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자주국방으로의 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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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자주국방으로의 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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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병기개발과 닉슨의 중공방문 발표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
 
 

朴 대통령은 애그뉴 부통령과의 美 7사단 철수에 대한 회담 때, 「(1) 한국군 장비의 현대화, (2) 장기 군사원조 제공, (3) 2만 명 이상의 철군을 하지 않는다」는 미국측의 보증을 받는 선에서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구체적인 문제는 한미 고위층 외교군사회담에서 협의가 진행됐는데, 이 회담은 1971년 1월 중순까지 수개월 간 논의될 정도로 난항을 거듭했다.

그 초점은 「한국군 현대화 5개년계획」이었다. 한국측은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해서는 25∼30억 달러가 필요하다고 보고 이를 요구했으나, 결과는 15억 달러로 낙착되었다. 이것이 「닉슨 독트린에 의한 한국군 현대화 5개년계획」이다.

이 계획의 골자, 즉 향후 5개년 동안 미국이 한국에 추가 원조하겠다는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전차를 500대에서 900대로 증강한다.

(2) 「나이키」, 「어네스트 죤」 등 지대공 및 지대지 미사일 200기를 인도한다.

(3) 보병용 M-1 소총을 M-16 라이플로 전면 갱신하고 M-16의 한국 내 자급공장 건설과 생산을 승인한다.

(4) F-86 전투기 130기를 F5A 전투기로 전면 갱신한다.

이 내용을 보면 (1)에서 「전차를 500대에서 900대로 증강」시킨다고 되어 있으나 이미 설명한 대로 당시 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전차는 M-4라는 구식 전차로서 북한군이 대량 생산·보유하고 있는 T-59 전차와는 대적할 수 없는 고물이었다. 따라서 국군이 보유하고 있는 500대라는 전차는 완전 교체해야 할 입장이었다. 전차 수가 500대에서 900대로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900대 중 고물 전차 500대를 폐기하면 남는 것은 400대가 된다. (4)에서 새로 공급한다는 F5A기는 북한 공군이 90대나 보유하고 있는 MIG-21에는 대적할 수 없는 성능이었다.

결론적으로,

(1) 닉슨 독트린에 의한 한국군 현대화 5개년계획(이하 현대화계획)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북한의 군사력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2) 현대화계획에는 향토예비군 250만 명에 대한 무장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북한의 노농적위대 120만 명이 현역군 수준으로 무장돼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남북간의 전력 상에는 큰 격차가 있다.

(3) 즉, 현대화계획이 완성되더라도 주한미군만 철수한다면 김일성은 무력으로 적화통일이 가능하다고 오판할 소지가 충분하다.

그리고 닉슨 행정부는 美 7사단 철군과 동시에 한국전쟁 휴전 후 17년 간 계속돼 왔던 미국 정부의 무상원조를 중단했다. 이들 무상원조의 대부분은 물자로 국내에 도입되어 이의 판매대금을 국가재정에 편입시키는 방법으로 한국의 재정을 원조하는 것이었다.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
 
 

대충자금이라고 했다. 이 대충자금의 비중은 <도표 10-2>에서 보듯이, 1961년에는 국가재정 총액 면에서는 39.2%, 국방비만 따지면 무려 95.1%나 됐다. 그 후 차차 감소해서 71년에 재정에서는 5.1%, 국방비에서는 16.1%를 차지했다. 이런 대충자금이 1970년으로 마감된 것이다.

1971년 3월 27일, 美 제7사단 철수

朴 대통령은 1월 11일에 있었던 연두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이른바 「닉슨 독트린」과 관련, 미국 대신 일본을 반공 대역(反共 代役)으로 내세우자는 논의도 있는데, 만약 일본의 이런 역할이 「아시아」 집단안보체제의 일환으로 제기된다면 굳이 반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朴 대통령은 닉슨 독트린에 의한 극동지구의 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일본의 역할에 대해 반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朴 대통령으로서는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애그뉴 부통령은 美 7사단의 철수는 1971년 6월 말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미군은 계획보다 3개월을 앞당겨 71년 3월 27일 부랴부랴 한국을 떠났다. 후에 안 일이지만 닉슨은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에 온 신경을 쓴 나머지 제7사단 철수를 강행했으며, 철수 시기도 앞당긴 것이었다.

닉슨으로서는 약소국인 한국에 대한 고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朴 대통령은 고별식에서 美 제 7사단을 부대 표창하고 사단장에게 보국훈장 국선장(保國勳章 國仙章)을 수여했으며, 특히 6·25 전쟁 중의 무공과 희생에 대하여 치하와 애도를 표했다. 美 제7사단 2만 2천 명이 철수하자 서부전선에서 약 18마일에 대한 제1선의 방어임무를 맡고 있던 주한 美 제2사단은 이 임무를 한국군에 인계하고 제7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후방으로 이동했다. 이로써 한국군은 155마일 휴전선 전체의 방위 임무를 맡게 되었다.

김일성이 휴전 후 18년간을 자나깨나 바라던 주한미군 철수는 이렇게 실제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김일성으로서는 꿈인가 생시인가 했을 것이다. 한편 朴 대통령으로서는 美 제7사단을 떠나 보내면서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닉슨의 중공 방문 발표

美 제7사단이 철수한지 꼭 10일째 되는 날(4월 7일),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석하고 있던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공) 대표단은 미국 탁구팀이 중공을 방문하도록 초청하였고 미국 대표단 (단장 해리슨)은 이를 즉각 받아들였다. 미국의 공식 스포츠단이 중공을 방문하는 것은 1949년 중공 정권 창설이래 처음이다. 미국은 그 동안 1천여 명에 대한 중공방문 여권을 발급했으나, 그 중 실현된 것은 단지 3명뿐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3개월 후인 7월 16일에 실로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대사건이 발생했다. 1949년부터 중국대륙을 장악하여 20여년 동안 미국을 「제국주의 반동정권」으로 규정하고 「美 제국주의」타도를 국가의 지상목표로 삼고 있는 중공이 바로 그 「제국주의 반동정권의 총수」를 돌연 초청했고, 닉슨 대통령은 즉각적으로 이를 수락, 중공을 방문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紙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닉슨 대통령이 달나라에 가겠다는 발표를 했던들, 키신저가 중공을 극비리에 방문하여 닉슨 대통령의 중공 방문을 주선했다는 발표만큼은 전세계를 놀라게 하지 못했으리라. 미국인들에게는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가장 발을 들여놓기 어려웠던 중국 대륙이 미국 탁구선수들뿐만 아니라, 이제 열렬한 반공주의자였던 한 미국 대통령에게까지 방문의 문호가 열렸다는 점에서 그것은 실로 엄청난 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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