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의 좌표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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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의 좌표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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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산업혁명과 산업전사 - ⑥

 
   
  ^^^▲ 조국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농업식량안보와 자주국방을 위해 노력하신 박정희 대통령朴 대통령 "돈이 없어 공부 못한 것이 한이라는데, 시설을 충실히 해주시오. 자부심을 느끼게." 이렇게 해서 여공들의 야간 교육이 시작되었다.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나이가 든 여공까지 모두가 참여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했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1960년대의 여인상(女人像)

 

수출은 급격히 늘어났다. 수출품은 거의 모든 품목이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제품이었다. 그것도 가냘픈 여공(女工)들의 손이었다.

머리카락을 판 것도 가난한 여자들이요, 이 머리카락으로 가발을 만든 것도 이들이었다. 봉제품을 만들기 위해 미싱을 돌린 것도 이들이요, 스웨터를 짜느라고 눈이 피로했던 것도 이들이었다. 자식들이 잠자리에 든 후에도 '홀치기'에 매달려 밤을 새운 것도 이들 여공이었다.

「과거의 우리나라 여인상」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 대상을 사대부나 부잣집에서 찾아서는 안된다.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빈곤한 농촌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고래로 남존여비 시대, 우리 농촌의 여성생활이란 남성보다 훨씬 더 비참했다. 동트기 전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육체노동의 연속이다. 남자와 똑같은 조건하에서의 고된 농사일. 하루 세끼의 먹거리 마련도 해야 한다.

나물을 캐러 산으로 들로 나가야 하고, 때가 되면 김치, 된장, 고추장, 간장 등을 담가야 한다. 식량이 모자랄 때 식량을 꾸어오는 것도 여자들의 몫이다. 얼음을 깨고 차가운 개울물에서 빨래도 해야 한다. 호롱불 밑에서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길쌈, 밤이 되어도 쉴 틈이 없다.

그리고 연속 태어나는 자식들의 출산과 양육, 학비 걱정, 엄한 시부모님 봉양과 가족들의 병간호, 제사와 차례상 마련, 이래저래 모든 의식주 문제는 주부가 해결했다. 아이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시장에 나물이나 채소를 팔러 가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권은 남자에게 있어 현금은 만질 수도 없었다.

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난 한 여공의 예를 들어, 1960년대의 여인상을 이야기 형태로 구성해 본다. 1960년에는 우리나라 인구 중 65%가 농촌에 살았다. 조그만 농가에 자식은 보통 5~6명이나 되고 그 중의 반은 여아였다.

식구가 많으니 배불리 먹을 수 없었고「보릿고개」 때가 되면 나물을 캐다 죽을 쑤어 허기를 달랬다. 이 아가씨는 초등학교 졸업 후 가사를 돕다가 만 15세가 됐다. 동생들의 수가 늘고 성장해 감에 따라 식량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래서 장녀인 이 소녀는 공장으로 일하러 가기로 결심했다.

돈을 벌어 집에 보탬을 줘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우선 자기가 먹을 식량만이라도 절약해야 하는 절박한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소녀는 동네 아가씨 몇 명과 함께 공장으로 떠났다. 당시 공장에는 기숙사도 없었다. 이들은 조그마한 사글세방 하나를 얻어 공동으로 자취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졸업뿐이니 기술이 있을 리 없었고, 더욱이 시골 농촌에서 자랐으니 모두가 낯설고 두려울 뿐이었다.

생전 처음 재봉틀이란 것을 보았다. 전기 모터로 돌아가는 재봉틀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늘이 상하로 움직이는데, 그 속도가 하도 빨라서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잘못해서 바늘이 손가락에 박히는 장면이 저절로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달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이 소녀는 배우지는 못했지만 머리가 총명하고, 손재주도 좋았으며, 일도 열심히 했다. 당시는 토요일도 반나절만 일할 때가 아니다. 일주일에 꼬박 6일을 일해야 할 때이니 월 25일을 일했다.

야간작업도 서슴지 않았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은 물론이고, 점심시간 뿐 아니라 저녁식사까지도 회사급식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1964년)의 방직공장 여공들의 평균 월급은 3,440원이다(註: 1964년도의 서울 소비자물가를 보면 쇠고기(600g) 129원, 연탄(10개) 76원, 비누(375g)가 38원).

