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구의 국보위 근무 사실까지 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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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구의 국보위 근무 사실까지 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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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명에 따라 근무하는 것이 무슨 죄라는 말인가

▲ ⓒ뉴스타운

이완구가 국보위에서 근무했던 사실과 함께 거기에서 받은 훈장에 대해 문제시되고 있는 모양이다. 이완구는 이렇게 해명했다. 국보위 설치가 내란행위 였다는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 "치안본부 기획감사과에서 경정으로 재직 중 파견 근무 명령을 받았고, 문서의 수발과 연락 업무 등을 담당했다. 당시 국보위 파견자 전원에게 수여된 것으로 반납 여부는 신중히 고려해 보겠다."

이는 좌익들의 우익에 대한 정치공세로 이완구의 죄를 따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 항목에 대해 이완구는 떳떳하다. 경찰이 명에 따라 근무하는 것이 무슨 죄라는 말인가? 빨갱이 인간들의 돼 먹지 못한 질문에는 대답해야 한다. 오히려 "당신이 당시 내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하고 당당히 맞서라.
 
전두환의 국보위 설치가 정권찬탈을 목적으로 한 내란행위 였다는 것은 1997년의 빨갱이 판사들의 판결이었고, 국보위가 당시 나라를 지킨 충성의 기구였다는 것은 내가 "1995년의 감찰 수사기록"을 연구한 결과였다.

국보위설치운영이 내란(국헌문란)인가? 

검사 송찬엽 : 국보위는 피고인들이 원래 유신헌법에 규정되어 있던 대통령 긴급조치권에 의해서 비상기구형태로 설치하려고 하였으나, 최규하 대통령이 완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은 계엄법과 정부조직법에 따른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구 형식을 빌려 설치된 것입니다.

우선 국보위는 대통령이나 계엄업무의 주무기관인 국방부장관과 계엄사령관이 그 필요성을 느껴 추진한 것이 아니라 정보수사기관인 보안사의 일부 참모들이 사전에 계획하고 전두환 피고인이 주도하여 추진되었습니다. 또 실제 구성에 있어서도 국보위위원 24명중 14명, 상임위원 30명중 18명이 현역장성들로서 이미 대통령에 대한 보좌나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장관, 차관, 또 행정부의 실무자 이외에는 모두 현역 장성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 운영을 보아도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보위 전체회의는 발족하던 날을 포함하여 단 2번만 형식적으로 개최되었고, 대부분은 전두환 피고인이 위원장으로 있던 상임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습니다. 국가를 보위하기위한 국책상항을 심의하기 위하여 설치된 국보위는 1980.6.5.에 발족한 후 10.27.까지 약 5개월가량 존속하면서 전두환 상임위원장의 주도로 상임위원회 아래 행정 각부에 대응한 14개 분과위원회를 두고 그 분과위원회별로 공직자 숙정, 언론인 해직, 교육정상화 조치, 삼청교육, 부정불량식품과 약품단속, 영세중소기업에 대한 입지대책, 전과기록말소, 수출입절차 간소화 조치 등을 추진하였습니다.

결국 비상사태에서 국가안보와 사회질서 회복이라는 본래의 계엄업무에서 벗어나 여론의 호응을 유도하기 위하여 입법과 행정 조치가 필요한 정책들을 추진한 것입니다. 이밖에도 전두환 피고인은 국보위 법사위원들을 동원하여 개헌작업에도 관여하였습니다. 또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에는 국보위 활동이 거의 없다가 개헌 시에는 국회의 권한을 대행할 과도입법기구로 삼을 생각까지 하여 결국은 국가보위입법회의로 명칭을 변경해서 재구성한 다음에 그동안 국보위가 취한 일련의 조치들을 뒷받침 하고 법제화하는 법률을 제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국보위는 단순히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구에 불과했던 것이 아니라 비상기구 내지는 혁명위원회처럼 운영됨으로써 국보위 상임위원회가 사실상 국무회의와 행정 각부 그리고 국회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대신하여 헌법기관인 국회, 행정부, 대통령을 무력화시키고 그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검찰은 비록 국보위가 외관상으로는 당시 헌법과 법률이 정한 테두리 내에서 대통령의 적법한 권한행사를 바라는 건의의 형색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설치단계에서부터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구로 설치한 것이 아니라, 헌법상 대통령에게 부여된 긴급조치권에 기한 비상권력기구로 설치하여 입법, 행정, 사법을 통제함으로써 대통령과 행정각부 등의 권능행사를 무력화 할 의도로 그 계획을 수립하여 대통령에게 건의한 것이고 또 실제 운영에 있어서도 국보위 상임위원장으로서 국보위를 주도한 전두환 피고인이 대통령과 내각 등을 배제하고 국정을 좌지우지 한 것으로 보고, 이를 형법 91조 소정의 국헌문란행위로 본 것입니다.

