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공산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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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인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1979년 10월 26일, 보안사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소식을 들은 것은 시해 현장에서 총소리가 멎은 지 40분 후, 오후 8시 20분이었다. 김계원이 시신을 싣고 국군서울지구병원에 도착한 시각은 7시 55분, 병원을 가려면 보안사 정문을 통과해야 했다. 청와대 차량이 병원에 와서 사람을 실어 나르는 것을 목격한 근무병이 보안사 당직총사령 이상연 대령에 보고를 했고, 당시 근무를 하고 있던 정도영 보안처장(육사14기)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병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중앙정보부 요원이 밀착감시를 하기 때문에 병원장의 대답이 엉거주춤했다. “코드원(대통령)이냐, 위독하시냐” 했더니 병원장은 겨우 “예”라고만 대답했다. 이때 전두환은 연희동 자택을 떠나 서빙고 수사분실로 부대순시를 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이런 전두환에게 이상연 대령은 대통령이 지구병원에 입원했는데 용태가 위태로운 것 같다는 내용을 무전으로 보고 했고, 전두환은 즉시 보안사 중요간부들을 비상소집했다. 8시 30분이었다.  

서빙고 수사분실에 도착한 전두환은 청와대 경호실에 전화를 걸었지만 경호실장은 물론 차장과도 통화를 하지 못했다. 그 다음의 보고가 전두환에게 들어왔다. “노재현 장관이 보안사령관을 찾고 있습니다. 정승화 총장이 각군 수뇌부를 B-2 방카로 소집하고 있습니다.”  

김재규는 정승화와 함께 8시 5분에 B-2 방카에 도착한 이후 체포될 때까지 4시간 30분간 정승화의 보호를 받으면서 ‘시해 사실을 숨긴 상태에서 비상계엄령을 발동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국무위원들은 국방장관실에 모여 국무회의를 하자면서도 회의의 목적을 “계엄선포”를 위한 것으로 했다. 그 많은 장관들 중에 “사건의 진상부터 따지고 조사해야 한다” “누가 시해 했느냐” 이렇게 따지는 사람이 없었다. 살아 있는 대통령 앞에서는 충성을 보였을 장관들일 테지만, 일단 서거하고 보니 진상을 캐기 보다는 권력이 누구에게 가는가에 대한 눈치부터 본 것이다. 권력의 태양은 서서히 저문 것이 아니라 카메라의 셔터처럼 한순간에 낙하한 것이다.  

오후 9시경, 전두환이 B-2 방카에 도착했다. 이 때 김계원과 최규하는 청와대에 있었고, 정승화 총장이 혼자서 독자적으로 상황을 처리하고 있었다. 벙커 내의 총장실에는 김재규가 있었고, 상황실에는 노재현 장관과 군 수뇌들이 있었다. 전두환이 노재현에게 “대통령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하고 묻자 노재현은 “대통령이 서거했다. 자세한 건 모른다”고 일러주었다. 전두환이 대통령 서거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한 시점이 바로 밤 9시경이었다. 이때부터 전두환은 발 빠르게 육군본부 보안대 사무실에 임시 지휘본부를 차리고 사태 파악에 나섰다. 11시 40분, 노재현 국방장관은 전두환에게 “각하가 서거 했다” “김재규를 체포하라” 이렇게 지시했다.  

반면 11시 50분에 정승화는 전두환에게 “국방장관실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있다. 헌병이 체포하면 인계 받아 보안사 안가에 정중히 모셔라” 이렇게 지시했다. 노재현은 ‘김재규가 대통령을 죽인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반면, 정승화는 김재규를 안가에 정중히 모실 대상이라고 말해준 것이다.  

이에 사태를 어느 정도 눈치 챈 전두환은 보안사 보안처 군사정보과장 오일랑 중령에게 명령을 내렸다. “국방장관실에 김재규가 있다. 육군총장이 찾는다는 구실로 유인하여 보안사 안가로 연행하라.” 모시라고 명한 것이 아니라 연행하라고 명한 것이다. 그리고 오일랑 중령은 김재규를 글자 그대로 연행했다. 10월 27일, 새벽 00시 30분이었다.  

정동 안가로 연행된 김재규는 누가 묻지 않는데도 제1성을 이렇게 냈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나에게 협력하라.” “내가 박 대통령을 시해 했다. 내일이면 세상이 바뀐다” 수사관들은 김재규의 언행으로부터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범이라는 확신을 얻었고, 이는 즉시 전두환에게 보고 됐다. 전두환은 정승화에게 “대통령 시해범은 김재규입니다. 구속해야 합니다”라며 압박했다.  

정승화는 더 이상 저항할 명분이 없었다. 이로써 시해 된지 6시간 후인 10월 27일 새벽 01시 30분에 비로소 김재규가 정식으로 구속된 것이다.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말을 들은 정승화는 김재규를 고급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 했고, 안가에 모시라는 이유는 김재규에게 혁명 배후세력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진술했다. 전두환 역시 배후세력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김재규를 범인으로 지목하자마자 즉시 고급 안가에서 서빙고 수사분실로 호송한 후 김재규를 비호하는 정승화를 압박하여 범인을 정식으로 구속시켰다.  

김재규를 체포하기 직전까지의 사태는 정승화, 김계원, 김재규가 주도했다. 최규하 내각은 무기력 했고, 국가는 무주공산이 되었다. 그래서 먼저 점령하는 세력이 임자로 보였다. 김재규가 이끄는 중앙정보부, 김계원이 이끄는 청와대, 정승화가 이끄는 60만 육군이 단합했던 당시의 상황은 누가 봐도 막강했다. 이런 힘이면 역모를 할 만한 세력이었다. 이 엄청난 세력이 그 힘을 발동하려 기지개를 펴는 순간, 2성 장군에 불과한 전두환이 재빠르게 선수를 쳐서 예봉을 꺾은 것이다.  

전두환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김재규-정승화가 주도하는 쿠데타 세력이 국가를 지배했을지 모른다. 전두환의 사태파악 속도와 거침없는 행동이, 당시 최규하가 이끄는 국무위원들의 무기력함에 비하면 단연 돋보이지 않을 수 없다. 최규하와 국무위원들은 “무엇이 내게 이로우냐”에 따라 눈치를 보고 있었고, 전두환은 “무엇이 정의냐”에 따라 과감하게 행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는 북한의 검은 정부가 서울에 엄연히 존재하면서 대한민국을 사실상 점령하고 있다는 정황들에 봉착해 있다. 두렵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나날이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간첩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인생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간첩들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느끼는 사람들 중에는 내일 이 나라는 북한이 통치할까 남한이 통치할까 바쁘게 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박정희 시해 당시 총리와 장관들이 보였던 눈치 보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한편 지금 이 나라에는 각기 잘났다고 설치는 사람들이 내는 잡음들로 시끄럽다. 가방끈 짧은 사람들이, 영혼 없고 사색 없는 부나비 인생들이 트로이목마의 호위무사 노릇을 하면서 적진에 공을 쌓고 있는 여적의 소리들인 것이다. 그런데도 이 나라에는 무슨 때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만 보이고 리더그룹이 안보이고 주인그룹이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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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lgeo 2015-12-26 19:02:08
공감합니다 ~ !!! 5.16군사혁명은 국민이 민정이양시에 국민투표로 박 정희대통령을 선출함으로서 그렇게 인정이 되는 것입니다 ~ !!! 국민이 하늘이요 법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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