이 소녀가 받는 월급은 취업 초기에는 이 액수보다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약하고 또 절약해서 부모님께 송금을 했다. 그리고 약간의 저축을 했다가 추석 때는 선물을 사들고 그리운 고향으로 갔다. 모두가 긴요한 물건이었으나 특히「라디오」선물이 한때 대유행을 했다(註: 64년 1월 공보부가 조사한 바로는, 우리나라의 라디오 보유 총대수가 65만 9,830대였다. 63년 말 총 인구가 2,718만 명이니, 라디오의 전국 평균 보급률은 2.42%에 불과했다. 주로 도시에 많이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시골에는 한 마을에 한 대 정도 있었을까? 아무튼 시골에서는 신기한 문화용품일 때이다).

이 아가씨는 열심히 일해, 차차 기술을 익혀 70년이 되면서 일류 기능공이 됐다. 급료도 올라가서 일급 413원이 됐다. 그래서 한 달에 받는 급료가 10,325원(413원×25일), 당시 쌀값은 20 리터에 692원이었으니, 한 달 급료는 쌀 300 리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이만한 급료를 받는다는 것은 농촌 사정으로서는 아주 큰 수입이었다.

이제 소녀의 나이 21세, 어엿한 숙녀로 성장했다. 도회지 생활을 하다 보니 옷맵시도 좋아졌고 머리 모양이나 화장도 세련되어, 고향에라도 가면 출세한 여자 대우를 받았고 선망의 대상이 됐다.

동생들의 학비도 마련해 주었으니 효녀라는 칭찬도 받았다. 부모는 대견해 했고 "딸자식이 아들 녀석보다 낫다"고 자랑을 했다. 그래서 막내 여동생도 중학교를 나오자마자 만 15세 때, 동네의 다른 소녀들과 함께 언니 따라 공장에서 일하게 됐다. 일자리는 곧 얻을 수 있었다. 이 때 쯤에는 여성 근로자의 일자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동생은 언니가 보태준 학비로 중학교까지 졸업했는데도 기술은 없었다. 그래서 급료는 최하급인 일급 245원을 받았다. 월급으로 쳐서 6,125원이었다. 언니의 월급은 10,325원이니 언니가 약 69% 더 많은 급료를 받는 셈이다(註: 70년도의 서울 소비자물가를 보면 쌀(20리터)이 692원, 밀가루(22kg 한 포대)가 773원, 쇠고기(600g) 500원, 무(한 관)가 160원, 배추(한 관)가 222원, 마늘(100개)이 720원, 세탁비누(450g)가 40원이었다).

못 배운 것이 한이었던 여공들

당시나 지금이나 학력은 신분을 표시한다. 그런데 당시 여공들의 대부분은 가정 형편상 중학진학을 못했다. 그러니 동창들이 중학교 교복을 입고 다니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이들 중 한 여공(女工)의 이야기.

朴 대통령은 자주 공장시찰을 했다. 하루는 한 섬유공장을 들렀다. 수천명의 여공들이 열심히 수출용 스웨터를 만들고 있었다. 시골에서 온 앳된 소녀들은 나이보다 어려 보였고 키도 작았다.

먹을 게 귀했던 당시, 시골에서 영양분 섭취를 제대로 했겠는가. 朴 대통령은 자신의 어린 시절 생각이 났을 것이다. 여공들이 기특해 보이면서도 애처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여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공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영어 글씨를 모르니, 감독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수출을 할 때라, 영어 글씨가 여기저기 있을 때이다.

대통령을 쳐다보는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대통령의 눈시울도 젖었다. 주위 수행자들도 순간적으로 숙연해졌다. 대통령의 시선이 옆에서 안내하던 사장의 눈과 마주쳤다.

朴 대통령의 의중을 눈치 챈 사장은 "당장 야간학교를 개설하겠습니다. 중학교 과정부터 시작하겠습니다." 朴 대통령 "돈이 없어 공부 못한 것이 한이라는데, 시설을 충실히 해주시오. 자부심을 느끼게." 이렇게 해서 여공들의 야간 교육이 시작되었다.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나이가 든 여공까지 모두가 참여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했다.

학교 건물이나 새로 마련된 시설은 어느 학교 못지 않았다. 교사 문제도 걱정이 없었다. 많은 사원들이 자진 봉사에 나섰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교복도 무료로 지급하는 등 소요 경비를 모두 부담했다.

이들 여공들은 휴가로 고향에 갈 때에는 꼭 교복을 입고 갔다. 그렇게도 입어보고 싶던 한 맺힌 교복. 그래서 고향 땅에서 교복을 입고 싶었던 것이다. 짧은 휴가가 끝나고 공장으로 돌아올 때 이들은 자기 고장의 잔디를 한 장씩 떠 가지고 왔다. 그것을 학교 마당에 깔았고, 이를 '팔도(註: 팔도강산, 전국을 뜻함) 잔디밭'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문교부에서 수료증은 줄 수 있지만, 졸업장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교과과정(커리큘럼)이 규정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보고를 듣고 朴 대통령은 즉시 문교부 장관을 불렀다.

