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기자는 광주사태를 논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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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기자는 광주사태를 논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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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시민군 중 불순세력이 있었다

5.18시민군 중 불순세력이 있었다는 두 기자의 증언

"북한군 특수부대의 광주 개입사실의 주장은 믿을 수 없고, 그런 의심을 한 사람을 만난 적도 없으며 당시 광주는 대대규모의 북한군이 등장할 무대가 없었다"라는 조갑제기자의 최근글에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두 기자가 당시 시민군 중에 불순세력이 있었음을 증언하는 자료들을 제기하고 나섰다. (http://cafe.daum.net/ilovehye/6Hhl/57161 var articleno 역사학도)

증언-1, 1980년 5월 19일 나주에서 시민군의 최초 무기 탈취 사건의 산증인이요, 월남전 참전 경험을 살려 그 시간부터 광주사태 내내 시민군과 전투를 치루었던 김동문 기자는(80년 당시 전남매일신문사 편집국 제2사회부차장) 지난해에 27년간 고이 간직했던 낡은 취재 수첩을 수기 형식으로 공개하면서 북한군 개입 의혹을 5월 19일 당일부터 품었음을 발표하였다.

증언-2, 시민군 편의 김영택 기자는(당시 동아일보 광주주재) 그보다 20년 앞선 1987년 8월에 '「광주사태」그날의 5가지 의문점' 이란 기사를 발표하면서 네번째 의문점에서 복면무장단체는 외지에서 온 불순세력이었을 것이라는 의혹을 분명하게 언급하였다. 김영택 기자가 "그들 중 일부가 만약 [불순세력]으로서 외부에서 들어와 신분을 감추기 위해 복면을 했다면"이라고 언급할 때 그는 분명 북한군으로서의 불순세력을 염두에 두고 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4208.html)

"대대규모의 북한군이 등장할 무대가 없었다"는 조갑제 기자의 증언은 아마 별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5.18측 주장으로 5월 21일 도청앞에 30만명의 시민군이 집결해 있었다고 한다. 만약 금남로라는 작은 지역에도 30만명이 집결해 있었다면, 광주를 포함한 나주, 화순, 영암 등지에 시민군 수의 천분의 일 정도인 북한군 수백명이 흩어져 있을 공간이 없을리가 있겠는가?

아래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페터가 5월 20일 찍은 아래 사진은 5월 20일 나주, 화순, 영암 등 광주 외곽 지역에서 광주로 향하고 있었던 5.18무장단체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진은 광주시민군이 5월 19일부터 이미 무장하고 있었다는 김동문 기자의 증언을 분명하게 뒷받침하여 준다.

그런데, 탈북군인들의 증언에서 중요한 것은 수학적 정확성이 아니라, 북한 세력의 개입 여부이다. 분명히 북한 세력이 광주사태에 개입하였으며, 바로 그 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아래 사진의 시민군의 제복과 무전기를 유의해 보라. 과연 5.18시민군이 사전 계획 없이 이런 군사장비들로 무장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사전 준비 없이 장갑차를 타고 시내를 종횡무진하며 무전기를 활용하여 군사작전을 펼치는 것이 가능하였겠는가.

그리고, 무전기로 무엇이 교신되고 있었는가? 조갑제 기자가 광주사태 때 광주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송고한 기사들로 입증이 된다. 마찬가지로, 북한세력이 광주사태 때 광주에 있었다는 사실은 북한세력이 북한으로 보내어 북한에서 생방송되고, 다수의 시민군이 청취하고 있었던 이북방송으로 분명하게 입증이 되는 것이다.