변호인 전상석 : 형법91조가 정하는 국헌을 문란하게 한다는 것(내란)은 첫째,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거나 둘째,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헌법이 정하는 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사건 공소사실 중 헌법기관인 국회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였다는 것은 원심 판시와 같이 1980.10.27. 공포된 제5공화국 헌법 부칙 제5조 1항에 따라 제10대 국회의원의 임기를 종료시켜 국회를 해산시킴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며 강압 등 물리력에 의하여 이를 전복 또는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것이 아니며, 더구나 국보위가 설치 운영됨으로써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제5공화국 헌법은 1980.10.27. 국민투표에 의하여 제정된 헌법입니다. 그 헌법 부칙 제5조 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그 헌법 시행당시 국회의원의 임기가 그 헌법 시행일로서 종결되었다면 그것은 국보위의 설치운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국헌문란을 따진다면 제5공화국 헌법의 개정을 논하여야 할 것입니다. 차라리 이 '헌법개정' 자체를 내란이라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편 검찰은 그 석명에서 '공소사실의 구성에 관하여'라는 제호아래 국헌문란의 목적을 가진 피고인들은 군부에 집결된 의사라는 명목으로 최규하 대통령에 의한 국가 긴급권 발동의 형식을 빌려 1980.5.17.24:00를 기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조치를 취하였고, 이어 국회의사당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출입자를 통제하여 국회를 열리지 못하게 함으로써 국회 권능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불성설입니다.

변호인 석진강 : 국보위 설립이 국헌문란과 관계가 되려면 두 가지로 나누어 관찰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국보위가 설립된 법률적인 근거 법규, 국보위의 조직과 권한이 어떻게 규정되어 있고, 그것이 국헌문란과 연결되느냐 안 되느냐, 두 번째로는 실제운영에 있어서 그것에 가탁(거짓 핑계)해서 국헌문란행위를 한 것이 있느냐,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더 사안을 명확히 한다고 봅니다.

국보위를 대통령령이 아니라 긴급조치권에 의해서 비상권력기구로 만들려고 건의했는데 채택이 안 되었다. 그런데 건의한 것 자체가 일단 시도한 것이니까 국헌문란의 목적이 있다는 취지인 것 같습니다. 채택도 안 된 이러한 사항을 가지고 시도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국헌 문란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매우 부당합니다.

다음에 국회 해산을 건의한 것을 국헌문란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회 해산권은 당시 헌법에 의해 대통령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국회 해산권을 행사 했다 하더라도 소정 법정기일 내에 즉시 재선거하도록 제도가 되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회를 해산했다고 해도 의회제도가 폐지되는 것이 아니고 국회 권능의 행사가 봉쇄되는 것이 아닙니다.

국회 해산권이라는 것은 국가의 중요한 국책을 결정할 사안이 있을 때, 국민 전체에 관련된 사안이 있을 때 대개 국민의 의사를 묻기 위해서 국회를 해산해서 그 사안에 대해서 입후보자들이 주장하도록 해서 재선거를 하는 것이 의원내각제도의 운영실태입니다. 대통령에게 국회해산을 해서 국회를 새로 구성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건의했다고 해서 국회 해산이라는 말이 나왔지 않느냐, 그것이 바로 국회제도 폐지이고 국회 기능 봉쇄다 이런 논리는 도저히 성립할 수 없다고 봅니다.