"장관,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한 것이 한이라는데, 어린 소녀가 낮에 일하고 밤에 열심히 공부했는데, 그래, 그 한도 못 풀어주오. 그런 규정은 당장 뜯어고치시오" 하는 호통이었다.

 

 
   
  ^^^▲ 한일실업학교여성근로자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못 배운 한'을 풀기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의 여공들의 교육수준은 초등학교 졸업정도였다. 그래서 중등부가 먼저 개교를 했는데 이들이 졸업할 때쯤에 고등학교도 개설됐다. 교육시설은 어느 학교 못지 않았다.^^^  
 

졸업식 때 학생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울다 보니 감정이 복받쳐 엉엉 소리를 냈다. 재학생도 따라 울었고, 교사도 울었다. 사장도 울었고, 참석한 귀빈도 울었다. 졸업식장이 울음바다가 되어 행사가 잠시 중단될 때도 있었다. 못 배운 한을 푸는 날. 얼마나 감격적인 광경인가.

여공들은 중학과정을 끝내고 고등학교 과정으로 진급했고, 고등학교 졸업생 중에는 대학에 입학한 학생도 생겼다. 이들 대학생에게는 회사에서 장학금을 주었다. 직장 야간학교 제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이는 정부나 기업이 여공들에게 베푼「정」이었다. 이「정」이 순수했기 때문에 여공들은 이를 사랑으로 받아들였고 고마워했다. 서로가 학우로서 친하게 되니, 협동심도 생기고 단결심도 생겼다. 일의 능률도 올랐다. 이직률도 줄었다.

당시 각 공장에는 월 별로 품목마다 수출목표가 정해져 있었다. 여공들은 이 목표량을 생산하는데 스스로가 노력했다. 목표량이 달성될 때마다 기쁨의 환성을 올렸고 기업주는 이에 보답했다. 모두가 우리나라 경제건설에 앞장서는 개척자였으며, 그들의 목적의식은 뚜렷했다. 그래서 신명나게 일했다.

이런 일을 정치적이나 노동착취의 관점에서만 해석하려고 한다면, 이는 당시의 실정을 왜곡하는 것이며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정을 모독하는 일일 것이다.

한국 여성 인력의 특성

1960년대 초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파산 상태였다.

정부는 경공업 제품을 생산, 이를 수출함으로서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렇게 중대한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 1960년대의 여성 근로자인데 역사상 특이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나 1970년대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 특성을 정리해 보면.

(1) 당시의 여공들은 진취적이었다. 15~16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세계에 뛰어드는 용기가 있었다. 미국의 서부개척자와 유사한 정신이다.

(2) 당시의 여공들은 인내심이 강했다.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을 하루 10여 시간 일했다.

(3) 향학심이 강했다. 머리가 좋았다. 특히 암산에 능하다. 손재주에도 능했고, 눈이 좋아 장시간 미세한 작업을 해도 피로가 적었다.

(4) 가족간에 우의가 돈독했고 가족을 위해 희생할 줄 알았다.

(5) 국가나 회사에서 설정한 목표량(수출량)을 달성하는데 스스로가 노력을 했다. 대부분의 여공들은 자기 직장에 만족했고, 보수에도 불평이 없었다.

이렇게 정리해보니 1960년대의 여성근로자는 참으로 자랑스럽다.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우러난다. 이들 여공들의 노력으로 1964년에 1억 달러, 1967년에는 ―우리 국민이 갈망하던― 3억 달러를 수출했다. 3억 달러라는 금액은 우리나라가 전적으로 미국의 도움을 받아 나라 살림을 꾸려가던 시절의 원조 액수와 같기 때문에, 의의가 컸던 것이다.

그리고 1970년에는 10억 달러를 수출했다. 이로서 우리나라는 하마터면 파산할 뻔했던 국가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국민에게는 희망과 자신과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산업혁명이라는 거창한 수레바퀴의 시동을 건 것도 이들 여공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1960년대의 여공들은 조국방위의 애국자들이다. 애국자에게는 순수한 마음으로 존경하고 감사하면 되는 것이다. 어느 시대이든 간에, 또 누구이든 간에, 어떤 의도를 갖고 색안경을 통해 해석하려고 든다면, 이는 1960년대의 여공들을 잘못 판단하는 것이다.

여성근로자의 노임 한계점에 도달

1970년대에 들어가서는 이들 여성근로자도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수출이 늘자 새로운 공장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났다. 이에 따라 여성 인력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새로 생긴 공장에서는 봉급을 올려주면서 스카우트를 했다.

