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에 북한군 1개대대가 왔다
스크롤 이동 상태바
광주사태에 북한군 1개대대가 왔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주사태 & 북한군 특수부대 투입 증언록은?

 
   
  ▲ 광주사태때 총기로 무장하는 모습 자료사진  
 

광주사태 배후에 북한 세력이 있다는 증언을 2년전 미주통일방송이 탈북 장교의 증언을 인용하여 방송한바 있다.

이같은 북한군 장교의 증언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몇해전 임수경씨가 "임수경의 편지: 386의원들의 단란주점추태"라는 글에서 살며시 드러냈는데 이 편지는 5.18 전야제 때 성희롱한 386의원들의 추태에 대한 폭로였고 이 편지에 공개된 인물들이 광주사태와 북한과의 관계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우리가 알기로는 임수경 본인은 광주사태와 별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해마다 5.18 전야제 때 임수경은 VIP 인물이요. 그 이름이 약방 감초처럼 인용된다. 임수경 자신은 단지 주사파의 지시를 받고 19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남한대표로 참여하였을 뿐이다.

그러면, 도대체 5.18 정신이 무엇이기에 5.18 기념행사 때 임수경을 영웅으로 떠받드는 것일까? 먼저 임수경이 월북하고, 1991년 3월 윤기권이란 광주사태 주동자가 보상금 2억원 수령한 후 영구 월북했다.

1991년 3월 8일자 광주의 일간지들은 [3월4일, 광주 5.18항쟁 부상자인 윤기권(광주 두암동)이 위대한 수령님과 참조국을 찾아 의거 월북했다...] 고 평양방송을 인용하여 보도하였고 '한국 현대사 사료 연구소'(광주 소재. 소장 송기숙)에서 펴낸 『광주 5월 민중 항쟁 사료 전집』(1990)에는 윤기권의 사상이 증언 형식으로 채록돼 있다.

그런데, 그 당시 개인이 2억원이란 거금을 들고 혼자서 북한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어떻게 월북할 수 있었까의 질문이 바로 북한과 광주사태는 무슨 관계 였느냐에 관한 질문이다.

그리고, 시민군이란 용어의 어원이 광주사태와 북한과의 관계를 말해 준다. 시민군은 본래 월맹이 월남을 공산화하기 위해 동원하였던 무장 시민군을 말한다. 정면에 무장 시민들을 내세워 시민군으로 위장하되 그 배후에 월맹군이 끼어있는 전법이었다.

그리고, 시민군의 등장이란 미군의 참전을 불가능케 하는 것이기에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월남을 침략하였다. 따라서, 시민군이란 말이 광주사태 때 어디서 유래하였느냐가 북한과 광주사태의 관계에 대한 실마리가 된다.

이해찬의 행동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김대중 정권 때 그는 5.18 유공자 포상을 자기가 하고 자기가 받았다. 그리고 지금 자기와 반대 편에 있던 분들의 서훈은 취소시킨다니 어이가 없지 않은가.

김대중 가문의 가신으로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담당하였던 당시 중앙정보부 김대중 담당 수사관이었던 이기동 씨는 그의 신동아 기고문에서 김대중이 최규하 대통령의 민주정권을 무력으로 붕괴시키고 자기가 스스로 대통령이 되려 하였다는 사실과 왜 이해찬이 5.18 유공자 포상 대상인지를 상세하게 증언한다.

이해찬이 자기가 5.18 유공자 포상하고 자기가 포상받았을 때 수십 명의 386정치인들을 무더기로 포상하였는데, 바로 임수경씨가 5.18전야제 성희롱 사건의 주역들로 고발하는 이름들이다.

그리고, 임수경씨의 이런 정의감과 정직성이 광주사태와 북한과의 관계를 파악하는데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임수경씨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문을 열자 송영길 선배가 아가씨와 어깨를 붙잡고 노래를 부르고 계시더군요. 박노해 시인은 아가씨와 부르스를 추고 있었고 김민석 선배는 양쪽에 아가씨를 앉혀두고 웃고 이야기 하느라 제가 들어선 것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럼 박노해 시인이 누구던가? 역시 그의 정직성을 가지고 광주사태 배후에 김대중이 있었다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이가 아니던가?

시인 박노해가 1989년에 쓴 『윤상원 평전』에 따르면 윤상원은 시민군 지도자를 넘어 혁명투사였다. 박노해는 이 평전에서 윤상원이 1980년 5월 18일 이전부터 무장봉기를 준비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멀쩡한 직장을 그만 두고 광주에 내려가 공장에 위장 취업한 사실, 들불야학에서 노동자 계급 의식화에 앞장서고 전민노련(전국민주노동자연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한 사실 등을 미뤄 그가 노동 해방을 꿈꾸는 사회주의 혁명투사였다고 주장한다.

