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다리 곰의 NLL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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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다리 곰의 NLL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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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곰이다, 살았다. 만세!”

1952년 어느 봄날, 먼동이 틀 무렵 초도(椒島) 부둣가에 한 무리의 남녀노소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마침내 환성이 터졌다. 일출의 후광을 등지고 있어 면전이 어두웠으나 선두에 떡 버티고 서있는 7척 장신은 분명 “숫다리 곰” 그였다. 그의 큰 발에 맞는 기성화는 일찍이 없었다. 나중 에스콰이어제화는 새 본을 떠서야 그에게 특대형 맞춤구두를 지어주었을 정도였다. 

수월천(水月川)은 구월산에서 발원하여 황해에 이른다. 은율사람들은 그 개천을 “숫다리 개울”이라 불렀다. 수월부대 후방참모 김병철은 그때 자기 휘하를 이끌고 목숨을 건 침투작전을 무사히 마치고 귀대하던 참이었다. 그가 탄 배에는 인민군이 점령한 내륙에서 야밤에 탈취한 식량과 가축들이 실려 있었다. 이것은 부대원과 피난민, 그리고 딸린 식구들을 위한 먹거리였다. 

그들은 1951년 1.4후퇴 이후 은율 시내에서 적화통일 군대에 쫓긴 반공게릴라로서, 초도에서 집결하여 고향수복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즈음 미 극동사령부의 주한첩보연락처(Korea Liaison Office)는 이들 원주민 무장부대가 적진에 대한 첩보와 후방교란의 도구로써 활용할 가치가 있음을 알아챘다. 세칭 켈로(KLO)는 약간의 병참 지원으로 쉽게 이들의 지휘권을 확보했다. 그리고 수월부대 800명은 이때 “동키(Donkey) 7연대”로 개편되었다.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1880-1964)는 한반도 통일을 내다보고 있었다. 비록 쓰나미처럼 밀어붙이는 30만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그는 일단 작전상 후퇴했으나, 세계 공산주의와의 일대응전에서 최종 승리를 믿고 있었다. 우선, 중공군은 압록강에서 한강 주변까지 죽죽 내려왔지만 기나긴 병참선 때문에 이내 큰 고통을 당해야 했다. 또 무엇보다도 필승의 근거는 유엔군의 제해권과 제공권이 공산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것에서 나왔다. 

하지만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소련군까지 개입되는 제3차 세계대전 발발에 큰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내 1951년 4월 맥아더의 직위를 박탈하고, 휴전(armistice) 협상으로 들어갔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칠순을 넘긴 5성 장군은 양원합동회의 환영연설에서 이렇게 비겁한 트루먼에게 응수했다. 

아래는 맥아더 은퇴연설의 말미에 포호했던 한국에 관한 언급이다.

“세계의 모든 나라 중에서 전력을 다해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는 나라는 오지로지 한국뿐입니다. 한국민의 용기와 불굴의 의지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박수) 그들은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이 제게 전한 마지막 말은 ‘태평양을 포기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박수)” 

그러나 정전협정은 그 후로도 2년을 더 끌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의 외고집을 꺾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그 타협책으로 내건 화천수력발전소의 확보 때문이었다. 휴전 이후 경제재건에 있어서 에너지의 뒷받침은 필수조건이었던 것이다. 당시 인민군은 거의 괴멸상태에 빠져 있던 터라, 한국전쟁은 아이러니하게 유엔군(UN Forces) 대 중공군(Red Chinese Forces)의 맞대결 양상이었다. 발전소가 소재했던 화천 구만리(九萬里) 지역은 당연하게 중공군이 철통 같이 지키고 있었다. 

1951년 5월 하순, 닷새에 걸친 “파로호전투”는 6.25동란 중 최대의 전과를 올린 작전이었다. 무려 6만 2천 명의 중공군이 사살 또는 생포된 전투였다. 이때로부터 대붕호(大鵬湖)는 파로호(破虜湖)로 바꿔 불렀다. 결국 구만리발전소는 아군이 확보했는데, 역으로 이런 조건에서 북의 김일성 주석은 휴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원통해서 한 달 동안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말하자면, 화천지역이 쌍방 간 휴전의 포인트였다. 

6.25전사에서 수많은 전투는 이후로부터 2년 동안 중부전선에 몰려있다. 화천을 중심으로 좌우로 철원과 양구를 끼고, 젊은 피가 수많은 능선들을 붉게 물들이고 나서야 끝이 보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유엔군은 사기가 오르고, 공산군은 위축되었다. 사실 처음부터 유엔군과 공산군은 임전자세가 뚜렷하게 달랐다. 남쪽과 유엔측 참전 16국 군대는 인류애로 뭉쳤지만, 공산측 연합 3국 군대는 노략질에 빠져있었다. 

1953년 7.27정전조인식 때, 밀고 밀리던 중부전선은 북한강 지류 금성천을 사이에 두고 남쪽은 대성산(1,175m) 고지에서 북쪽은 오성산(1,062m) 고지에서 마주보고 있었다. 그날 오전 11시, 총칼을 내려놓은 양쪽 병사들은 금성천에서 함께 멱 감고 물놀이했다고, 누군가 증언했다. 그러나 병기를 풀어놓고 38선 이남으로 철수명령을 받은 동키부대에게 휴전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흉악한 평화였을 뿐이었다. 구월산 정기를 이어받은 대원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치욕을 남겼다. 

서해 상에 그어진 북방한계선 NLL은 248km 내륙에 그어진 비무장지대 DMZ와 다르다. DMZ는 중앙의 군사분계선과 그 2km 아래 남방한계선(남쪽 철책선) 사이의 띠이고, 그 밖으로 10km 더 내려와 민통선이란 완충지대(cushion)까지 덧대고 있다. 휴전 당시 해상권을 거의 장악했던 유엔군 측의 NLL은 남쪽 주민을 향한 북한지역 접근제한용이다. 초도를 포기하는 식의 해상 민통선 같은 역할이었던 것이다. NLL은 전후 분쟁을 최소화하는데 주력하는 개념이었다. 

전후 실향민의 하나가 된 중년의 숫다리 곰은 파괴된 화천발전소 재건현장에서 마지막 충성을 다했다. 일부 대원과 일가 친족을 이끌고 그는 강원도 화천에서 인고의 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그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NLL에 대한 회한을 긴 침묵으로 삭혔다. 숭고한 것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을 낸다. 

“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 (출애굽기 20장 21절)

후기 – 고 김병철 님은 필자의 장인이시다. 동지들이 부른 “곰”이란 별호를 사위가 사용한 무례함을 그분은 천국에서 이미 용서하셨을 줄로 믿는다. 필자는 생전에 고인의 침묵을 이해 못했고, 그저 평범한 촌로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소천하신 이후부터 조금씩 그의 숭고함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국가기록원에서 애국투사의 흔적을 발굴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국가유공자로서 유골이나마 이천호국원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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