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좌파는 무장공비 만행을 알고 있는가”
“종북좌파는 무장공비 만행을 알고 있는가”
  • 손상대 대기자
  • 승인 2012.06.09 13:05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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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살 내 친구의 아버지는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 무장공비 북면 침투로
1968년 11월 2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예하의 124군 부대 소속의 무장공비 100여명이 경북 울진-삼척지구에 침투했다. 10월 30일에서 11월 2일에 이르는 사흘 사이에 8개조로 나누어져 야음을 타고 경북 울진군 고포해안에 상륙, 울진, 삼척, 봉화, 명주, 정선 등지로 침투했다.

법이 없어도 살 수 있었던 조용하던 동네가 일순간에 전쟁의 공포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무장공비가 상륙한 장소는 내가 살던 집과 불과 얼마 떨어진 곳이 아닌 같은 동네 울진군 북면이었다.

무장공비가 뭔지도 모르는 10살의 어린 아이에게는 거저 완전군장을 하고 있는 군인들이 더 신기할 따름 이었다. 그러나 어른들은 달랐다. 전쟁을 겪은 세대라 당장이라도 전쟁이 본격화 되면 피난을 가야 한다며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머니의 걱정은 더 컸다. 6.25전쟁 때 빨갱이들이 보기 싫어 할아버지 손을 잡고 해주에서 울진까지 수천리길을 맨발로 걸어 왔던 그 시절의 악몽이 불현듯 찾아왔는지 안절부절 했다. 6.25때 피난처로 가장 안전하다고 믿고 둥지를 튼 울진에서 18년 만에 또 다시 전쟁을 겪는다고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지는 모양이었다.

▲ 무장공비 침투 신고를 받은 북면지소
한숨소리에 들려오는 자식들 걱정을 들으면서도 10살의 소년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철이 없어서가 아니라 전쟁이 뭔지, 무장공비가 뭔지 몰랐기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밤이면 대낮처럼 밝은 조명탄이 쏘아 올려 졌고, 가끔씩 들려오는 총성 때문에 아무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밤낮으로 울려대는 지서(파출소)의 사이렌소리는 굉음을 토해냈고, 경찰과 군인들이 불어대는 호각소리는 극도의 긴장감을 더했다. TV도 없는 깡촌에 짧은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는 것은 라디오뿐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뉴스는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했다.

▲ 북면지소 비상발령
길거리(신장노)에는 군인들만 보였다. 비포장도로에 하루 종일 완행버스 몇 대 정도 오가던 시골에 군인들을 실어 나르는 트럭들이 수시로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신기하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다. 며칠을 그랬을까. 먹을 것도 변변찮은 시절 감자와 보리쌀이 주식이던 때 세끼 먹는 것을 부러워했던 10살 소년에게 무장공비의 잔악한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체국 집배원을 하던 친구의 아버지가 무장공비에 의해 살해당했는데 돌로 얼마나 잔혹하게 짓이겼는지 10살의 소년에게도 너무 큰 충격이었다. 무장공비들은 친구의 아버지를 살해 한 후 시신을 논과 논 사이에 작은 도랑에 매몰하고 나무를 꺾어 덮어 두었는데 살해 열흘 뒤 논으로 나갔던 동네 아저씨가 발견해 신고함으로써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친구의 아버지는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전보를 전해주기 위해 만류하는 동료들을 뿌리치고 산골의 한 조그마한 마을로 갔다가 봉변을 당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당시 소문으로는 집배원의 복장이 경찰복과 비슷하다보니 무장공비가 경찰인줄알고 살해했다는 것이다.