「스카우트」라는 것은 임금 상승을 부추긴다.「스카우트」를 하는 쪽은 임금을 올려주겠다며 유인하는 것이고,「스카우트」를 당하는 쪽은 임금을 올려주어야만 사람을 뺏기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임금이 올라간 것이다.

1970년 당시의 여성 근로자의 노임 수준을 알아보기로 한다.

1970년 한국정밀기기 센터(註: 전자공업 진흥센터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는 전자공장 유치용 홍보책자를 만들기 위해 우리나라와 경쟁관계에 있는 동남아 각국의 임금 실태를 조사했다(1970년 8월). 그 결과가 <도표 6-11>이다.

1970년 당시 신규로 채용한 우리나라 여공들의 하루 임금은 245원이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와 경쟁관계에 있는 대만의 경우는 343원으로 우리나라보다 40%가 비싸고, 싱가포르는 27%가 높다. 우리나라가 경쟁국보다 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참 여공들의 경우는 양상이 달라진다. 한국은 413원인데, 대만은 418원으로 101%, 싱가포르도 101%이다. 즉, 고참 여공의 경우 우리나라는 대만, 싱가포르와 거의 같은 수준인 것이다. 그러나 평균으로 계산하면 대만이나 싱가포르의 노임 수준은 우리나라에 비해 11~16% 정도 높았다.

즉, 우리나라 여성 근로자의 임금은 1970년까지만 해도 국제적으로 낮은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 한일실업학교여성근로자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못 배운 한'을 풀기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의 여공들의 교육수준은 초등학교 졸업정도였다. 그래서 중등부가 먼저 개교를 했는데 이들이 졸업할 때쯤에 고등학교도 개설됐다. 교육시설은 어느 학교 못지 않았다.^^^^^^  
 

<도표 6-11>에서 우리나라 여자 조립공의 노임(日給)은 최하가 245원이고 최고가 413원이다. 그 비율은 100 : 169이다. 이에 비해 대만은 100 : 122, 싱가포르는 100 : 133으로 우리나라보다 노임 격차가 적다.

격차가 크다는 뜻은 경험이 많은 고참 여공들은 구하기가 힘들어졌다는 뜻이다. 수출이 늘자 새로운 공장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났다. 이에 따라 신참 노동자는 구할 수가 있어도 고참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했다. 새로 생긴 공장은 봉급을 올려주면서 스카우트를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70년대로 들어가서는 우리나라 여성 근로자의 노임은 일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아시아의 어떤 경쟁국보다 노임이 높은 나라로 변해 버렸다.

그 후부터 「값이 싼 한국 노동자」라는 말은 다시 나오지 않게 되었다. 환언하면 「값싼 인력 시대」는 여성 근로자에 관한 한 1964년 중반부터 70년까지 약 7년간이라는 짧은 기간밖에 존속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여자 단순 기능공」을 국가자원으로 해서 경제발전을 도모한다는 것은 해를 거듭할수록 힘들어진다는 중대한 결론이 내려진다.

사회적으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농촌 여성들이 공장으로, 도회지로 몰려드니, 인구의 대이동이 시작됐다.

둘째는, 여성들의 수입이 커지다 보니, 가정 내에서 이들의 지위가 달라졌다.「여성도 남성 못지 않게 ········· 어떤 면에서는 남성보다 낫다는 자부심」이 생겨났다. 그 결과 고래로 내려오던「남존여비사상」이 퇴조하고「여성해방」내지는「남녀동등」관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셋째로, 이들 여공들은 20세가 되어도 결혼하지 않았다. 직장에 만족하는 동시에 돈을 더 벌어 저축을 하기 위해서였다. 목돈이 생긴 후도 농촌으로는 돌아가지 않았다.

도시 사람과 결혼을 하고 도시에 정착을 했다. 그리고는 무리를 해가며 자식들에게 대학 교육을 시키려 했다. 「못 배운 한」을 자식 대에서 풀고자 한 것이다(註: 그 결과 가뜩이나 교육열이 높은 우리 민족은 '과외수업'을 일으켜 서민생활을 멍들게 했고, 급기야는 수요와 공급을 무시한 교육을 실시함으로써「불량품 생산대학」이라는 유행어까지 만들게 된다).

우리나라의 업종별 임금 비교

다음에는 우리나라의 임금상태를 분야별로 알아본다.

<도표 6-12>를 보면 1966년에서 70년까지 4년간 환율이 14.5% 인상되었는데도 제조업 근로자의 노임은 달러로 따져 평균 222.5%로 인상됐다. 엄청나게 상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상률은 업종별로 큰 차이가 났다.

