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자주국방으로의 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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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자주국방으로의 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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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병기 개발과 국가보위에 나선 과학 기술자

 
   
  ^^^▲ 박정희 전 대통령과 '닉슨독트린' 이라는 자주국방 정책을 발표한 닉슨 전 미국 대통령^^^  
 

주한 미군철수와 국가보위에 나선 과학기술자

1950년 6·25 한국전쟁 때부터 미국과 한국은 군사적인 혈맹관계에 있다.

한국전쟁만 하더라도 온 세계가 동과 서로 양분된 상태 하에서 우리나라는 미국을 맹주(盟主)로 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2개 사단의 미군병력이 한국에 주둔했는데 소위 주한미군이다.

한미연합군의 작전권도 이들이 갖고 있다. 고쳐 말하면 우리나라의 국토방위는 한미 공동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월남전이 치열해지자 우리 국군이 파월하게 된 것도 이런 사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美 닉슨 대통령은 1970년 7월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의 철수방침을 통고했다. 그리고 나머지 1개 사단도 앞으로 수년 내에 철수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돼서 우리나라 안보에는 비상이 걸렸다.

이 장(10장)에서는 ①이러한 국제관계의 변화와, ②이에 대한 대처방안으로써 「국군장비 현대화를 위한 병기개발」이 국가 최고긴급과제로 등장하게 되는 과정, ③그리고 이들 임무를 수여 받은 과학기술자들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활약상을 소개코자 한다.

남북한의 대치관계

이 시점에서 남북간의 대치관계와 방위산업의 태동에 대해 총 정리한다. 1971년 말 기준이다.

(1) 북한은 1968년 1월 21일 무장특공대 31명으로 하여금, 청와대 습격을 시도했다. 즉 1.21사태이다. 그리고 이틀 뒤인 1월 23일에는 美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했다. 조야(朝野)는 크게 경악하고, 국방력을 조속히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고조되었다.

(2) 박 대통령은 동년 2월 7일 경전선(慶全線) 개통식에서 "올해 안에 250만 재향군인을 무장시키고, 이에 필요한 무기공장도 연내에 건설할 방침"임을 밝히는 동시에, "전국민적 방위태세를 갖춤으로써만이, 북한의 도발을 막아낼 수 있다. 온 국민은 경제건설과 국토방위를 병행해야 할 것이며, 논두렁에 총을 두고 농사를 짓는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즉 박 대통령은 국정의 지표를 "일면 건설, 일면 국방"으로 수정했던 것이다.

(3) 박 대통령은 "일하면서 싸우자", "우리고장 방위는 내 손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4월 1일 향토예비군을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이로써 향토예비군은 군경이 전담하던 후방 對무장간첩작전에 적극 참여하는,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향토예비군의 무장은 긴급과제로 등장했다.

(4) 향토예비군이 창설된 지 약 1개월 후(1968년 5월 27일과 28일) 워싱턴에서 개최된 제1차 연례 한미국방장관회의에서는, 1.21사태 이후 북한의 도발행위 증대로 심각해진 한국의 방위와 안보문제를 집중적으로 토의했다. 韓美양국은 한국의 자위력(自衛力) 강화의 일환으로, 소구경(小口徑)화기(M16 자동소총) 생산공장을 한국에 건설한다는 데 원칙적으로 합의를 보았다.

(5) 11월 2일 북한 무장특공대 1백여명이 울진(蔚珍), 삼척(三陟)지구에 침투, 1개월 이상 준동할 때, 향토예비군은 소탕작전에 크나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향토예비군은 무기가 없어 전투에는 참가할 수가 없었다. 단지 경계망 구축이나 길 안내에만 동원되었다. 향토예비군의 무장화는 더욱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6) 울진, 삼척지구 게릴라 침투사건이 있은 후 맞이한 1969년의 국정지표도 "일면 건설, 일면 국방"으로 정했다. 동년 8월 22, 23일 이틀간, 박 대통령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닉슨 대통령과 한미정상회담을 가졌는데, 가장 중요한 성과는 "공동성명에서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이 재천명되었다"는 점이었다.

(7) 1970년 1월 9일 연두기자회견에서도 박 대통령은 "싸우면서 건설하는, 일면 건설 일면 국방의 해로 또 다시 정한다"라고 밝혔다. 연 3년째 "일면 건설, 일면 국방"이 국정지표였다. 당시 우리나라의 남북 대치관계는 해를 거듭할수록 긴박해졌고, 실제로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초비상 상태였다.

1970년 6월 5일에는 이미 본 홈페이지 『제8장 남북관계(1970년)』에서 이야기한대로 서해 휴전선 부근에서 우리 해군 방송선의 피랍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방위산업 육성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 M-16 공장 건설이 추진되고 고속정이 건조되기 시작하고 국방과학연구소가 창설된다. 그리고 방위산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4大 핵공장 건설계획이 추진되었다.

(8) 6월 22일에는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사건이 발생하였다. 6월 22일 새벽 3시 50분쯤,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 무장특공대 3명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안에 잠입, 현충문 지붕 위에 올라가 전자식 폭탄을 장치하려다, 그들의 실수로 폭발하였던 사건이다. 1명은 피투성이 시체로 발견되었고, 나머지 2명은 군경 예비군의 맹렬한 추격전 끝에 계양산에서 사살되었다.

