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에 열린 하늘의 문
민들레에 열린 하늘의 문
  • 안봉규 논설위원
  • 승인 2013.10.09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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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은 모든 것에 통한다

▲ 민들레 홀씨
신 삼종지도(新 三從之道)라는 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남자가 어려서는 어미의 뜻에 잘 따르고, 결혼하면 아내 말을 잘 듣고, 그마저 사별하여 늙어지면 딸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남자는 최소한 면피하며 여생을 잘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웃자고 하는 것인데, 예전에 통했던 부녀 삼종지도의 구도를 뒤바꿔 놓은 개그이다. 조선시대 남녀는 상하로 차이가 있어서, 남자는 통치하고 여자는 복종해야하는 그런 관계였다.

주종(主從 Lord-Servant)이란 주인은 부리고 머슴은 섬기는 관계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주님”이었다. 그가 잡히시던 전야의 만찬에서 겉옷을 벗은 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이런 짓은 유대의 전통에서 “종놈”들이 맡았던 역할이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요한복음 13장 15절, 17절)” 주님은 이때 제자들에게 부림과 섬김의 뜻을 뒤바꿔 놓았다. 천한 것의 통념을 귀한 것으로 역전시켜 생각을 풀어놓은 사건이었다.

민들레 권사님이 미수(米壽)를 끝으로 마침내 소천 했다. 거동이 불편했던 말년에 슬하의 세 딸이 번갈아 자택에서 모시기는 했지만, 그보다 간병하기 더 좋은 하남시의 어느 요양원에서 1년 2개월을 보내셨다. 그러다 뇌경색으로 모 성심병원 노인전문병동으로 입원하였고, 며칠 지나서 응급실로 들어갔다. 이때 일가친척들은 임종을 현실로 받아드리고, 남양주시 축령산에 있는 모 노인전문병원으로 옮겨 최후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서 무려 1년 3개월이나 더 버티는 놀라운 생명력을 나타내었다. 사망의 직접 사인은 패혈증이었다.

임종 몇 달 전 즈음, 종합병원 응급실로 이송하기를 바라는 주치의의 긴박한 제안을 받았을 때였다. 그녀는 온몸의 피부가 까맣게 각질로 변하고 사지가 벌레처럼 움츠러들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불경스럽게도 딱정벌레가 연상되었다. 그리고 카프카의 대표작 “변신(變身)”이 어렴프시 떠올랐다. 시체가 부패하는 것은 생전의 정을 끊기 위한 섭리라는 말처럼 이 현상을 해석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냉정하게 의사의 회피성 바람을 꺾었다. 다만 가능한 다른 치료 방법을 부탁하는 정도에서 돌발 사태를 수습하였다.

어쨌든 다른 약제가 주효했음인지 그녀의 상태가 호전되었고, 달포가 지나자 검은 살갗은 딱지가 되어 허물처럼 벗겨지면서 하얀 피부가 밖으로 들어났었다. 얼굴 표정도 안에서 조명이 켜진 듯 환하게 비춰보였다. “아, 민들레구나. 그것도 하얀 민들레!” 나는 속으로 외쳤다. 그녀의 성큼한 백발은 높다랗게 올라선 꽃대에 달린 민들레 깃털이었다. “이제 며칠 안 남았구나, 바람이 한번 훅 불면 깃털은 홀씨 되어 갈래갈래 흩어질 거야.” 나는 다짐이나 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날려간 홀씨들은 아무 싸리문 둘레라도 걸리면 그곳에서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키를 낮추어 정착할 것이다.

일찍이 민들레의 부친은 일제 강점기 시대 황해도 은율군청에서 실세 주사였다. 일본인 군수는 청사로 찾아오는 고위관리들과 구월산 아래의 과수원이었던 민들레의 사저에서 회식했다.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은 비공식 식당인 셈이다. 민들레는 2남6녀 중 맏딸이었고, 위 오빠는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식구들은 은율읍 교회를 다녔다. 그러나 단란했던 가정은 해방과 6.25 동란을 맞으며 풍비박산 되었다. 그 시대적 혼란기에 부친이 친일파로 몰려 타지로 쫓겨났고, 공산당 선전에 내몰린 오빠는 자살로 항거했다. 그리고 민들레는 켈로대원이었던 남편 따라 월남하여 이곳저곳 떠돌다가 당시 오지였던 강원도 화천에서 정착했다.

민들레는 한복에 고운자태가 들어나는 아담한 여인이었다. 남자에게 혹할만한 예쁜 얼굴도 가졌지만 오히려 범접하기 어려운 기품이 먼저 서렸다. 이런 분위기는 어려서부터 교회 활동을 통한 기도 생활에서 우러나온 결과였다. 사람들에게 말로 전하기 이전에 이미 자기의 뜻이 상대에게 감응으로 통하는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 그녀는 도대체 수다를 모르는 여자였다. 다만 섬김의 본을 실행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민들레 권사를 통하여 유교적 삼종의 윤리와 기독교적 섬김의 자유가 온전히 일체가 되었다고 강변한다면, 좀 지나쳤을까.

그녀는 군인 도시였던 화천에서 “오뎅” 코너가 있는 한식당을 운영했다. 전후 폐허가 줄지어 쌓여있고 퇴락한 산촌마을이었지만 기품 있는 마담이 있는 한 그 식당은 어느새 지역의 고위급 인사들이 자리를 차지하였다. 자연스럽게 주류 판매가 늘었고, 아가씨 종업원들이 흥청거렸다. 이때 민들레는 새벽기도회의 일번 교인이었다. 교회에서 날마다 회개의 눈물을 뿌렸지만 현실은 장사를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1번과 2번 사위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장모를 먼저 존경하게 되었다. 이런 장모라면 그 딸은 더 볼 것도 없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엄마, 예수님 만나 봤어요?”

“으-음-.” 3번 딸이 곁에서 큰 소리로 물었을 때 민들레는 꿈결처럼 간신히 대답했다.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셨어요?”

“이-따-와.” 이 말은 마지막을 맞았던 축령산에서 여러 번 남겼는데, 결국 유언이 되었다.

우리들은 평소 하늘나라에 갈 자신이 있다고 장담하셨던 그 분이 병고에 지쳐서 혹시나 변절할까봐 걱정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민들레에게 축령산 15개월은 길고 긴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이따 와”는 “살아서 천국과 죽어서 천국이 둘이 아니라 함께 어울려 있음”을 선언한 신앙 간증이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장 26절)”

민들레의 꽃대는 하늘 문을 열었다. 궁극적 생명이 은폐되어 있는 곳이 곧 하늘이다. 그리고 민들레는 섬김이란 작은 씨앗을 자손들에게 뿌렸다. 우리가 민들레 권사님의 빈소를 지키고 있을 무렵, 멀지 않아 고인이 된 최인호 작가는 그때 마지막 글을 남겼다.

“먼지가 일어난다 / 살아난다 / 당신은 나의 먼지
먼지가 일어난다 / 살아야 하겠다 / 나는 생명, 출렁인다”

민들레의 홀씨는 고 최인호에게 먼지로 표현되었을 법하다. 혹시 빛의 먼지, 즉 광자(photon)가 고인의 심령에 반짝반짝 빛났던 것이 아니었을까.

후기 – 필자는 민들레 권사님의 둘째 사위다. 그 분은 외동 아들을 사별한 후부터 “자네는 내 아들 일세.” 이렇게 선언하셨다. 아무런 것도 아낌없이 주는 그러한 긍정은 그녀의 전폭적인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이런 통 큰 마음을 유산으로 받아드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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