남편의 시신을 본 친구 어머니는 실신을 했고 모든 동네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시신을 보는 사람들마다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우체국 마당에는 무장공비 시신이라며 몇 구가 또 실려 온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10살 소년의 머리에는 무장공비의 모습이 그려졌다. 사람을 저렇게까지 살해 한데는 미치광이 괴물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보름 넘게 비상사태가 발령된 울진은 그해 11월 16일이 넘어서야 조금이나마 한숨을 돌리기 시작했다. 뉴스가 없다보니 온갖 경험담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산골마을에서 내려온 아저씨 아줌마들의 무장공비 체험담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무장공비가 마을에 쳐들어와 북한 발전상을 선전하는가 하면 정치사상교육을 시켰다는 것이다. 또 다른 마을 사람들은 사람을 직접 칼로 찔러 죽이는 현장을 코앞에서 목격했고,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울진군 북면 고숫골의 경우 11월 3일 새벽 5시30분쯤 7명의 공비가 나타나 “경북경찰대에서 주민등록증 사진을 찍어주러 왔다”며 주민을 모은 다음, 사진을 찍고 위조지폐를 나누어주고 사상선전을 한 다음 유격대지원청원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무장공비들은 이때 이 마을에 나타난 양양군 장성읍에 거주하는 전병두씨를 해병대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대검으로 찔러 죽였으며, 주민들이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도록 위협했다.

무장공비들은 울진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만행을 저질렀다. 11월 14일 삼척군 하장면 산골짜기 외딴집에 사는 최찬석 옹(80), 며느리(52), 손자 최동학(15)군을 집에서 100미터 떨어진 야지로 끌고 가서 전원 살해했다.

11월 20일 무장공비들은 강원도 평창군에서 고영일 씨60)와 부인 이형녀씨(61), 며느리 (32), 장녀(6), 차녀 (3)등 전 가족을 집 앞의 개울가로 끌고 가 발가벗기고 칼로 난자해서 살해했다. 다만 아들 고원식 씨(36)는 출타한 상태여서 목숨을 구했다.

11월 25일 자정 경 강원도 영월군에서는 우태봉 씨(27) 집에 도착한 무장공비 4명은 무조건 기관단총을 4-5발씩을 발사 우 씨의 어머니 박옥순씨, 이복 동생 김생규(12), 장녀 영자(4)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부인 안분남 씨(24)는 중상을 입었으며 우씨는 겨우 탈출해 생명을 건졌다.

12월 9일 우리 군의 필사적인 토벌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을 때 무장공비들은 평창군 산간마을에 도착 10세의 이승복 어린이 집에 들이 닥쳤다. 이 때 무장공비들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절규하던 이승복 어린이의 입을 찢어 죽이고 가족들도 함께 처참하게 살해했다.

이승복 어린이의 아버지 이석우씨는 출타했다가 학살의 현장에 돌아 왔다가 낌새를 채고 필사적으로 도주해 살아남았지만 대검으로 30여 곳이나 찔리고 두엄자리에 버렸던 이승복의 형 이승권 군(나중에 학관으로 개명)만 3일후에 의식을 찾고 살아남았고 승복의 어머니와 두 동생 승자와 승수는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 우리군에 사살당한 무장공비
울진으로 침투한 무장공비들은 주민들의 적극적인 신고와 대간첩 대책본부의 지휘 아래 군과 향토예비군을 출동시켜 소탕작전을 벌인 결과 11월 16일까지 3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장공비 소탕작전이 끝난 뒤에도 동네는 흉흉했다. 100여명을 모두 다 잡지 못했으니 어디엔가 또 숨어 있을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항상 조심하고 다녔다. 마치 어디선가 무장공비가 또 튀어 나올 것 같은 느낌에 낮선 사람만 보면 경찰에 신고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당시 도시 사람들이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여름에 동해바다에 해수욕을 왔다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다 신고를 당하는가 하면, 거지 비슷한 사람들도 모조리 신고 돼 경찰이 출동하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이후 동네에는 집중적으로 삐라가 뿌려지기 시작했다. 바다는 물론 산과 들 어디서도 삐라를 쉽게 주울 수 있었다. 학교와 경찰에서는 삐라 수거를 했으며, 하루에도 수 십장의 삐라가 접수됐다. 김일성을 찬양하는 내용들이었다. 삐라를 주워 경찰에 제출하면 연필이나 지우개 같은 것을 주었으며, 나중에는 ‘철방구리’ ‘자유의 벗’이라는 홍보책자도 주었다.

