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올바른 개념정립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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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올바른 개념정립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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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근본에서 빗나가버린 국민의식

1. "자유"에 대한 개념 정립을 위한 기초

가정이나 학교에서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말을 들은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와 책임은 연관성이 거의 없다. 이런 표현은 의도적으로 함정(책임)을 파놓고 건너편에서 자유를 인심쓰는 형태다. "자유"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에 대해 명료하게 정리되기 위해서는 먼저 몇 가지 낱말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훈련 : 특정한 목적 달성이나 수준 향상을 위해 일정 기간 집중적으로 받는 것이 훈련이다. 훈련은 진지한 사색보다는 집중적인 반복이 중요하다. 예) 낙하산(비행) 훈련. 개의 조련(시장보고, 길을 안내하고, 마약을 찾는)

교육 : 1.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한 이치, 현상, 원리를 가르쳐서 전반적인 안목과 전문적인 자질과 다양한 품성을 익히도록 하는 것. 2. 이러한 세상과 사회와 인간에 대해서 피교육자 스스로가 자기 삶과 연결시키도록 동기와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

방종 : 동물(인간, 짐승)은 방치해두면 방종해버린다. 예를 들어서 개를 훈련시키지 않고 방치하면 속된 말로 "똥개"가 된다. 개를 훈련시켜놓으면 훈련받은 대로 움직인다. 개는 사고력이 없기 때문에 교육은 필요 없다.

자유 : 자유는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 하늘로부터 받은 천부적인 기본 권리다. 이것을 세부적으로 분류하면 생각(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다. 이는 인간이면 누구나 보장받는 독립적인 자유다.

하지만 법과 사회 질서와 공동체라는 의미가 추가되고 혼합되면 개인의 독립적 자유는 제약을 받게 된다. 특히 함께 살아야 하는 인간이 모두들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표현하고 행동해버리면 세상은 엉망이 되고 만다.cs

따라서 진정으로 자유를 누리려면 기본적인 자유에 자율적이고 자발적이고 적극적이라는 질적인 의식과 실천이 추가되어야 한다. 하지만 미리 예의를 정하고 기준을 강제하면 적극적이고 자율적인 존엄성이 상실되어버린다.

이미 역사 발전은 천부적 권리(생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발판으로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자기 할 일을 적극 찾음으로써 각종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까지 개척해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보자. 엄마가 딸에게 공부했니? 손발은 씻었니? 청소했니? 심부름했니? 등을 묻는다고 해보자. 이렇게 엄마가 딸에게 물을 때마다 딸이 항상 "예"라고 대답했다면 엄마는 더 이상 딸이 해야 할 일을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 이는 딸이 엄마에게 간섭받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인간이 자유를 제대로 누리려면 해야 할 일은 물론이고 자기 스스로 할 일들을 찾아서 자율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해당 사회에서 이런 태도를 지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에 따라서 그 사회의 수준과 분위기와 미래가 좌우된다.

훈련은 자기 생각보다 교관의 가르침에 따르면 된다. 또한 교육은 자기 생각도 필요하지만 주어진 교재나 과제 내용의 범위 내의 생각이면 충분하다. 훈련과 교육은 가르침에서 벗어나면 그에 합당한 책임(감점이나 벌칙)이 따른다.

교육이나 훈련은 내용과 범위나 형식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훈련이나 교육은 받은 그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반드시 피해자나 손해나 문제가 발생된다.

하지만 자유는 훈련이나 교육보다 훨씬 창의적이고 주체적인 월등한 개념이다. 이처럼 찾아서 실천하는 자유는 책임으로 연결시킬 수 없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자기 의무를 모두 마치고 남의 일을 찾아서 도와주고 있다고 해보자.또는 자기 할 일을 끝내고 새로운 시도를 시도한다고 해보자.

이처럼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고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할 일을 찾는 사람에게 엉뚱하게도 책임 소재를 따진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자신이 일을 찾아서 스스로 행한 일에 잘못이 생기면 다양한 사색이나 분석이나 재 시도를 위한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따라서 자유와 책임을 관련시켰다면 자유에 대한 개념 정리나 그 이후의 사색이 없었다는 흔적이다.

그럼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이야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이는 타율적인 울타리 안에서 형식적인 자유를 제공했을 때에 해당된다. "너는 학생이니 공부해야 한다"고 기본 울타리를 정해놓고 "너를 위한 공부이기 때문에 네 스스로 알아서 열심히 해라."라고 가공된 거짓 자유를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부를 하지 않을 경우에는 자유를 주었음에도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억지(비교, 꾸중, 매질)를 쓸 수 있다. 이는 누구를 위한 공부이며 누구를 위한 자유이며 누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자유인지조차 정리되지 않은 무지로 인한 억지와 횡포다.

