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탄생 100주년 특집] 일제시대와 5.16혁명 시대의 정치경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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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탄생 100주년 특집] 일제시대와 5.16혁명 시대의 정치경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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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에 한번 나올 수 있는 영웅 박정희 (2회)

▲ ⓒ뉴스타운

뉴스타운은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7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획특집을 마련한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 기록 박물관'임을 자부하는 언론사 뉴스타운이 보유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복원해서 원로 세대와 젊은 세대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그 첫 회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실증적인 사실 증거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시스템공학 전문가 지만원 박사의 글 '백년에 한 번 나올 수 있는 영웅 박정희'시리즈를 새롭게 편집해 올린다. 

지만원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은 세계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신화를 창조한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온갖 욕을 다 먹는다"고 전제하고 "일제 피해자들이 있다고 하자. 그들에게 청구자금을 모두 나누어 주었다면 우리는 지금 매우 가난하게 살았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야무진 투자와 경영관리의 덕택으로 대한민국이 잘살고 있다. 피해를 봤던 사람들도 잘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명예로운 보상이 아닌가?"라고 주장했다. <편집자 주>

일제강점 공간의 조선왕국

세계의 유수 열강들은 누가 더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느냐를 국가의 프라이드로 여기면서 식민지 쟁탈전에 몰입했다. 그러나 조선만은 이러한 외부 세상에 눈과 귀를 막고 오직 정적을 모함·모략하여 죽이고 귀양 보내는 데만 열중했다. 당시 이러한 나라라면 누구에게든 먹힐 수밖에 없었다.

1905년 7월29일,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인 육군장관 W.H. 태프트 사이에 비밀협약이 맺어졌다. 미국이 필리핀을 갖는 대신 일본은 조선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며, 이 밀약에 의해 1910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요됐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 루스벨트 대통령은 당시 조선을 이렇게 평가했다. “1900년 이래 한국은 자치할 능력이 없으므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책임을 져서는 안되며,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여 한국인에게 불가능했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능률 있게 통치한다면 한국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미국의 원자탄에 의해 한국이 해방됐을 당시에도 미국은 조선에 자치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만일 당시 조선을 일본이 먹지 않고 러시아나 중국이 먹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이왕 먹힐 바에야 일본에게 먹힌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와 중국은 일본인들보다 더 잔악하게 욕을 보였을 것이다. 그래도 일제치하에서 공부를 했던 사람들은 선악 구별이 반듯하고 도덕심이 강했다. 일본인 교사들 중에는 나쁜 이들도 있었지만 존경을 받는 교사들도 많았다 한다.

5천년 역사! 9천여 회의 외침을 받아 오면서 지배계급은 언제나 외세에 영합하면서 부를 누렸고,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며 목숨을 버린 사람들은 민초들이었다. 그 민초에서 우뚝 선 지도자들이 바로 이순신-안중근-유관순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역시 이런 민초들에서 피어난 꽃들이었다.

이순신, 안중근, 유관순은 민초에서 피어난 정신적 지도자들이었지만, 이승만과 박정희는 국가를 위기에서 건져내고, 현대적 민주국가의 틀을 세우고, 세계에서 꼴찌로 못 사는 거지의 나라를 경제 10위권 국가로 우뚝 세울 만큼의 지도능력을 갖춘 민초출신의 위대한 지도자였다.

당시 조선 인구의 80%는 농업인구, 80%가 한글마저 배우지 못한 문맹, 그야말로 한심한 국가였다.

혁명공간의 한국 경제

1945년에서 1959년까지의 15년간,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원조액은 연평균 1억8천만 달러. 현금이 아니라 물자였다.

정부는 미국에서 받은 잉여농산물, 유연탄, 석유 등을 시장에 팔아 그 돈으로 세출예산을 세웠다. 기업이 없고, 80%의 인구가 피폐한 농촌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다가 피똥을 누는 환경하에서 세금이 어디에서 걷혔겠는가.

잉여농산물 유입은 농촌을 피폐화시켰고, 젊은이들의 이농현상을 초래하여 수백만의 실업자를 유발했다. 해방 이래 보잘것없긴 하지만 그나마의 대기업들은 위에다 정부예산을 부어넣고, 밑에서는 업주와 정치인 및 관리들이 빼 가는 돈통에 불과했다.

밀수품이 범람하고 정경유착으로 사회는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국가의 운명이 암담하기만 했다. 고관대작들은 축첩과 양주와 춤으로 사치와 방탕에 빠졌고 대부분의 정치꾼들은 사기꾼 같았다. 1961년, 박 대통령은 장충단 공관에서 집필한 그의 메모식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 7개년간의 원조는 연평균 5억 달러였다. 경제원조가 2.8억 달러, 군사원조가 2.2억 달러다. 환언하면 한국경제가 완전히 자립하자면 군사 면을 제외하고도 2.8억 달러와 무역적자 5천만 달러를 합쳐 3.3억 달러를 새로이 벌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렇게 된다 해도 이는 현상유지하는 데 그치는 일이다. 이에 가중되는 연평균 2.88%의 인구 증가, 즉 72만 명의 압력은 어찌할 것인가?"

"원조를 받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경제를 운용하는 것은 기적 이외에 바랄 것이 못 되지 않는가? 위기를 고하는 수많은 국민의 생활난, 해마다 늘어만 가는 식량부족, 30%의 실업률, 모두가 시급한 해결의 길을 바라고 있는 데 반해 해결방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실업률 30%! 지금의 실업률은 얼마인가? 3.5%. 매년 30만 명의 대학생들이 졸업을 하지만 겨우 5천 명 정도만이 취직을 하는 지금의 실업률이 겨우 3.5%라 하니, 당시의 30% 실업률이 얼마나 살인적인 것이었겠는가!

5·16혁명! 미국은 박정희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서독에 광부를 팔고, 간호사를 팔았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백 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손이 고우면 떨어질까 연탄에 손을 비비며 손을 거칠게 만들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코올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하루 종일 닦았다. 광부들은 지하 1천 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을 캤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간호사와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할 수 있을까?” 이들에 부쳐진 이름이 ‘코리안 엔젤’이었다. 이들을 방문한 박정희! “우리 열심히 일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합시다.” 얼굴이 찌든 광부와 간호사들에게 그는 이 말만 반복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광부와 간호사들이 몰려나와 육 여사와 박 대통령의 옷을 잡고 통곡했다. 광부들이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절을 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서도 박 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손수건을 주면서 힘주어 말했다. “우리가, 서독 국민들이 도와 주겠습니다.” 서독 국회에서도 연설을 했다.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백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백70달러, 태국 2백20달러 등 이때 한국은 68달러였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북한은 우리보다 2배, 필리핀은 3배나 더 잘 살았다.

가발을 만들어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가 다녔다. “머리카락 파세요!” 아낙네들이 머리카락을 잘랐다. 서울 간 아들놈 때문에 잘랐고, 쌀을 사기 위해 잘랐다.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수출을 했다. 곰 인형도 팔았다. 쥐잡기 운동! ‘코리안 밍크’도 만들어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다 팔았다. 1965년, 수출이 1억 달러였다. 세계가 놀랐다. 그들은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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