럽습니다. 이 일은 심상하게 여겨 놓아두어서는 안 되니, 해당 입직 재관(齋官)은 법부(法部)로 하여금 조율하여 징벌하게 하며, 원역(員役)도 본부로 하여금 각별히 엄하게 다스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막중한 국내의 소나무를 거리낌 없이 잘라내다니 매우 통탄스럽다. 두 재관은 우선 본관(本官)을 면직하고서 법부로 하여금 똑같이 엄하게 다스리게 하라.”하였다.













1905년 6월 19일 함경남도 관찰사(咸鏡南道 觀察使) 신기선(申箕善)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부임(赴任)한 후에 이미 원산항 감리(元山港 監理) 신형모(申珩模)에게 공문을 띄워 일본인들로 하여금 임금이나 왕후의 무덤인 능침(陵寢)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하였건만 지금 갑자기 원산에 있는 철도 부설을 위한 철도감부(鐵道監部)에 있는 와타나베가 말하기를, ‘인천(仁川)에 있는 철도감부 대좌(鐵道監部 大佐) 마키노에게 전보로 물어보니 마키노는 전보로 하교하기를, 아무리 능에 관계되는 소나무라 하더라도 구애됨이 없이 쓸 수 있다.’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 또 와타나베에게 급히 공문을 보내어 능침의 중한 의리에 대해서와 개인의 산에서 대신 벌목(伐木)하라고 구체적으로 진술하였으나 시답지 않게 듣습니다. 대체로 12일 이후에 벌목한 것이 심지어 300여 주(秼)나 됩니다. 와타나베는 그 이상 더 벌목하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그것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부(府)와 부(部)의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시급히 일본 공사(日本 公使)와 사령관(司令官), 군용철도 감부(軍用鐵道 監部)와 교섭해서 더 벌목하는 우환을 막기 바랍니다. 신은 거적자리를 깔고 명(命)을 기다립니다.”하니, 고조 광무제가 상소(上疏)에 대(對)하여 임금이 내리는 비답(批答)하기를, “궁내부(宮內府)와 외부(外部)에서 법을 세워 금지하게 하라. 경은 죄인(罪人)이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처벌(處罰)을 기다리는 대죄(待罪)하지 말고 관찰사(觀察使)의 직책에 더욱 힘쓰라.”하였다.1917년 5월 15일 황태자(1919.1 2대 황제 등극한 순종 융희제)가 함경도 석왕사(釋王寺)에 있는 어필각(御筆閣)과 태조 고황제(太祖 高皇帝)가 직접 심은 소나무를 봉심하고, 각 불각(佛閣)과 양어장, 온천 약수 등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친히 어린 소나무 한 그루를 단속문(斷俗門) 바깥에 있는 만춘각(萬春閣) 옆에 심었다. 이어 하룻밤을 묵었다. 1920년 4월 15일 순종 융희제가 능(陵) 주위 소나무의 벌레를 없애느라고 수고한 홍릉(洪陵)과 가까운 금곡(金谷) 백성들에게 일금 50원을 특별히 하사하였다.
2013-04-10 09:05:23
124.53.1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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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바디스_ 2013-04-17 01:13:37 121.xxx.xxx.95
웅장하고 방대한 이 역사적 자로는 너무나 경이롭고 그저 탄성이 나옵니다. 물론 옮긴것이기는
하지만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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