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잊지 못할 추억, 1992년 추석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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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잊지 못할 추억, 1992년 추석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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윷놀이 끝나고 장대비에 경운기 타고 가다 다리에서 떨어져 몰살당할 뻔

 
   
  ^^^▲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공교롭게 우리마을 친구 2명만 다리 위로 떨어지고 9명이 밑으로 경운기와 함께 떨어진 거죠.
ⓒ 김용철^^^
 
 

26살 늦은 나이에 방위(防衛)를 받느라 고생 깨나 하고 있던 1992년. 추석이 오기를 눈 꼽아 기다렸다. 방위도 군대라고 한참 후배들에게 당한 설움은 대단했다.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잠시 잊고자 하니 얼마나 기다려졌겠는가. 명절은 더디 다가왔다.

이틀 전부터 한두 명 어울려 조촐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추석 때 어찌 놀까 궁리한다. 그렇게 전야는 흘러갔다. 하루 전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전화를 바삐 돌린다. 명색이 32명 졸업생의 동창회장이었으니 나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병규야 씨벌놈아, 언제 왔냐? 오늘 저녁에 얼굴 좀 볼래? 병천이는 안 왔냐?”
“방금 왔다 색꺄! 병천이는 이따가 온다더라.”
“그래?”
“영만이랑 왔다던?”
“그램마. 밥 묵고 강례 영만이 집으로 너라도 먼저 내려와.”
“알았어.”

숫제 촌놈들의 대화 방식은 욕 덩어리로 시작해서 욕지거리로 끝난다.

자그마한 시골 학교 출신인 우리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거르지 않고 모여서 놀았다. 여자들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서른 두 명 중 스무 명 가량이나 모였다. 응당 선후배들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절대 동기가 아니면 끼워주지를 않았다. 명절 때 마을마다 돌며 놀았다. 순시하듯 집마다 음식을 얻어먹고 술을 마셔댔다.

1992년 추석에도 멀리 서울, 경기도, 부산에서 출발한 아이들이 속속 도착했다. 나이를 적당히 먹은 따라 아무 때고 만날 수 있는 남자아이들을 평소 연락 책 노릇을 하던 친구들에게 건넌 마을 강례로 모이라 했다. 40여 호 되는 강례 마을은 두 개로 나뉘어 있는데 윗 강례는 다섯 가구 밖에 안 된다. 그곳이 다섯 마을의 중간이다. 별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 길이 1.2cm 지름 두께 8mm 나무를 두 쪽으로 쪼개 네개를 만듭니다. 변형이 되지 않는 나무로 만들어야 두고두고 쓸 수 있습니다.
ⓒ 김규환^^^
 
 

또래 친구들과 형 친구들, 후배들까지 열댓 명이 모였다. 전(煎) 몇 접시, 국물 한 두 그릇에 1.8l 대(大)병을 갖다놓고 술을 마셔가며 네모난 멍석을 깔고 윷놀이를 시작했다. 특히 강례와 평지마을 어른들은 젊은이들이 시끌벅적하게 노는 걸 좋아하셨다. 술과 안주를 내주면서 까지.

“모야~!”
“숯(윷)이야~”
“에잇, 뙤(도)다. 그래각고(그래가지고) 따라 가겠냐?”
“야, 잡고 가야. 잡고 가라니깐!”
“꽁쳐서 가자.”
“아니야! 엄버(엎어) 엄브라니까! 엄버서 도망가.”
“야 땅 밑에서 보면 걸이다.(‘도를 땅 아래서 보면 걸이 된다’는 유머러스한 말로 약간은 놀리는 말)”

쭈그리고 앉아 윷짝을 던지고 허벅지나 엉덩이를 “탁!” 치며 자신이 바라는 게 나오길 바란다. 모나 윷이 나오지 않아도 5~6m 멍석 건너로 윷을 가져가 다시 할 태세다.

남부지방 윷은 새끼손가락 끝마디 굵기와 길이의 대추나무나 감나무를 두 개 잘라 네 쪽을 만든다. 이건 순전히 실내용이기 보다 멍석을 깔고 밖에서 하는 야외놀이다. 윷이 얼마나 작던지 골똘히 쳐다보지 않으면 어둠침침한 곳에서는 보이지 않을 정도다. 말판은 웬만한 집이면 나락 널던 멍석에 그려져 있다. 희미하면 아무 풀이나 숯 덩이 하나 가져와서 덧칠하면 된다.