다음에 국보위도 긴급조치로 설립하려고 했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만 긴급조치로 어떤 내용을 어떻게 설립하느냐 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현출되지 않았습니다. 검찰에서는 입법, 사법, 행정을 통제하는 비상기구를 설립하려고 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거기에 대한 증거는 없습니다.

또한 그것이 채택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대통령의 계엄사무를 보좌하기 위해서 국보위를 설치하자는 구상 하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설치 근거는 계엄법 9조, 11조, 12조에 있다는 것은 국보위설립 백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계엄법 9조에는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을 지휘 감독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11조에는 비상계엄 시 입법부는 빠지고 행정, 사법사무에 대해서 지휘 감독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12조는 그런 취지의 행정감독을 받는 자의 입장을 규제한 것이니까 같은 취지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계엄법 시행령 7조입니다. 내용은 대통령 또는 국방장관이 계엄법 제9조의 규정에 의하여 계엄사령관을 지휘 감독함에 즈음하여 국책에 관계되는 사항은 첫째, 국무회의에 부의하여야 하며 각 부처의 소관사무 중 중요한 사무와 관련 있는 사항은 그 주무부처의 장의 의견을 듣거나 협의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엄을 하더라도 각 행정부의 의견을 충분히 존중하고 또 평시와 마찬가지로 헌법규정에 의해서 국무회의의 의견을 거치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훈시 적으로 계엄법 시행령 7조는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국보위가 위법한 기구로 설립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있기 때문에 당시의 정부조직법 5조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행정기관에서는 그 소속 소관사무의 범위 아래서 필요할 때는 대통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시험, 연구, 문화, 공공시설 등 기타 자문기관 등을 둘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근거법규와 그러한 취지에 의해서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구상되고 설치된 것입니다. 이 위원회는 1980.5.27. 대통령령 9897호로 설립되었는데, 간단히 설치목적은 지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계엄법 9조,11조 규정에 의해 계엄업무를 지휘감독함에 있어 대통령을 보좌하고 대통령의 권한에 속하는 국책사항을 심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구성을 보면 총리, 부총리는 물론이고, 각부장관 또 내각에 속하는 정보부장, 비서실장, 계엄사령관, 합참의장, 각 군 참모총장, 보안사령관 등이 당연직 위원으로 선임되게 되어 있습니다. 국보위는 전부 대통령이 적격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임명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대통령이 의장으로서 소집 권한이 있고 어떤 것을 토의할 것이냐 하는 3조의 의제 결정권은 대통령이 가지고 있습니다. 기타 상임위원회는 지금 말씀드린 많은 기성 위원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법률적인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국보위 내용은 모두 대통령이 장악하고 있었던 기구임이 명백합니다.

이러한 조직을 보고 대통령 및 행정각부를 국보위가 무력화 시켰다, 무력화 시킬 목적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법률상 불가능 합니다. 또한 실제로 국보위 운영사항은 모두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되고 그 승인 하에 이루어진 것임에 틀림없으며, 이 사실은 검찰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국보위가 실제운영에 있어서 국헌문란에 해당되는 행위를 했느냐 하는 점을 검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지금 원심판시가 국보위 행위로서 거시하고 있는 것은 공직자 숙정과 언론인 강제해직 밖에 없고 공소장에는 그것 이외에도 검찰에서 잠깐 언급하신 불량식품단속이라든지 과외수업통제라든지 이런 일반행정에 속하는 일을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기획했다는 것이 공소사실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 행정부에서 집행해야 할 임무에 대해 국보위에서 아이디어만 내서 그 집행은 전부 행정부 조직을 통해서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행정각부를 무력화 시켰다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이고 원심판결문에 거시되어 있는 공직자 숙정, 언론인 강제해직만을 설명 드리고 끝마치려고 합니다.