광주사태 때 북한세력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일진대 탈북군인들의 발언권은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시민군을 언급할 때 조갑제 기자는 주로 온건파 시민군을 언급해 왔다. 그러나, 소위 강경파 시민군의 사실이 또한 있다. 5.18측과 5.18검찰이 아무리 그 숫자를 축소하여도 최소한 35명 이상의 광주시민들이 강경파 시민군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탈북군인들의 증언을 그대로 뒷받침하여 주는 것이다. 임천용씨가 아래 사진을 보여주며 묻는 질문은 장발하고 군복입은 자들이 광주시민들을 끓여앉히고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있었을 때 그 정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광주시민들은 장발한 강경파 시민군과 공수부대를 혼동하는 발언을 해왔다. 1988년 12월 광주청문회 때 이해찬이 북한군 사진(울진,삼척 무장공비토벌작전)을 들고 나와 광주시민군 사진이라고 사기쳤을 때 광주시민들은 모두 침묵하였다. 이해찬이 사기쳤다는 사실을 밝힌 이들은 특전사 출신들이었다.

청문회에서 이해찬이 사기칠 때 광주시민들은 모두 침묵하였다는 사실은 광주시민들의 양심에 문제가있거나 아니면 대다수의 광주시민들은 북한군 군복과 국군 군복의 차이를 식별할 능력이 없었음을 말하여 준다.

이처럼, 장발한 강경파 시민군을 공수부대와 혼동하여 발언해 온 이들의 증언은 신빙성에 문제가 있기에 우리는 광주사태 영상물과 사진 사료들을 다시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사실 광주사태 당시에는 대다수의 광주시민들은 광주사태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광주사태를 보았다는 이들도 이해찬처럼 군복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시민군과 공수부대를 혼동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그러나, 5월 22일 광주에 해방구가 설치된 이후로는 복면을 한 시민군이 등장하여 시민군 복장의 한 특징을 이루었던바, 바로 이 복면 쓴 강경파 시민군을 김영택 기자는 보았으며, 그들에 대하여 증언한다. 김영택 기자는 시민군 편 증인이었음에도 복면무장단체의 정체성에 대한 그의 의심을 또박 또박 말하였다. 1989년 1월 26일자 광주청문회를 보도하는 위의 동영상에서 MBC 김석진 기자는 그 증언을 이렇게 요약한다:

김영택 씨는 또 5월 22일에는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생 300여 명이 시위에 합류했으며 오후부터는 복면을 쓴 사람들이 시위 군중 속에 나타나 강경 구호를 외치거나 시민군의 총기 반납을 저지하는 등 석연치 않은 행동을 보여 이들의 정체에 의심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위 동영상 시작후 1분 5초부터 1분 22초 사이) 그리고 김영택 기자는 이미 1987년 8월에 그 증언을 아래와 같이 상세하게 남긴바 있다.

[복면부대]의 정체

독자들은 광주사태 당시 복면을 한 이른바 [시민군]들이, 탈취한 차량을 타고 시내를 질주하는 광경을 텔레비젼 화면이나 신문의 사진에서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이 [복면부대]는 18일과 19일의 시위, 특히 21일 시위대가 계엄군의 정면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만 해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이 등장한 것은 계엄군이 철수하고 도청이 학생들의 수중에 들어가 이른바 [광주공화국]시대가 열리면서 부터였다. 이들은 누구였을까? 이들이 과연 [민주화]를 외치는 순수한 시위대원들이었을까. 이것이 기자가 갖는 네 번째 의문이다.

학생 데모대들은 처음부터 떳떳했다. 수사기관의 카메라에 찍히는 것도, 붙잡혀 감옥에 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14, 15, 16일의 평화적 시위 때는 더더구나 복면을 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20일 운전기사들이 차량을 몰고 나왔을 때나 21일 관광호텔 앞에서 계엄군과 대치해 협상을 시도할 때도 복면을 한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21일 오후 계엄군이 도청에서 빠져나가고 학생들이 들어간 후부터 시위대원 중에는 복면을 한 사람이 부쩍 많이 눈에 띄었다

만약 복면부대가 수사기관의 카메라에 포착되어 나중에 검거되는 위험을 막기 위해서였다면 경찰이나 정보기관이 정상적으로 활동하던 18일부터 21일까지는 왜 없었을까. 왜 기자의 카메라조차 학생들로부터 의심받아 셔터를 누르기도 어렵던 22일 이후에 복면을 한 사람이 많았을까.