간장종지 깍쟁이에 그 윷짝을 넣어 흐르지 않게 쥐고 있다가 건너편에 앉아서 “휘익~” 던지기는 초보자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익숙지 못한 나 같은 이는 빠져서 장단을 맞춘다. 말판을 대신 써주던가, 술 심부름을 하는 것이다.

그 짓도 꽤 재미있다. 친구들 불러 술이나 홀짝거리면서. 개평(노름이나 내기 따위에서 남이 가지게 된 것 중에서 공으로 조금 얻어 가지는 것)이나 뜯으니 돌아가는 판을 들었다 놨다를 할 수 있다. 돈까지 생기니 할 만한 일이었다.

닭을 네 마리 내기로 하는 동안 두 명이 양계장에 다녀왔다. 미리 고리를 뜯어 닭 값을 마련하고 이제부터는 ‘돈 놓고 돈 먹기’가 시작되었다. 다소 격앙된 소리가 들렸지만 판에 수굿(자신이 윷놀이를 하지 않을 때 윷을 놀고 있는 둘 중 한 사람에게 돈을 묻으면 이길 경우 100%를 받는 방식으로 지면 한푼도 없다. 베팅의 일종.) 들어간 사람말고는 관심을 쓰지 않는다.

 

 
   
  ^^^▲ 덕석(멍석) 바닥에 대고 툭툭 세번 쳤다가 상대편으로 던집니다. 엄지와 검지는 그대로 종지기를 잡고 중지, 약지, 새끼손가락을 살짝 펴서 던지는데 아무나 못합니다. 숙달된 조교들은 돈 깨나 잃었을 겁니다.
ⓒ 김규환^^^
 
 

밤은 깊어가고 1시를 넘길 무렵 닭 네 마리를 사들고 왔다. 추석 전날 밤이 깊고 다들 술에 취하여 닭 잡아 죽 쒀 먹는걸 포기했다. 윷놀이를 마치고 각자 마을로 돌아가던 중에 일이 터졌다.

술을 거나하게 마신 내가 장난치다가 들고 있던 닭을 친구 옆구리에 치니 “꽥-” 하더니 죽고 말았다. 살펴보니 창자가 터져 밖으로 나와 너덜거리고 있었다.

“야, 이건 안되겠다. 창시가 터져부렀어야~. 밤새 놔두면 쉬파리 똥 깔리겠는데...”
“논에다 던져 부러!”

창자 터진 것은 논바닥에 던져졌고 또 한 마리는 후배녀석들에게 인심을 써버렸다. 이제 두 마리만 남았다. 차대기에 닭을 짊어지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추석날 점심을 먹고 심심하던 차 동네 친구들 의중을 물었다. 삶아 먹는데 다들 흔쾌히 동의했다. 물가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

“야, 형채야! 평지 꼴짝으로 올라와라.”
“알았어. 오토바이 타고 올라갈텡께 먼저 가고 있어라잉.”
“니네 마을이랑, 강례 애들한테는 네가 미리 영만이를 통해 전화해 놓아라. 알았지?”
“지금 출발할 거지?”
“그래, 4시 반에 보자.”

영만이네에서 40인 분 백철(白鐵) 솥을 하나 빌렸다. 마늘과 쌀, 소금을 준비하고 닭을 메고 울퉁불퉁한 길을 1km 가량 걸어올라 갔다. 1년에 몇 사람 다니지 않는 한적한 길, 농로로 이어지는 다리거리에 예닐곱의 친구들이 돌을 주워와 물가에 솥 단지를 걸고 냇가에 걸린 나무를 한 다발씩 주워 오느라 바쁘다. 그 동안 닭 잡는 건 내 몫이다.

1급수 냇물을 붓고 끓였다. 소금간을 약간 하고 쌀을 나중에 넣어 푹 삶으니 솥에 한 가득. ‘누가 이걸 다 먹을까?’하는 엄청난 양이다. 이동전화가 없던 때라 데리러 간 아이는 이미 와 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규섭이 소식이 감감하다. 기다리다 냉면 그릇에 퍼서 대접에 술을 따라 세 그릇 씩 먹고 있는데 막차가 지나간다.

“아저씨, 닭죽 좀 먹고 가요~”
“종점이 쩌긴디 그냥 가면 된다요. 한 그릇 잡수고 가싯쇼.”
“나까장 먹을 게 있을랑가요?”
“하믄요. 있제라우. 아예 저녁밥으로 몽창드시고 가싯쇼.”