공직자 숙정은 각 부처가 부적격 공무원이라고 생각되는 명단을 작성해서 각 부처가 사표 제출을 종용했고, 해당자들이 사표를 제출한 것입니다. 또 언론인 강제 해직은 국보위에서 문공부와 각 언론기관의 의견을 들어서 언론인으로 부적격자라고 생각하는 90명 내외의 명단을 만들었습니다. 언론인 강제해직에 대한 유일한 증거는 이상재와 권정달의 진술밖에 없고, 이 두 사람의 진술에 의하면 90명 내지 100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명단을 각 언론사에 통보해서 자진 사표 제출을 종용하도록 해서 언론계를 숙정하자는 것이 기본 아이디어 였습니다. 이 추진 과정에서 문공부는 문공부대로, 각 언론사는 언론사대로 90명은 너무 적다, 해서 임의로 인원을 불려서 각자에게 통보하여 사표 제출을 종용했는데 그 결과 국보위에서 통보한 90명이 933명으로 된 것입니다. 이것이 원심이나 당 법정에서 권정달과 이상재의 증언에 의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공직자 숙정은 각 부처에서 명단이 작성된 것이니까 행정 각부의 권능행사를 무력화 시킨 것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고, 언론인 강제해직은 그 내용이 지금 말씀드린 것과 같습니다. 더구나 개인 주식회사인 언론사의 언론인이 해직 되었다고 해서 헌법기관인 문공부의 권능행사가 어떻게 무력화 될 수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국보위의 행위로 인해서 행정부의 권능행사가 무력화 되었다는 논리는 이미 논리의 비약이라는 것보다도 논리의 파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전부 대통령의 사전보고나 승인을 받고 집행했는데 어떻게 대통령의 권한행사가 무력화 되는 것입니까. 결론적으로 국보위의 설치 자체나 운영으로 인하여 대통령이나 행정 각부의 권능행사가 무력화 되었다는 것은 검사의 독단적인 상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법률체제상 그렇게 될 수도 없고 또 실제운영도 그렇게 된 바가 없으며 무력화 되었다는 입증 자체가 없기 때문에 국보위의 설치운영은 국헌문란의 목적과 도저히 관계가 없고 연결될 수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검사 김상희 : 국보위가 검찰에서도 법률의 전체적인 테두리 하에서 설치되고 하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닌데, 이 사건의 특징은 피고인들이 현행법의 테두리를 지키기 위해서 적법한 외관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그 운영의 실질은 그렇지 않지 않느냐 그러니까 껍질과 알맹이는 다르다 하는 차원에서 이 문제도 접근해야 하는 것입니다.

변호인 정영일 : 접근방식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 주제에서 재가가 필요하냐 필요하지 않느냐를 따질 때도 접근방식의 문제이다, 그리고 두 번째 주제에서 간접정법이냐 아니냐를 따지니까 그것도 접근방식이 다르다, 중요한 쟁점이 나올 때마다 접근방식이 다르다고 하면서 피해 가시는데 도대체 접근방식이 무엇입니까? 형법에 있는 것도 아니고 형사 소송법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검찰에서 유죄의 결론을 내려놓고 여기에 안 맞으면 접근방식이 안 맞는 것이고 여기에 맞으면 접근 방식이 맞는 것이 아니냐는 하는 의문이 듭니다. 또 한 가지, 그것을 생각하다 보니까 검찰에서는 이 사건에 관해서 정치와 법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두환 피고인께서 집권에 이르는 과정이 정치학 교과서에 써놓은 대로 안됐다, 정당한 절차가 아니었다 하는 문제와 피고인들의 행위가 형법에 규정된 내란죄라든지 내란목적살인죄라든지 군형법상의 군사반란죄에 해당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 약

-국보위 설치가 내란이었다는 것은 관심법의 전형-

검찰은 비상계엄전국확대가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또는 각료 그 누구도 제기하지 않은 문제인데 전두환이 업무와 관련 없는 보안사 참모를 활용하여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통과되게 한 것이기 때문에 전두환에게 정국 주도의 의도가 있어서 한 일이며, 또한 비상계엄전국확대는 불필요한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전두환이 이를 주도한 것은 국방장관과 국무총리를 지휘선상에서 배제하고, 계엄사령관을 대통령이 직접 지휘하도록 함으로써 내각을 배제하고 국정운영을 계엄사령관이 독차지 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했다.