이들 복면부대는 한결같이 강경한 입장을 취한데다 적극적으로 시위를 선동했다. 무기반납을 방해하고, 차량을 타고 시내를 질주하면서 과격한 언사를 거침없이 썼다. 이들은 수습대책위원회가 주최하는 도청 앞 광장의 수습회의나 대책회의에는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기자는 24일 오후 2시쯤 당시 도청 2층에 있던 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부위원장 김종배씨(35)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서 시민군의 무기를 반납하자는 이야기가 거론되고 있을 때 학생측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찾아갔다가 위원장대신 부위원장을 만났던 것.

김씨는 "우리는 총을 반납하겠습니다. 그리고 경찰과 군이 들어와 질서를 회복하면 맨손으로 금남로에 나가 다시 민주화를 외치겠습니다"며 총을 회수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때만 해도 김씨는 온건파였다. 이로부터 수시간 후 그는 조건부 강경파로 선회하게 되지만, 본심은 어떤 조건만 받아들여지면 총을 반납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무기 반납 제지한 [복면부대]

그런데 총을 회수하여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김씨를 가로막는 사람들이 있었다. 반납은 안된다는 강경파들이었다. 끝까지 싸우겠다는 것이다. 가로막는 이들 강경파의 거의가 복면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김씨는 이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어쩌지 못하고 다시 2층으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복면의 강경파들은 이렇다 할 수습안을 내놓지도 않았다. 무조건 반대였다. 때문에 이들은 사태를 악화시키려는 [불순세력]이나 [배후세력]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당시 기획위원이었던 이양현씨(37)의 말을 들어보자.

"잘은 모르지만 뒤에 검거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복면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불순세력이 침투해 들어와 복면을 하고 행동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그 같은 상황에 대해 우리도 어느정도 대비하기는 했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을 가려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광주사태 이후 과격한 정치집회에는 으레 복면부대가 등장했다는 사실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5·3인천 시위에서 그러했고, 통일민주당 지구당 창당대회 난동사건에서 그러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복면을 했고, 손에는 각목이나 몽둥이가 들려졌다. 인천시위에서는 민주세력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이었고, 민주당 창당대회에서는 열렬한 신민당원으로 자처했다.

물론 복면부대가 모두 그런 사람들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21일 계엄군이 철수한 이후의 광주는 객관적으로 무정부의 상태였다. 이미 정부가 없는 상태, 그것은 엄격하게 [내란]의 상태다. 더구나 시위대는 무장을 했다. 정부가 있을 때 그 정부에 대항하여 시위를 벌이는 것과 정부가 없는 상태에서 [내란]에 가담하는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복면을 한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차이를 깨닫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계엄군의 철수 후 사태의 수습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강경하지 않았다. 무기를 반납하고 시의 외곽을 에워싸고 있는 계엄군과 협상할 것을 시도했다. 복면부대는 이 수습노력을 저지하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격렬한 선동을 계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복면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들 중 일부가 만약 [불순세력]으로서 외부에서 들어와 신분을 감추기 위해 복면을 했다면, 그런 사람들은 선량한 시민들의 지탄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4208.html)

이렇듯 광주사태 당시 광주 주재 취재기자였으며, 여러 해 광주사태를 연구한 김영택 기자가 저 복면부대에 대하여 내리는 결론은 광주시민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불순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 외부가 부산이나 제주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진대, 저 복면부대의 사실 역시 우리가 탈북군인들과 탈북자들의 증언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이다.

북한세력이라고 광고하며 다니는 자들을 조갑제 기자가 보지 못하였는가? 탈북군인들과 탈북자들 역시 광주에 침투하였던 북한군은 북한군 표식을 달고 다닌 것이 아니라, 정체를 감추기 위하여 위장하였다고 증언하지 아니하는가. 더구나 김영택 기자가 목격하고 취재한 복면부대의 사실은 실제로 시민군 중에 자신을 위장한 자들이 있었음을 분명하게 입증하여 주지 아니하는가.

<자료출처- 역사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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