 

 
   
  ^^^▲ 말판 그리는 사람이 가장 열성적으로 놀이를 즐깁니다. 멍석 두루루 펴서 깔고 바닥 한번 대빗자루로 쓸고 숯이나 풀을 한 줌 뜯어 그리거든요.
ⓒ 김규환^^^
 
 

친구들은 고향에 온 탓인지 전라도 사투리를 마구 써댔다.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말이 종점이지 차 한 대 다니기에도 비좁고 길바닥은 엉망이다. 열댓 명밖에 살지 않은 마지막 마을 평지는 해발 400m가 넘는 곳이다. 젊은 기사는 한 그릇 후딱 떠먹고 먼지를 풀풀 흘리며 버스를 몰고 산 마을로 기어올라갔다.

비가 한 두 방울 오기 시작했다. 솥바닥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할 무렵 규섭이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남은 세 양푼 넘는 분량을 솥 째 부여잡고 바닥을 닥닥 긁어 배불리 먹는다 미안했던지 설거지까지 해놓는다. 이내 날이 어두워졌다.

“그만 올라가자.”
“이걸 다 들고?”
“배부르겠다 뭐가 문제여? 아까 참에도 들고 왔음시롱~”

빗줄기가 굵어지자 비 맞은 닭처럼 잔뜩 웅크리고 서둘러 올라갔다. 남자 19명 중 14명이나 모였다. 비 들이치지 않은 대문간에서 오리 2마리를 걸고 윷놀이를 시작했다. 규섭이와 나는 한 패가 되고 상복이와 영만이, 형채, 인수 등 다른 편에도 똑 같이 여섯 명씩 갈렸다.

상복이가 먼저 시작했다. 윷짝을 자그만 간장종지에 집어넣는다. 손에서 빠지지 않게 “툭툭” 두 번 멍석 위에 쳐서 고르고 손을 뒤집어 “휘휘” 두 번 저어 “훅” 던졌다. 다음 차례는 오늘의 영웅 규섭이다.

규섭이 손에 건네진 윷이 사리인 다섯 ‘모’에 ‘걸’ 한 번으로 말이 엎어서 네 마리가 한꺼번에 나고 말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먼저 붙은 두 사람은 그걸로 끝이었다. 상복이는 윷 깍쟁이 한 번 만져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다들 어리둥절. 평소 말 많던 인수 왈, “내 참 싱거워서. 에잇 못해 먹겠네!”

 

 
   
  ^^^▲ 윷놀이 판에서 10년지기라는 말이 나왔을까요? 싸움판이 안되도록 자중합시다. 즐기자는 겁니다.
ⓒ 김규환^^^
 
 

다음 판이 이어지자 닭장으로 갔다. 두 마리 꺼내와 신경통에 좋다던 오리 피를 소주에 타서 나눠 마셨다. 털을 다 뽑고 솥에 불 때는 일은 내 일이 되었다. 14명에 친구 매형과 가족 10명 등 먹을 입은 스무 명이 넘는다.

“어머니 푸짐하게 하세요. 국물도 많이 붓고 푸성귀도 듬뿍 넣으시라구요.”
“그러자. 그래야 아들들 먹고 식구들도 조금 맛 볼 수 있제.”
“예. 저희들은 두세 양푼 씩 먹을 겁니다. 식은 밥은 많이 있죠?”
“오냐. 말아먹을 만큼은 충분히 있제. 부족하면 더 하면 되는 것이고.”

밖에 나가보니 규섭이는 제 기분에 취해 있다. 비가 바람에 실려 대문간으로 들이치는데도 아랑곳 않고 윷놀이에 열중하느라 얼이 빠진 듯 하다.

탕이 나가자 다들 열심히 먹는다. 서로를 격려하며 많이 먹으라며 챙기는 친구들이 정겹다. 술을 그릇에 가득 따라주니 대(大) 병이 몇 개가 비워졌는지 모른다. 마다 않고 마셔대니 웬만한 집이면 이미 거덜났을 법하다.

두세 양푼씩 밥을 말아먹고 각자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다. 주인장인 병규가 몇 번이고 방에 들어갔다 오더니 씨부렁씨부렁 불만이 가득하다.