국보위에 대한 계획 역시 국방부장관이나 계엄사령관, 또는 국보위 설치령의 제안기관인 총무처장관이 그 필요성을 느껴 추진한 것이 아니라, 수사기관인 보안사가 주도한 것이고, 국보위에서 추진한 것들은 계엄업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도 전두환의 정국 주도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자기 소관이 아닌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비상계엄전국확대와 국보위설치를 최규하 대통령에게 건의한 것은 처음부터 전두환 등에게 집권의도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 이는 관심법이다.

삼청교육대

암흑의 1980년

박 대통령이라는 엄격한 대통령이 서거하자 국가에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벌어졌다. 박정희에 항거하던 소위 재야 이념세력들이 김대중을 중심으로 뭉쳐 국민연합이라는 사실상의 정당을 이끌면서 김영삼의 신민당, 김종필의 공화당을 상대로 전국 주도권 잡기 경쟁을 시작했다. 이들은 학생시위와 노동시위를 부추기면서 조기 대선을 치르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는 최규하 정부를 해체하고 거국내각을 구성하자고 압박했다. 이 압박수단이 학생시위요 노동시위였다. 이들에게는 정권만 중요했지 국가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1980년 1월 9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농성투쟁을 벌였고, 이를 신호로 하여 4월 29일까지 5개월간 전국적으로 719건의 노사분규가 발생했다. 이는 1979년 12개월에 걸쳐 발생했던 노사분규 수의 7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80년4월17일, 강원도 동원탄좌 사북영업소 광부 1,000여 명이 노조지부장이 체결한 20% 임금 인상안이 잘 못됐다며 노조지부장 부인을 나체로 정문 기둥에 묶어 놓고 45시간 동안이나 린치를 가하는 등의 난동을 부렸다.

4월 21일부터 3일간 광부들의 부인까지 동원한 3,000여 명이 곡갱이 파이프 등을 가지고 광업소, 경찰지서, 기차역, 도로를 점거함으로서 사북일대가 완전 무법천지가 되었다. 이런 폭동사태는 계엄군 11공수여단을 투입함으로써 4월 24일에 진압됐다. 여기에서 경찰 1명이 사망했고 7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22억 원의 재산피해를 입었다.

이후부터 노사분규가 전국규모로 확산되었고, 4월 25일부터 20일 동안에는 무려 987건의 노사분규가 발생했다. 이들의 구호 역시 단순한 노사문제에 대한 구호가 아니라, "죽기 아니면 살기다" "계엄령을 해제하라" "배고파 못 살겠다, 같이 살고 같이 죽자"는 정치적 구호로 변질됐다. 이러한 노사분규 역시 재야세력에 의한 선동의 결과로 평가됐다.

1980년 4월초, 치안본부는 계엄위원회에 무정부 상태에 대한 통계를 보고했다. 1980년 1월부터 3월까지 발생한 범죄에 대한 통계였다. 살인이 64.3% 급증했고, 강도가 113.9%, 폭력이 20.1%, 절도가 21.4%, 밀수가 122.6% 급증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서정화 내무장관은 "강력범들에 대해서는 사회복귀가 불가능하도록 강제 노동이나 강제수용 등의 특별관리가 필요하니, 계엄당국이 이를 뒷받침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건의를 했다. 이는 삼청교육대의 필요성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대학세력과 노동세력의 폭력시위가 연일 끝 간 데 없이 치닫고 있었던 당시 사회적 인사들은 좌불안석이었다. 종교계, 경제계, 언론계 등에서 파국적 난국을 하루 빨리 수습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던 것이다.