따라서 책임과 연결된 채 주어진 자유는 구실을 잡기 위한 자유이거나, 함정을 파놓고 사람을 올가미에 집어넣기 위해 타율적으로 제공된 자유다. 선진국일수록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이런 몰상식한 자유는 없다. 이런 자유는 혜택을 받을 사람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반대로 강자가 약자를 통제하거나 건수를 잡기 위한 자유다.

이런 의미로 보면 미덕이나 예절도 강자가 구실을 잡는데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따라서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에서의 자유의 의미는 몽둥이를 거머쥔 사람이 쥐덫 위에 먹이를 올려둔 것과 같은 미끼용의 무서운 자유다.

한국인들의 성장 과정으로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만한 자질과 자격을 확보하기가 어렵다. 이는 사색할 정신적인 여유와 시간적인 기회를 공부와 학교에 빼앗겨버린 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진정한 자유를 박탈당한 것이며 자유가 없는 인생은 쓰임새로 이용되기 위해 강요된 삶을 사는 지옥과 같다. 북한이 생각할 자유를 잃고 김일성 부자로 세뇌되었다면 남한 역시 생각할 자유를 빼앗긴 채 공부에 세뇌를 당해왔다.

이는 한 때 국민들을 일꾼으로 써먹기 위해 지식을 빨리 가르치고, 이를 비교 평가해서 사람을 뽑아내고, 일을 열심히 시켜서 돈을 벌어주는 기능인처럼 취급했던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인 형태가 답습되고 있다. 강요된 교육의 범위에 들지 못하고 낙오된 사람들은 방치하고 포기해버린 교육이 되어왔다.

자유란 누군가에게 제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 이미 자기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개인이 타고난 생각의 자유, 표현의 자유, 행동의 자유를 전적으로 보장하고 적극 존중해서 개인의 존엄성 발휘를 최대한 장려하고 있다.

그리고 발휘된 존엄성의 협조를 통해 공통의 인권과 복지를 실현시킴으로써 질적인 보람과 가치가 동반된 아름다운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다. 이는 겨우 양적(빵)인 목표와 소유와 부귀영화를 도모하는 수준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제도다.

우리 한국은 총체적으로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다시 어두운 역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제 새로운 민주주의를 시작하든, 양반과 관리가 설쳐대던 왕권주의로 돌아가든, 통제와 견제와 탄압이 심한 독재국가로 돌아가든, 아니면 이대로 위기를 방치하며 망할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2. 자유에 대한 올바른 개념 정립

"민주주의" 하면 가장 먼저 "자유"가 떠오른다. 이 두 낱말은 "자유민주주의"로 함께 불려질 정도로 밀접하다. 그럼 민주주의가 인간의 자유를 보장해주는가. 아니면 자유가 민주주의를 만들어서 유지시키고 발전시켜주는 것인가.

우리는 민주주의가 자유를 보장해준다는 방식으로 이해해왔다. 때문에 한국은 자유가 주어지면서 과거의 봉건적인 통제의 틀이 상당 부분 깨졌다. 하지만 방종의 수준에 머물러버린 나머지 민주 시민의 자질에 함량 미달인 상태로 수많은 시행착오와 혼란 속에서 총체적인 한계에 빠졌다.

노예들은 자유가 없기 때문에 주인이 시킨 일을 하면 의식주는 해결된다. 만일 시대가 바뀌어서 노예에게 갑자기 자유가 주어졌다고 해보자. 이 때 노예들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첫째, 그 동안 죽도록 일만 했기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대충 얻어먹으며 연명만 하려고 한다. 이는 거지가 된 것이다.

둘째, 그 동안에는 주인이 시킨 일만 했기 때문에 아예 생각 자체가 없다.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의식주만 해결하는 정도에서 그냥 빈둥대며 대충 산다. 이는 일종의 방종이나 타락이다.

셋째, 일반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배우면서 열심히 일한다. 이는 노예를 버리고 일반 백성이 된 것이다. 하지만 노예들이 갑자기 나라를 책임지는 주인으로 의식과 생활을 바꾸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면 이번에는 왕권주의에서 일반 백성을 보자. 일반 백성은 노예와는 다르기 때문에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 일을 통해서 의식주 해결은 물론이고 근심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려고 한다.그런데 갑자기 시대가 바뀌어서 이들이 모두 민주주의에서 살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사회의 주인으로서의 주체적인 정신이나 자질을 갖추기는 힘들다. 아마 사람들은 과거에 왕과 양반과 벼슬이 영위했던 호의호식을 이뤄보려고 노력할지도 모른다.

