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탄생 100주년 특집] 박정희와 독도
[박정희 탄생 100주년 특집] 박정희와 독도
  • 편집부
  • 승인 2017.08.31 1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정희 '독도 폭파설'의 진실 "박정희만큼 독도를 생각한 사람은 없다"

▲ ⓒ뉴스타운

뉴스타운은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7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획특집을 마련한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 기록 박물관'임을 자부하는 언론사 뉴스타운이 보유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복원해서 원로 세대와 젊은 세대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번 회에는 2012년 8월 15일자 이상돈 박사(당시 교수, 현 국회의원)의 '박정희와 독도'를 게재한다. <편집자 주>

민주당의 문재인 고문이 “박정희 대통령이 독도를 폭파하려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말로 어불성설이다. 미국에서 공개된 자료에 그런 발언을 암시하는 구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구절 하나로 박정희 대통령의 ‘독도관(觀)’을 판단해서는 아니 된다.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 방문 중에 그런 말을 했다면 그것은 당시 일본이 하도 집유하게 독도 문제를 꺼내서 거기에 대한 반감으로 한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당시 한일 협상을 이끌었던 김종필 당시 중정부장의 ‘독도 폭파’ 발언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일 협정 협상 당시에 일본 측은 집유하게 독도를 요구하고 나서서 거기에 지친 김종필씨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독도를 폭파해 버리겠다”고 한 것이 이른바 ‘독도 폭파론’이다. 독도를 차라리 폭파해 버리겠다고 했던 최후의 방어진 전략이 주효했는지 알 수 없지만, 1965년 한일 협정에서 독도 문제는 명확한 언급이 없다. 이것을 두고 “왜 독도 영유권을 분명히 하지 않았느냐?”고 비난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합당한 비판이 아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국고가 텅 비어 있던 가난한 나라였고,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을 시작한 종자 돈이 급했다. 이런 궁박한 지경을 잘 알고 있는 일본은 그 기회에 독도를 자기 영토로 편입시키려고 했으니, 독도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이 한일 협정을 매듭지은 당시 우리나라 정부의 노력이 오히려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 후에도 독도를 두고 한일 간에 이따금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양국 정부는 그것이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양해를 갖고 있어서 큰 분쟁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한일 양국 간에는 배후에서 이견을 조정할 수 있는 인물과 장치가 모두 소진(消盡)된 것 같다.

울릉도를 방문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1962년 10월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은 동해안의 군 부대를 시찰 한 후 해군 APD 81함(2000톤급 병력 수송 호위함)에 몸을 실고 울릉도로 향했다. 박정희 의장의 울릉도 행에는 수행비서 외에도 민기식 장군과 경상북도 지사, 그리고 젊은 이만섭 기자가 동행했다. 박 의장을 수행한 최고회의 총무수석비서관은 최영섭 해군대령이었다. 당시 박정희 의장을 수행했던 관료들은 모두 세상을 떴으나 1968년에 전역한 최영섭 당시 대령은 올해 88세로 경기도 일산에 거주하고 있다.

필자는 오늘(8월 14일) 수소문 끝에 최영섭 (예) 대령(이하 ‘최영섭 옹(翁)’으로 표시함)을 만나서 박정희 의장의 울릉도 방문과 독도에 대한 박 대통령의 애정과 관심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5.16 직후 최고위원회에 해군을 대표해서 총무수석 비서관으로 차출되어 온 최영섭은 1964년 4월 민정 이양까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지근에서 보좌했다. 1962년 10월 11일 풍랑 속에 울릉도 부근에 도착한 박정희 의장 일행은 상륙용 보트를 타고 육지에 상륙했다. 육지에 도달 무렵에 파도가 크게 쳐서 박정희 의장이 바닷물에 빠지는 일이 일어났는데, 이 때 최영섭 대령이 박 의장을 업어서 뭍으로 나왔다고 한다. 최영섭 옹은 그 때 박 의장이 몸무게가 가벼웠다고 회고한다.

울릉군청을 방문한 박 의장 일행에 대해 울릉군수는 울릉도와 독도의 현황에 대해 설명을 했고, 박 의장은 독도 경비대의 열악한 환경과 울릉도 어민들의 어려운 사정을 주의 깊이 들었다고 한다. 울릉도의 도민들은 박 의장을 열렬히 환영했다. 울릉도에 국가 최고지도자가 방문한 적은 그 전에는 도무지 없었기에 섬 전체가 술렁거렸다.

울릉도에 다녀 온 후 박 의장은 울릉도와 독도에 육지 방송을 들을 수 있는 라디오와 생활필수품을 보냈고, 어선을 동력화하는 데 예산을 지원했다. 울릉도의 어린이들을 서울로 초청하는 행사를 시작해서 1979년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박 의장은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 독도 의용대를 이끌었던 홍순칠 씨 등 일행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청와대로 초청해서 만찬을 베풀었다.

최영섭 옹은 1963년 대통령 선거 개표를 하던 날의 풍경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투표일 다음날 밤 4시까지 박정희 후보가 지고 있자 혁명동지였던 육군 영관장교들은 다 틀렸다고 생각하고 술을 먹기 시작했으나, 박 의장은 모든 일을 하늘에 맡기고 대구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새벽 5시경부터 섬 지역, 특히 전라도 도서지역 개표결과가 나오기 시작하자 박정희 후보가 이기기 시작했고, 결국 당선되었다. 당선이 확정되자 박 의장은 최영섭 대령에게 “총무수석을 하면서 섬 지방 민원을 챙겨준 당신 덕분에 내가 당선됐다”고 덕담을 했다고 최영섭 옹은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1964년 4월, 민정이양을 하게 되자 박정희 대통령 당선자는 최영섭 대령에게 청와대에서 같이 일하자고 권했지만, 최 대령은 “한강을 건넌 혁명동지가 아니다”면서 사양하고 해군으로 돌아가서 해군사관학교 등 근무하다가 1968년에 전역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독도 폭파’를 생각했다고 들고 나온 문재인 민주당 고문에 대해, 최영섭 옹은 “독도를 박정희 대통령만큼 생각한 대통령은 없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관련기사

핫이슈포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