4월 27일,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학원소요사태에 강력하게 대응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4월 30일, 전국 계엄지휘관회의를 열어 학원-노조의 난동이 법치주의의 한계를 넘은 것이므로 단호하게 대처할 것을 지시했다. 5분 대기조 편성, 진압훈련 등 소요사태 대비훈련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국보위와 삼청교육대

당시 세상물정에 어두웠던 최규하 대통령에게 전두환은 계엄 시에 한시적으로 대통령을 도울 수 있는 대통령 자문기구의 필요성을 보고했다. 이른바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였다. 1980년 5월 21일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은 국보위 설치 요강을 마련하여 이원홍 청와대 민원수석비서관에게 제시했고 이원홍 수석은 이에 대한 조문화 작업을 마친 후 5월 25일경 국보위 설치에 대한 대통령령을 성안했다. 이는 계엄법과 정부조직법을 근거로 한 것으로 합법적인 것이었다.

5월 26일 권정달은 국무총리실에서 주영복 국방장관과 박동진 외무장관이 배석한 가운데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에게 국보위 설치안을 보고했고, 이어서 5월 27일 16시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에 주제로 열린 제46회 정례국민회의에서 의결되고 5월 31일 대통령령 제9897호로 공고됐으며, 5월 31일 오전 10시 국보위 의장인 최규하 대통령 주제로 첫 국보위 전체회의가 열렸다. 국보위의 당연직 위원은 15명이며, 국무위원 및 각군 총장 이상의 군수뇌들로 구성 되었다.

임명직 위원은 육군소장 이상 10명의 장군들과 8명의 각료, 청와대관계자 2명으로 구성되었다. 국보위에는 상임위원회가 있었다. 위원장은 전두환이었고 그 밑에 13개 분과위원장이 있었다. 임명직 상임위원은 18명의 군장성과 10명의 공무원으로 구성되었다.

국보위에는 4대 기본목표가 있었다. 안보태세 강화, 합리적 경제시책, 기강확립이었고, 추진 지침으로는 계급선동 근절, 국가전복기도의 제거, 불법시위 근절, 사회비리 척결, 정치풍토 쇄신, 국가이익을 우선시하는 언론풍토, 종교를 빙자한 정치활동 통제, 건전한 노사관 확립, 사회악 근절, 과외과열 진정 등이었다.

6월 18일 계엄사는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혐의자들은 당국의 정화 의지에 순응하여 853억 원의 부정축제 재산을 자진 헌납하기로 하고 모든 공직에서 사퇴할 것을 밝혀 형사처벌을 유보한다고 발표했다.

7월초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과 김만기 정화분과위원장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2급 이상의 공무원에 대한 숙정 결과를 마련하였다고 보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은 적법하고 합리적인 기준에 의하여 관계부처의 장과 충분한 협의를 거쳐 공정하게 처리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국보위 상임위원회는 7월9일 장관1명 차관6명 도지사 3명을 포함 2급 이상 공무원232명을 숙정하였다고 발표했고, 그 후 7월31일까지 입법부11명, 사법부 61명 행정부 5,418명 등 공직자 5,490명과 국영기업체 금융기관 및 정부산하단체 등 127개 기관 임직원 3,111명 등 총 8,601명이 사임했다.

7월30일 국보위는 과외 금지, 대입 본고사 폐지, 대학졸업 정원제 등을 골자로 하는 교육정상화 방안을 발표했다.

8월 4일 국보위는 사회악일소를 위한 특별조치를 발표하고 불량배 소탕에 관한 삼청계획 제5호에 따라 11월 27일 제4차 단속까지 모두 57,561명을 검거하여 그중 3,052명을 재판에 회부하고 38,259명을 '군부대 정화교육' 이른바 '삼청교육'에 회부했으며 16,250명을 훈방 조치했다. 그밖에 국보위는 부정불량 식품 및 약품단속을 실시하고 전과기록을 말소하는 등 신원 기록에 대한 정비작업을 단행했고, 해외인력 송출절차와 수출입 절차를 간소화했고 '연좌제'를 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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