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색 LED와 야성 넘치는 안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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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 LED와 야성 넘치는 안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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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적 율곡과 야생적 구봉이 만났을 때

지금까지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는 문학상 2명과 평화상 1명을 빼곤 모두 과학 분야에서 나왔다. 이들 중 일본 국적자는 17명, 타 국적을 가진 2명까지 합하면 일본 출신이 총 19명, 이번 수상자 중 한 명인 나카무라 슈지 교수 역시 미국 시민권자이다. LED 개발 당시 회사 측이 대가로 2만 엔(20만 원 정도)만 건네자 그는 가차 없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일본엔 많은 차별과 성희롱, 연령차별이 있다. 미국에 비해 연구의 자유도 없다.” 이와 같은 그의 쓴 소리에도 불구하고, 과학 강국을 일군 일본에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2014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는 세 명 모두 일본인으로써 청색 LED의 개발에 노력한 공헌이 인정받은 결과였다. 어느 TV방송 앵커는 이상과 같이 소개하면서, 특별히 나카무라 교수의 시퍼렇게 날선 일본비판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의 늑대 같은 생존전략은 조국이란 울타리마저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청색 LED는 푸른빛을 쏘는 발광다이오드이다. LED 재료는 실리콘 반도체와는 다르게 3족-5족 화합물 반도체를 주로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전기에너지를 폐열손실 없이 직접 광에너지로 변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LED는 청색 발광을 위하여 5족 질소화합물 공정이 요구되어서 청색이 질소순환 생태계의 야성과 연결된 고리를 찾아보게 된다.

99년 전 노벨물리학상에서 불거졌던 냉혹한 자본주의 생태를 한번 들쳐보자. 뉴욕타임스는 1915년 노벨물리학상에 에디슨(1847-1931)과 테슬라(1856-1943)가 공동수상자로 결정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한 일주일이 지나자 로이터 통신은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는데, X선으로 광물의 결정구조를 분석한 브래그 부자에게 그 수상의 명예가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노벨상 재단은 어떠한 확인도 거부하였다고 한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세상은 슬렁거리며 설왕설래했다. 당시 테슬라를 지지하는 쪽에서는 테슬라가 모리배하고 비교되는 것조차 역겨워했다는 반응이었고, 한편 에디슨을 찬양하는 쪽에서는 노벨 상금이 배신자에게 수여되는 것을 막았다고 맞받아쳤다. 오늘날 돌이켜보면, 에디슨이 설립한 제너럴 일렉트릭과 테슬라와 특허계약을 맺은 웨스팅하우스의 기업 간 적자생존 싸움이기도 했었다.

크로아티아에서 1884년 미국으로 건너간 테슬라는 한때 에디슨의 조수로 일 년 가량 근무했다. 그러나 1% 영감으로 발명하는 직류용 스승과 99% 영감으로 작업하는 교류용 제자는 애초부터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테슬라는 자기장이 주도하는 교류 시스템으로 전력산업이 나아가야한다고 주장한데 비하여, 에디슨은 그때까지 주도했던 텃밭인 직류 시스템이 더욱 안전하다고 역공을 폈다. 에디슨이 과거형 인간이라면, 테슬라는 미래형 인간이었다. 과학전람회에서 종종 “푸른 번개 치는 볼거리”로 즐기는 테슬라코일은 고주파 발진과 공진으로 알려진 그의 창의력이 녹아있다. 이 장치는 무선통신과 조명에 새로운 패러다임울 인류에 선물했고, 어쩌면 “영점 에너지 장”까지 뻗쳤던 그의 광기가 번득거렸을지 모른다.

이씨조선(1392-1910)에서 제14대 선조(재위 1567-1608)는 왜란의 유무를 떠나 하나의 분수령이 된 임금이다. 그것은 율곡(李珥 1537-1584)과 구봉(龜峰 宋翼弼 1534-1599)이 그때 한반도에 함께 거주했기 때문이다. 율곡의 냉철한 지성과 구봉의 쉼 없는 야성이 하나로 중첩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율곡은 일기(一氣)로 통일된 인격체를 제시했다. 그는 정직했으나 용감했고, 옳은 뜻을 세웠으나 사심 없이 기다렸다. 천도책(天道策)은 그가 23세 때 성균관 별시에서 장원한 문제였는데, 율곡의 도학 수준이 어떠했는지 잘 나타나 있다. 비록 소설이지만, 최인호는 그의 “儒林”에서, 채점관이 그 답안에 감탄하며 극찬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럼에도 율곡은 그 공을 함께 시험받던 구봉에게 돌렸다는 겸손한 일화가 전해진다.