이들 무장특공대는 6.25 기념식 때 정례적으로 참석하는 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요인들을 암살할 목적으로, 현충문에 폭약을 장치한 후 현장에서 2∼3백m 떨어진 곳에서 무선식(無線式) 기폭장치로 폭파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로써 북한은 1968년의 1.21 청와대 습격사건에 이어, 두 번째로 대통령 암살을 기도했던 것이다(1974년 8월 15일에는 文世光 사건이 일어났고 1983년 10월 3일에는 버마의 아웅산 사건이 발생했으니, 북한은 우리나라 국가원수의 암살을 계속 시도해왔다는 결론이다). 정부기관 요원을 시켜 딴 나라의 국가원수를 의도적으로 암살을 시도한다는 것은 양국간은 전쟁상태나 다름이 없다는 뜻이 된다.

<우리나라의 안보는 주한미군(UN군)이 책임지고 있었다. 작전권도 주한미군에 있었다. 우리나라는 게릴라 침공에 대해서만 단독작전을 폈는데 그것도 우리나라 영토 안에서만 가능했다. 박 대통령은 국가방위는 주한미군과 공동으로 대처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경제발전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다. 남한이 경제적으로 부강해져서 북한을 제압하게 되면 그때 가서 평화적인 통일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소위 「평화적인 통일방안」이다. 그런데 1970년에 들어서자 생각지도 못했던 큰 회오리바람이 불어 닥쳤다. 「닉슨 독트린」이다. 이 장(제10장)에서는 한미간의 안보문제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닉슨 독트린

 

1969년 8월에 개최된 한미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은 계속 주둔한다」는 재천명이 있은 지 6개월도 채 안되었을 때이다.

1970년 2월 18일에 발표된 미국의 외교백서에는 「어떤 나라의 국방과 경제도, 미국 혼자만이 떠맡을 수는 없다. 세계 각국, 특히 아시아 및 중남미 국가들은 자국 국방의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했다. 또한 닉슨 대통령은 "미국은 아시아 및 극동에 있어 (1) 우방군이 핵공격이 아닌 형태의 공격을 당할 경우 군사와 경제적 지원만 제공하며, (2) 당사국은 美 지상군 병력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고, 제1차적 방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미국은 「다시는 아시아대륙에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사표시를 하였고, 주한 美 지상군의 철수나 감축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하였다. 이것이 소위 닉슨 독트린이라는 것이다.

정부가 닉슨 독트린과 같은 거센 물결이 언젠가는 한국에도 밀어닥칠 것을 예견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월남 파견군의 철수가 어느 정도 매듭지어진 뒤에나 논의될 것으로 보고 있었다. 특히 우리 국군의 월남파병은 미국측의 강력한 요청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우리 정부의 입장은 6·25 전쟁 당시 우리를 도와준 미국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특히 2개 사단의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주한미군에 버금가는 국군을 파월하지 않을 경우에는 주한미군의 일부가 월남전에 전용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바꾸어 말해서 2개 사단 이상의 대병력을 월남에 파병하고 있는 이상, 주한미군의 감축은 있을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한미군 철수에 관한 추측 보도가 나올 때마다 한국 정부는 「사실무근」, 「억측」이라고 해명했다. 70년 6월 30일에도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는 국회에서 "미군 철수는 한국군의 현대화가 완전히 달성되어 우리의 전투능력이 북한을 훨씬 능가하게 되는 70년대 후반까지는 있을 수 없다"라고 단언했다.

그런데 1주일 후인 7월 5일 사이공에서 개최된 월남 참전국 회의에 참석한 로저스 美 국무장관은 함께 참석한 최규하(崔圭夏) 외무장관에게 "주한미군 2만 명을 철수하겠다"는 정식 통고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서울에서는 포터 주한 美 대사가 丁 총리에게, 워싱턴에서는 존슨 美 국무차관이 김동조(金東祚) 대사에게 각각 철병 계획을 통고했다.

주한미군 1개 사단 철수를 통고 받은 충격은 실로 대단해서 우리 국민들은 모두 6·25 전쟁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불안해했다. 3선 개헌 발의(1969년 9월) 이후 국회심의를 거부해오던 야당도 주한미군 철수 소식은 충격적이어서 즉시 국회에 복귀하여, 「(1) 북한의 남침야욕을 유발하는 여하한 명분의 미군 철군에 반대한다.

(2) 1966년 월남파병(增派) 때 미국이 약속한 한국군 장비의 현대화 및 방위산업 육성에 대한 지원을 감군에 앞서 구체화하고 실행해야 한다」라는 대미 결의문을 채택했다. 언론계에서는 「선보장(先保障) 후감군(後減軍)」, 「주한미군 철수 절대반대」등에 관해 연일 대서특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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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망산 2007-07-30 20:12:49
건설과 국방, 이념대립과 국가발전을 함께 도모해야했던 어려운 시절 돈이라도 있었나요?
민족의 영웅,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지요.
혜안과 통치철학을 겸비해야지요.

아~~ 지금 왜 님이 그리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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