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 된 후 우리나라 산업자본의 조장(助長)과 개발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제국의회(帝國議會)에서 회사설치 법안을 통과시키고 서울(京城)에 본점을 두어 1천만 원의 자금으로 회사의 발족을 보게 하였다.
이 회사는 우선 토지매수에 힘을 써 1913년까지47,148정보(町步)의 토지를 10,731,196원으로 매수하고, 1914년에는 농공은행(農工銀行)에서 거액의 융자를 받아 전라도, 황해도의 비옥한 전답(田畓)을 강제로 사들였다. 이리하여 1924년에는 60,591정보의 토지가 회사소유로 화하고 회사 창립 때 현물출자(現物出資)라는 형식으로 출자 당했던 정부소유지 17,714 정보를 합하여 막대한 토지가 회사 소유가 되었다.
이와 같이 강점(强占)한 토지는 소작인(小作人)에게 빌려주어 5할이 넘는 고율의 소작료(小作料)를 징수하는 한편, 영세농민(零細農民)들에게 빌려 준 곡물(穀物)에 대해서는 2할 이상의 고리(高利)를 추수 때 현물로 받아 들였다. 1924년의 통계에 의하면, 소작료로 현미(玄米) 20,184석, 벼 457,089석, 콩 6,409석, 잡곡 9,907석, 목화 70,295근, 현금 116,260원, 등을 징수하여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그 후 이 회사는 착취로 사세의 확장을 보아 1917년 회사법을 개정, 본점을 도쿄(東京)로 옮기고 만주, 몽고, 동부러시아, 중국, 필리핀, 남양제도(南洋諸島), 말레이반도, 타이, 부라질 등에 지사를 설치하였다. 이리하여 우리나라에 17개의 지점을 두고 각국에 52개의 지하를 설립, 경제적 침략(侵略)을 도모하다가 패전과 함께 폐사(廢社)되었다. (國史大事典 ,李弘植 편저, 동아출판사 1977.3.30, pp 440)
독립투사 나석주(羅錫疇 1889~1926)의사
독립운동가 황해도 재령(載寧)출신, 23세에 만주로 건너가 4년간 군사훈련을 받고 귀국, 3.1운동 후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거두어 보내고, 동지들을 규합 일본경찰과 면장 등을 살해하고 중국으로 망명, 중국 하남성(河南省)에서 한단군관학교(邯鄲軍官學校)를 졸업, 중국군 장교로 근무, 의열단(義烈團)에 가입, 1926년 12월 잔인무도하게 조국을 착취하는 일본의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와 식산은행(殖産銀行)을 파괴 할 목적으로 국내에 잠입, 동 12월 23일에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동양척식회사로 가서 수위 및 사원들을 사살한 후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이 되었다. 을지로에서 추격하는 왜경과 교전하다가 최후의 일발로 34세의 나이로 자결 하였다. (國史大事典 ,李弘植 편저, 동아출판사 1977.3.30 318pp)
친일파 김지태 (金智泰, 1908.7~1982.4)
1927년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에 입사하였다. 1932년 폐결핵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퇴사하였다.
조선섬유한국생사(주) 사장, 부산상공회의소 초대 회장, 부산일보 사장, 경남육상경기연맹회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무소속으로 제2대 민의원, 1954년 자유당 소속으로 제3대 민의원을 역임하였다.
그의 자본가로서의 시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장의 인간적 신뢰로 동경의 본사와 의논해 불하받은 울산의 땅 2만 평이 자본가 변신으로의 첫걸음이었다. 직물공장으로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지기공업(紙器工業)에 진출하였고 마침 터진 중일 전쟁으로 인해 사업 성공, 지기제조, 지류무역, 부동산업 등으로 인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해방 후 조선견직(전 아사히 견직), 삼화고무, 제사업(製絲業) 등을 주축으로 전국적인 자본가로 성장하였다.
1949년 부산일보를 인수하였다. 1959년 부산문화방송을, 1961년 한국문화방송을 개국하였고, 1958년 부일장학회를 설립하였다.
1956년 12월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다가 자유당 해당 행위자로 제명되었으며, 1957년 5월에 복당했으나 1958년 5월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후에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1961년 12월 30일 부정축재 환수금으로 5억 4570만 환을 냈다.
그 후에 1962년 5월, 다시 국내재산도피방지법, 관세법 및 형법, 농지개혁법 위반 혐의로 군검찰로부터 징역 7년을 구형받았는데, 같은 해 6월 20일 구속 상태에서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및 부일장학회 소유의 부산 시내 땅 10만 147평을 5·16 장학회에 무상 기증한다는 기부 승낙서에 서명하고 날인하였다. 그리하여 6월 22일 공소 취소로 석방되었고 5·16 장학회는 나중에 정수장학회로 바뀌었다.(위키 백과)
김지태 친일행적
김지태의 재산축적 과정은 다음과 같다. 김지태는 일제시대 가장 악랄했던 농민 수탈 기관 중 하나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 부산지점에 입사해 4년간 근무했다. 이때 김지태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너무 열심히 일해 과로한 탓으로 폐결핵에 걸려 5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면서 회사 울산농장의 땅 2만평을 10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불하받았다. 이 땅에서 수확한 벼는 분할상환금을 갚고도 매년 100석 이상이 남았을 뿐 아니라 그 땅을 담보로 대출도 가능했다고 한다.
그는 1935년 부산 범일동에서 제지회사인 조선지기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일본의 대륙침략 전쟁에 따른 군수물자 시장의 확장에 힘입어 날로 번창했다. 김지태는 이렇게 모은 자금으로 1943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조선주철공업합자회사를 인수했으며, 1949년 적산(敵産) 기업이던 아사히견직(조선견직주식회사의 전신)의 관리인을 맡게 됐다. 1954년에는 신발제조공장으로 당시 전국 최대 규모였던 삼화고무를 인수해 전국 10대 재벌의 반열에 올랐다. 기업 활동을 하면서 김지태는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을 인수했고 2대와 3대 국회의원(부산 갑)을 지냈다. 1958년 김지태는 정수장학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부일장학회를 설립했다.
김지태는 1962년 5월에 군사정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구속됐다. 혐의는 밀수입, 국내재산해외도피, 농지증명서허위작성 등이었다. 당시 검찰부가 징역 7년을 구형했으나 공소 취하의 대가로 부일장학회의 기반이었던 부산 서면 일대 땅 10만 평을 헌납하고 풀려났다.(위키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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