삐라를 열심히 주워 학교나 경찰에 낸 학생에게는 반공상이 주어졌고, 반공 웅변대회가 곳곳에서 시작됐다. 투철한 신고정신을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1970년까지만 해도 울진이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무장공비 침투한 곳 하면 알 정도로 울진은 사람이 살수 없는 첩첩산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죽했으면 무장공비가 나타났겠느냐는 것이다. 울진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산간오지 촌놈으로 낙인이 찍혔다. 그래도 울진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세월은 44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참상은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무장공비-북한괴뢰-간첩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그들의 잔악무도함은 그칠 줄 모른다. 10살 소년에게 각인된 무장공비의 잔인함은 44년 후인 지금도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2000년에 저지른 서해 연평해전 그리고 2010년 천안함 격침과 연평도 포격 사태를 보노라면 북한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내 친구 아버지를 살해한 무장공비나, 대한민국 군인들의 심장에 포격을 가한 북한군이나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북한은 지금까지 모두 4백70여건에 걸쳐 3,738명에 이르는 주요 인사와 민간인 납치, 그리고 국가주요시설 파괴 등 다양한 형태의 만행을 자행하며 전쟁에 버금가는 위기상황을 조성해 왔다고 한다.

이런 북한을 언제까지 인간적 대접을 하려 하는가. 내 친구는 그 때의 충격으로 어린 시절을 악몽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50 중반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며 치를 떤다.

당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내가 당한일이 아니라고 북한을 형제처럼 생각하는 저 종북좌파 들의 심장에는 왜 북한이 포격을 가하지 않는지, 만약 저들이 친구 아버지처럼 무참히 살해당한 충격적인 일을 당했어도 김일성을 외치고 주체사상을 외칠 것인지.

천년을 가도 저들은 변하지 않는다. 붉게 물든 악령의 피는 아무리 걸러내도 오염된 피에서 조금도 낳아질게 없다. 종북좌파 세력들이여 그대들이 외치는 것처럼 그런 통일은 오지 않는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삐걱대는 당신들이 없어지고 모두가 한목소리를 내는 그런 날이 와야만 통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북한이 만들어 준 악령의 올가미를 내려놓고 제발 사람답게 살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내 친구의 아버지 죽음이 부끄럽지 않다는 생각이다.

불과 50여 년 전, 대한민국은 모든 걸 잃었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막 벗어난 우리부모들에게 전쟁은 너무도 가혹했지 않은가.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두 손 벌려 도와달라고 애원하던 대통령의 모습은 온데 간데없고 나라는 온통 종북좌파 논쟁에 휘말려 소란스럽다. 5천만 국민이 몇 안되는 종북좌파의 뻔뻔한 모습을 언제까지 봐야 하는지 답답할 따름이다.

서독 파견 간호사와 광부들, 한국 경제 회생의 기폭제가 되었던 월남전 파병, 사막의 중동건설현장에서 흘린 피 같은 눈물과 땀, 가발공장, 봉제 공장, 신발공장, 섬유공장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수출 상품을 만들었던 우리의 형제들이 나라를 일으켜 세울 때 그대들은 북한을 찬양하며 김일성과 주체사상을 맹신하지 않았는가.

징계다. 사퇴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저들은 국회의원이 되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지금 금쪽같은 시간을 낭비해가면서 잘못된 선택의 산고를 톡톡히 겪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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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식 2012-06-10 19:36:02
종북좌파나 빨갱이나 무장공비나 간첩이나 모두 초록이 동색이 아닙니까. 당해보면 치를 떨꺼여 이넘들아!!

이경삼 2012-06-09 16:20:15
아픔이 담겨 있는 역사입니다.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우리가 영원히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잔악무도한 무장공비는 곧 종북좌파가 있기 때문에 지금도 악랄한 짓거리를 하는 것입니다. 국민여러분 눈을 뜨고 다시한번 빨갱이들을 보아주십시오!

김장군 2012-06-09 16:17:45
그날이 생각나는군요. 진짜 아픔을 당하셨군요. 종북좌파를 우리가 모두 척결해야 북한이 두손들고 항복합니다. 종북좌파 척결 모두 나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