민주주의에서의 자유를 받아놓은 국민은 노예나 백성과는 정반대의 정신과 생활이 요구된다. 사회 전체적인 관점에서 월등한 보람과 가치와 인류 미래까지 예상하는 차원 높은 관심과 자질과 노력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개인에게 보장된 자유를 전체 사회나 인류 미래를 위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보듯이 너무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다", "과정이 필요하다"는 등의 막연한 변명들을 해왔다.

과거에는 가족의 생계를 불안전한 사회 환경 속에서 각자 해결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는 개인에게 보장된 자유를 전체에 도움되는 방향으로 발휘해서 월등한 사회를 이룸으로써 되돌아오는 보람을 복지와 후생으로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이는 자유를 빙자해서 방종하고 타락하는 등 혼자 개인플레이하는 태도가 아니다. 주어진 자유를 적극 활용해서 빵과 인권과 복지와 행복과 평화와 미래까지 동시에 해결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시스템이다.

그래서 민주주의에서 보장된 자유는 노예처럼 죽도록 일하거나, 백성처럼 먹고살려고 일하거나, 주변의 눈치를 살피거나, 서로 경쟁하고 시기 질투해버리면 절대 체제를 지속할 수 없다.또한 자유민주주의는 특정인에게 독점 권력을 허용하지 않고 서로의 독립적 지위를 부여하고 선의의 가능성을 인정해준다.

그래서 구성원들은 인생에서의 관심사를 의식주, 소유, 독차지, 돈벌이에 두지 않고 서로 앞장서서 세상에 필요한 일, 세상에 유익한 일, 세상을 즐겁게 만드는 일, 세상을 편리하게 만드는 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일, 세상에서 새로운 분야의 일, 미래나 후손에게 도움이 될만한 일을 찾아서 연구하고 애정과 관심을 쏟고 참신한 인재를 발굴해서 지원한다.

이는 우리 국민에게는 이상적이고 꿈같은 이야기나 같다. 하지만 선진국들은 이런 적극적이고 순수한 동기로 인해서 창의력이 발휘되었으며 상상하지 못했던 무한한 잠재력도 발굴했다. 이런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구체화되면서 계속 발전을 해온 것이다.

이들은 소유나 비교나 경쟁이라는 일차원적인 수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노약자나 장애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도록 사회보장 제도를 시행하고 확대했다. 이렇게 전체 사회를 방종과 향락에서 방지함과 동시에 과정에서 자연스런 자질 검증을 통해 지도자를 선출했다.

이처럼 질적 가치가 적극적으로 전제된 자유를 통해서 다양한 보람을 찾기 위해 세상의 구석구석까지 찾아다녔다. 또한 자기 보람과 가치 추구가 중요했기 때문에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만의, 자기다운, 자기에 알맞은, 자기로서의 삶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예를 들면 프랑스에서 여성의 매력은 미모나 옷차림이 아니라 개성이다. 프랑스는 미모에 신경을 쓰거나 좋은 옷을 입은 여자들은 주로 길거리에서 남자들에게 호객 행위를 하는 여성들이다.

이처럼 선진국은 자기 개성과 삶에 충실하기 때문에 돈이 벌리고 성공이 되풀이되어도 옆길로 탈선하지 않고 더욱 사회 공헌도를 높인다. 이렇게 앞선 사람들은 일반 대중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일부에서 좋지 않은 일이 발생되더라도 얼마든지 극복하고 발전하면서 인류 미래까지 연구하고 개척해왔다.

이처럼 일반 국민들의 다양한 자질과 노력이 사회적 공헌으로 이어짐에 따라서 전체적인 평균점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과거 왕권주의나 양반 관료 사회에서는 극소수가 세상 전반을 좌지우지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는 각자 지닌 존엄성을 바탕으로 개인적 특성과 재능은 물론이고 창의력과 잠재력과 풍부한 상상력까지 활용해서 전체 사회를 꾸려가고 미래를 개척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정도 성공이 이루어지면 더욱더 개인 위주로 바뀌면서 사회에 좋지 않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선진국에서 개발하고 만들어놓은 제도를 쉽게 모방해서 생계보장과 호화사치와 입신양명은 물론이고 심지어 자손만대의 부귀영화까지 꿈꿔온 참으로 얄팍하고 한심한 수준이다.

그래서 지금도 결혼식과 장례식, 동창회와 향우회, 오락실과 카지노와 화투판과 단란주점을 출입하며 대충 산다. 심지어 우리는 과거 피해의식과 열등의식의 잔재조차 벗어버리지 못한 채 이기주의와 연고 중심의 저질적인 사회와 청탁과 압력과 이권 개입과 부패도 행해지고 있다.