그의 증언을 따라가 보면, YH사건의 주동자도 바로 윤상원이었으며, 따라서 부마사태의 배후에도 김대중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윤상원은 김대중 조직에서 이해찬과 쌍벽을 이루는 인물이었다. 이해찬이 학생 운동권 중의 김대중 홍위병들을 대표하였었다면 윤상원은 노동계의 간판 스타였다.

광주사태가 시작될 무렵 윤상원은 광주지역 청년운동의 핵심으로 활발히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재야단체 민족회복국민회의(의장: 김대중, 윤보선. 함석헌) 전남지부의 실무를 맡아 뛰었으며 민주청년운동협의회 전남지부(윤한봉, 김상윤 등 광주지역 민청세대가 주축)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처럼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조직의 핵심 인물이었던 윤상원이 광주사태를 일으키기 열흘 전에 경찰서 무기 탈취조를 조직하였을 때 과연 독단적인 행동을 취하였겠는가?

도대체, 그러면 윤상원은 어느 정도 규모의 시민 무장을 생각하고 있었느냐가 광주사태와 북한과의 관계에 관한 질문의 관건이다. 도대체 그는 그런 무모한 무장 봉기에 승산이 있었다고 생각하였는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5.18측이 영웅시하는 박남선씨가 그의 증언록에서 공개한다. 박남선씨는 본디 성품이 아주 정직한 이로 보이며, 따라서, 그는 그가 본 그대로 증언한 것이 분명하다.

광주사태의 미스테리는 폭동 초기부터 시민군이 장갑차 부대를 편성하였다는 사실인데, 대한민국 국군도 창군 이후 장갑차 한 대 운전하는데 몇년 걸렸는데, 어떻게 광주시민군은 첫날부터 8대로 편성된 장갑차 부대를 가질 수 있었는가?

"光州市民은 왜 銃을 들었나"라는 제목의 그의 기고문에서 시민군 대장 박남선씨는 시민군이 장갑차 부대를 편성하여 도청을 공격하는 과정을 자세히 진술하는바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006.html ), 여러 탈북자들과 위의 동영상에서 인용된 북한군 장교 증언은 그 장갑차 운전병들은 북한군이었다고 한결같이 말한다.

따라서, 광주사태와 북한과의 관계는 광주사태 때 누가 장갑차를 몰고 도청을 공격하였느냐의 질문에 귀결된다.

당시, 시위대 장갑차가 도청을 공격하는 장면은 1996년 5.18 검찰의 보고서에도 진술되어 있다 : <검찰측 자료 : (5월21일) 13시경 공수부대가 철수하지 않는 데 항의하며 시위대가 화염병을 투척하여 계엄군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의 장갑차 1대가 갑자기 공수부대쪽으로 돌진했다. 공수부대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공수부대원들은 장갑차를 피해 좌우로 갈라져 부근 전남도청, 상무관, 수협 도지부 건물 등으로 산개하였다. 미처 피하지 못한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깔려 1명이 사망했다>

<월간조선 88년 7월호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당시 현장에 있던 11공수여단 소속 통신병 경기만씨 증언에 의하면 시위대 장갑차 돌진으로 사망한 대원은 11공수여단 소속 권용문 상병이라고 한다. 권상병은 머리가 장갑차 바퀴에 눌려 짓이겨진 채 즉사했고, 다른 사병은 가볍게 다쳐 곧 일어나 달아났다>

광주사태와 북한과의 관계에 대한 또 하나의 질문은 난동자들이 도청을 점령한 5월 22일에 누가 광주시 전체를 한순간에 쑥대밭으로 만들 만한 폭파 장치를 도청에 했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그때 용감한 대한민국 군인들이 자기 생명을 바치면서 폭탄 뇌관을 제거하지 않았더라면 언제 광주시가 대한민국 지도에서 영영 사라질지 모를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과연 광주시민에게 그런 폭탄물을 설치할 능력이 있었겠는가? 바로 그 사건에 대하여 1996년 10월 10일자 광주일보는 http://altair.chonnam.ac.kr/% 7Ecnu518/data/news/sagun/b/kwangju_961010.htm에서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지만 과거사 조사위가 밝혀내야 할 사건이다.

이렇듯 광주사태와 북한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광주사태 훨씬 이전에 김대중이 최규하 대통령을 무력으로 하야시키고 자기가 대통령이 되려 하였다는 그의 가신 이기동씨의 증언과 더불어 윤상원이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핵심 인물로 광주사태 열흘 전에 경찰서 무기 탈취조를 조직하였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증언한 박노해씨가 바로 5.18 전야제 성희롱 사건의 주역이었다는 임수경씨의 증언이 이렇듯 우리에게 광주사태가 어떤 인물들에 의하여 주동되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자료출처-시스템클럽 5.18과 http://cafe.daum.net/issue21 http://blog.paran.com/essaytown 역사학도의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