구봉에 관한 야사에는 늘 율곡이 등장한다. 관직에 등용될 수 없는 노비신분으로 추락했던 구봉은 자신의 뜻을 율곡을 통해 펴고자했다. 언젠가 경연에서 제시했던 십만양병설이 특히 서애(西厓 柳成龍 1542-1607)의 제재로 무산된 후 율곡은 초조해졌다. 어느 날 그는 어둠을 뚫고 구봉과 함께 선조를 뵈었다 한다. 선조는 눈을 감고 말하는 구봉의 학식과 경륜에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 "경은 왜 눈을 뜨지 않소?" "제가 눈을 뜨면 주상께서 놀라실까 염려되옵니다." "어서 눈을 뜨시오." 구봉이 눈을 뜨자 푸른 번개가 쳤다. 선조는 그만 질리고 말았다. 오줌까지 쌌을는지 모른다. 물론 이렇게 알현은 없었던 일이 되었다. 그후 율곡은 몽진 길목에 화석정을 준비하여 임금의 피난길을 밝히도록 구봉에게 부탁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구봉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 찬반론이 팽팽하다. 그가 돌팔매를 무차별 맞아야 하는 사건은 기축옥사(1589) 이른바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의 난” 때문이다. 정여립은 사상이 진취적이며 공화주의를 꿈꿨던 것 같다. 당대는 말발이 드셌던 김효원(金孝元 1542-1590)과 이발(李潑 1544-1589)을 앞장세운 동인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처음 서인이던 정여립이 시류에 따라 스승 율곡을 비판하였다. 그러자 인왕산 기슭에 살았던 구봉은 그를 질타했다. 구봉은 율곡, 우계(牛溪 成渾 1535-1598), 송강(松江 鄭澈 1536-1594)으로 구성된 서인의 숨은 책사였다. 이들 서인 4인방은 개인으로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서로 외우(畏友)는 되지만 하나로 뭉쳐 붕당으로서의 파워가 약하여, 동인에게 정치적으로 밀렸다.

안당(安塘 1460-1521)은 기묘사화(1519) 때 좌의정으로 조광조(趙光祖 1482-1520)를 비롯한 사림을 등용했으나, 결국 신진세력의 정치적 후견인으로 내몰리며 파직 당했다. 안당은 삼형제를 두었는데, 한날에 모두 현량과에 급제하는 경사를 맞기도 했다. 어느 날 맏이 안처겸이 친구들과 어울리며 의협심에 따리 기묘사화의 부당성을 논박했는데, 거기에서 사촌형제 되는 송사련(宋祀連 1496-1575)이 맞장구치고 말을 거들었다. 송사련은 안당 집안의 집사였는데, 부친 안관후의 비첩에서 태어난 딸 감정(甘丁)의 아들이므로 안당에게 조카뻘이 되는 관계였다. 그러나 송사련은 안처겸의 모친상 때의 자기의 소임으로 작성한 방명록을 물적 근거삼아 안처겸을 역모로 고변(告變)했는데. 이것이 바로 신사무옥(辛巳誣獄 1521)이었다.

찬성공 안경은 순흥안씨 10세인데, 슬하에 다섯 형제를 두었다. 모두 과거에 급제했고, 안당이 그의 손자 중 하나였다. 신사무옥에 따라 찬성공 일파에 삼족이 연좌되어 공멸하는 처벌까지 받은 것 같지는 않으나, 적어도 친상의 기록에 걸려서 다수가 죽음 또는 귀양 가서 대소가가 파탄을 맞았다. 그리고 어린이와 여자들은 노비로 전락했다. 송사련은 그때 자신의 외가를 무고하여 출세하게 된다. 그는 공신으로 면천(免賤)되어 당상관 첨지에 올랐고, 안씨 집안의 재산과 노비를 녹봉으로 차지했다. 그러나 65년이 지나 1586년(선조 19), 찬성공파 안씨 집안은 동인의 지원을 받아 마침내 사면되었다. 따라서 여산 송씨 집안은 관작이 삭탈되고 노비신세로 환천되었다. 송사련은 다섯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셋째가 바로 구봉이다. 구봉은 부친 때문에 어려서 사대부로 태어나, 늙어서 천민으로 죽었다.

황해도 배천은 원래 찬성공 배위의 고향이었으나, 공이 선영으로 삼았기 때문에 찬성공파 소문중의 고향이 되었다. 안관후의 서녀 감정은 행실이 나쁘다는 이유로 부친의 명에 따라 배천으로 내려가 집안일을 돌봤다. 그리고 서얼출신 하급무사 송린(宋璘)과 혼인하여 아들 송사련을 낳았다. 따라서 구봉에게 황해도가 고향인 셈이고, 여기저기 인맥이 닿았을 것이다. 구봉은 수제자 김장생(金長生 1548-1631)에게 의탁하며 당진 근처에서 여생을 보냈지만, 그에게 간절한 소망은 자기 세 아들만은 천한 신분에서 벗어나도록 터주는 길이었다. 이상하게도 당시 황해도 관찰사가 고변했는데, 전라도의 정여립 대동계가 처참한 종말을 맞았다. 이때 정여립 사건에 얽혀 들어 희생을 당한 사람이 천여 명에 이르렀고, 그 중에서도 동인계열과 전라도의 인사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동인 쪽에서 구봉의 반간계가 작동했다고 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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