특히 자유를 위한 필수 재료인 자율적이고 자발적이고 적극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사고, 생활, 관계에서는 치명적인 장애를 겪어왔다. 우리의 학교 교육, 사회분위기, 예절과 예의, 기성세대의 의식과 태도 등 국민 의식 전반이 심각하다. 지금까지 망하지 않고 버틴 것도 다행이다. 이번 기회에 우리 국민성을 인류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최고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

3. "자유"는 형이상학을 실현시키는 필수조건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인간이 되겠다.』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형이상학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돼지 1마리와 100마리, 사람 1명과 100명의 차이를 예로 들어보자. 100kg짜리 돼지 1마리와 100마리의 차이는 무엇일까? 오직 수량(1과 100)과 중량(100kg과 10,000kg)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돼지들은 서로를 흉보거나 죽이거나, 웃기거나, 돕거나, 고통스럽게 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돼지는 인간에게 10,000kg의 고기를 제공해준다.

그럼 인간 1명과 100명의 차이는 무엇일까? 인간은 돼지처럼 수량의 차이는 거의 중요하지 않으며 인간 100명이 모여지면 첫째, 기쁘고 슬프고 불쾌하고 고통스럽고 등 감정이 생겨서 교환된다. 여기서 인간은 이미 형이상학적인 존재이며 사회적 동물일 수밖에 없다.

둘째, 엄청나게 거대한 힘과 능력이 만들어진다. 여기서 힘과 능력이란 개인의 존엄성이 합해져서 만들어지는 자유, 인권, 복지, 희망, 무한한 잠재력(탐구, 도전, 개척, 개발)이 실제로 현실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개인 혼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월등한 능력과 힘이 집약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구성원들의 태도에 따라서 미개국, 빈민국, 후진국, 복지국가도 가능해진다.

이처럼 어떤 사회든지 구성원이 인생(자신)을 어떤 식으로 살아가느냐에 의해서 이후의 모든 것이 결정된다. 구성원의 의식과 관심사가 정분, 이익, 격식, 전통, 혈통, 과거, 사후를 위주로 나갈수록 후진적인 사회가 만들어진다. 이런 원리에 의해서 사회적인 제도 문화 의식 관행 등을 모두 바로 잡을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어쨌든 돼지와는 달리 인간은 서로를 죽이거나, 피해를 주거나, 편을 나누거나, 차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인간은 평생을 통해서 돼지 1마리의 구실조차 못할 수도 있다.

물론 개인의 인생은 각자의 태도(노력)나 운명 여하에 달렸다. 하지만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는 구성원들에게 진지한 가치관(형이상학)적 요소가 담겼는지, 어떤 공통 가치관이 설정되었는지에 의해서 좌우된다. 모든 분야가 유기적으로 얽혀서 돌아가는 복잡한 현대 사회는 자기 목적과 필요로 나아갈수록 지저분한 사회와 불투명한 미래가 전개된다.

그러나 함께 몸담은 사회 전반에 애정을 쏟고 수고하면 월등한 형이상학적인 개념(자유, 평화, 정의, 인권, 복지)의 구체적인 실현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희망적인 정서(보람, 행복, 기쁨, 사랑)와 함께 하게 된다.

인간은 아름다운 세상을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서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더욱 새로운 이상과 가치와 질서를 연구하고 실현시켜 가는 존엄한 존재다. 선진국에서 애써서 만들어놓은 것을 쉽게 모방해서 이익을 누리면서도 고마움을 모르고 서로 경쟁하고 비교하고 싸우는 사회는 절대 오래 갈 수 없다.

결론지어서 인간은 어차피 형이상학적인 존재이며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어코 형이상학을 골치 아픈 것처럼 외면하면서 빵과 오락과 유희와 이익을 찾아서 감각적이고 반사적으로 살아가느냐, 적당히 살아가느냐, 형이상학을 누리고 살아가느냐, 새로운 형이상학을 계속 연구하고 개발하고 개척해주느냐 중에서 구성원들이 주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서 사회적 수준과 미래가 좌우된다.

이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순수하고 아름답고 적극적으로 사용한다는 전제하에 가능하다. 특히 개인으로 하여금 생각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나, 행동의 자유를 부자연스럽게 만들거나 방해하는 문화, 의식, 격식, 절차, 예절, 전통, 관습을 손보아야만 다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이런 바탕이 전제되지 않은 것이 과거 역사였으며 특히 한국이 정지되어버린 원인이다.

자신은, 자기 부모나 자녀는, 친구들은, 국민들은 그 동안 어떤 자유를 생각해왔는지 눈을 감고 되새겨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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