인건비가 더 많이 오른 쪽이 근로자를 구하기가 더 힘들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근로자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면 노임을 올리지 않아도 인력 보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 한일실업학교여성근로자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못 배운 한'을 풀기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의 여공들의 교육수준은 초등학교 졸업정도였다. 그래서 중등부가 먼저 개교를 했는데 이들이 졸업할 때쯤에 고등학교도 개설됐다. 교육시설은 어느 학교 못지 않았다.^^^^^^^^^  
 

<도표 6-12>에서는 제조업 중 특색이 있는 몇 가지 업종만 나열했는데, 우선 여성 근로자가 주가 되는 방직과 신발·피복 분야를 살펴보자. 방직은 218% 상승했는데 신발·피복쪽은 194%이니, 신발·피복쪽의 인상률이 낮다.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은 신발과 피복을 평균했기 때문이다.

당시 신발(주로 고무신과 운동화) 공장에서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아주 어린 여공을 구해서 아무 훈련도 없이 일을 시켰다. 이런 여공들은 초기에는 고무신 공장밖에 갈 곳이 없었다. 그러나 1968년에 21달러하던 월급이 69년에는 29달러로 껑충 뛴 것을 보면, 이런 여공들도 구하기 힘들어졌다는 뜻이 된다.

다음에는 남자 근로자의 경우를 보자. 목제품이나 가구 만드는 분야는 특별한 훈련 없이 쓸 수가 있다. 이들의 월급이 1969년에는 여자 인건비보다도 싼 것을 보면, 여자에게는 일자리가 있었는데 남자 단순기능공에게는 목제품이나 가구 만드는 공장조차도 취업하기가 힘들었다는 뜻이 된다. 취업 희망자가 많으면 노임이 적어지고 인상률이 낮은 것은 당연하다.

기계나 전기기계 공장에서 근무하는 생산직 근로자는 단순 기능공이 아니고 기술공들이다. 따라서 목공이나 가구 제조업에 종사하는 단순 기능공보다는 월급이 많은 것이 당연하다.

통상적으로 여자 근로자보다는 훨씬 많아야 한다. 그런데도 이들 양자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임금 인상률은 목공이나 가구 종사자보다는 많으나 여공들과 거의 흡사하다. 결론적으로 남자 기술공조차도 일자리를 얻기가 힘들었다는 뜻이 된다.

다만 화학분야는 특별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화학공장이 많이 건설됐는데, 이들 최신 공장에서는 월급을 많이 주며 우수한 인력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수송기계 분야의 급료도 높다. 자동차정비공장이나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는 일반 기계공장에서 근무하는 기술공보다 높은 기술 수준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더 높은 기술이 요구되는 남자 기술공의 급료가 우리나라 최고 수준이라는 뜻이 된다. 더욱이 남자는 여자와는 달리 정년이 될 때까지 30~40년 근무할 수가 있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고용을 늘리고 소득을 올리기 위해서는 남자가 나서야 한다는 당연한 결론이 나오게 된다. 문제는 「남자에게 어떻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가」하는 것이다.

(3편 '중진공업국을 향하여'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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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시민 2006-08-04 15:25:35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는 박정희 대통령이다.
나라를 가난에서 구원하기 위해 독재자라는 누명까지 쓰면서 조국 근대화를 이룩하셨다.

지금 민주화 운동 운운하며 설치던 민주화 출신 대통령들은 지금나라를 병랑끝으로 몰고 가고 있다.

이들의 좌파적 사고가 나라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 같은 인물이 다시한번 대한민국에 나타나야 한다.


정도령 2006-08-04 15:26:51
뭐거 걱정입니까?
박근혜 대표가 있쟎습니까!!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 다시한번 그 영광이 재현될 것입니다.


대학생 2006-08-04 15:28:59
오원철님의 연재글을 보고 대한민국에 이렇게 위대한 대통령이 계셨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뉴스타운에 감사 드립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하여 선진국을 위하여 다시는 좌파 정권이 들어서서는 안됩니다.

저도 열심히 운동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환경이 2006-08-05 11:56:03
잘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 국민교육헌장 등 등 우리국민들 저력있답니다 박정희 독재정권 그때는 그랬지만 역사가 증명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았고 나라를 위했다 그런데 그때의 국민성은 간 곳이 없다 협동심 순수함 배우려는 의지 모두 국민들의 정서를 교육이 개인의 이익에 두었고 경쟁으로 일관하여 이제 개인 이기주의로 흘러온 결과 외국자본에 무너지는 결과에 한탄 할 뿐이다 이보슈들 님들이여......나의 잘 못이요 우리들 잘못이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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