“왜 그래 병규야? 우리 그만 갈게.”
“기다려봐야 차로 가게.”
“야 됐어 임마. 이럴 땐 걸어가는 게 낫겠다. 비가 너무 많이 오고 술도 먹어서 위험해.”
“씨벌놈이 차 좀 빌려 달라했더니 안 빌려 주네. 저 새끼 또 오기만 해봐라.”

제 매형과 실랑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말리느라 시간이 꽤 지체되었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기어이 데려다 주겠다며 경운기 시동을 걸었다. 장대비가 오는데도 “통! 통! 통!” 오토바이에 한 명 타고 먼저 가고 12명이 짐칸에 올라탄 게 새벽 1시였다.

 

 
   
  ^^^▲ 오른쪽에 보이는 마을이 강례라는 마을이고 저 멀리에 있는 마을이 평지입니다. 평지는 얼마나 평평한 땅이 그리웠으면 이름을 그리 지었는지 모르겠어요. 뒷편은 곡성군 석곡면이고 좌측 너머는 곡성군 삼기면, 겸면 일대입니다.
ⓒ 김규환^^^
 
 

3단에 엑셀을 최고로 올려 빗물에 패인 자갈길을 엄청난 속도로 내려간다. 다들 맘껏 취해 째지게 기분들이 좋다. 3km를 내려오는 동안 쉬지 않고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며 반은 미친 듯 흥겹다. 비는 그치지 않고 하염없이 내려 허벅지까지 차 올랐다.

한 마을을 지나고 학교앞 다리를 막 건널 때, 형채가 오토바이를 세게 몰아 제 동네로 쏜살같이 지나간다. 이때 경운기에 탄 한 놈이 “삼순아~” 부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코너를 돌아 다리에 대가리를 걸쳐 2미터 가량 넘어선 순간! 시집간 삼순 씨가 온다는 소리에 운전하던 병규 마저 좌측을 보고 말았다. “아뿔싸!”

찰나, “아악-” 소리와 함께 친구들을 실은 채 다리 밑으로 “쾅" ”꽈당“하며 떨어지고 말았다. 12명 중 우리 마을 병문이와 나만 다리 위로 간신히 뛰어내렸다.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이거 큰 일이다 싶었다. 이러다가 소중한 친구들 모두 몰살당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엄습 해왔다. 이틀 간 부어댔던 술이 확 깨며 추위가 몰려왔다.

“아이고 머리야!”
“애고 나 죽어~”
“내 다리~”
“엉, 엉, 엉”

아수라장.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때아닌 수해참사 복구현장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앞 대가리는 다리 밑으로 기어 들어가고 사람을 실었던 짐칸은 따로 분리되어 다리 아래쪽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몇 명은 불어난 물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사람만 부축해서 길가로 기어올라온다.

“괜찮냐?”
“앗야~”
“어디? 다리가 아프냐?”
“뼈가 부러진 것 같아?”
“그래 잠시 있어봐.”
“아이고 머리야, 머리가 깨졌어.”
“영만아, 어디 어디? 일단은 괜찮은 것 같으니까 저기 가게에 들어가 비 좀 피하고 있어라.”

 

 
   
  ^^^▲ 이 다리에서 떨어졌습니다. 그 땐 난간도 없었지요. 2002년에야 새로 다리를 놓았습니다. 물이 2미터 정도는 차올랐으니 망정이니 정말 끔찍한 변을 당할 뻔 했습니다.
ⓒ 김규환^^^
 
 

마침 그 골짜기에 하나 있던 학교앞 점방에 모여 술을 마시고 있던 형이 달려 나왔다. “규환아~”를 세 번 불렀다. 한참 물 속을 쳐다보며 동생을 찾던 형은 울먹이고 있었다. 아무 소리 않고 친구들 끌어올리는데 바빴던 상황에서 대답하기도 뭐했다.

평소 다툼을 많이 했지만 형제라는 게 무언지 확실히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래, 우리형은 나를 이렇듯 아끼고 있구나. 내가 못난 놈이야!’

사람은 순식간에 늘어나 서른 명이나 되었다. 사고 현장에서 빠져 나오지 않고 물가에 배를 움켜쥐고 있던 규섭이가 눈에 들어왔다.

“규섭아 괜찮냐?” “으응~”
“정말 괜찮냐고?” “끄응~”

낌새가 좋지 않았다. 술이 적당히 오른 점방 형님께 차를 빌리고 운전을 부탁했다. 머리 아픈 영만이와 다리 부러졌다던 인수도 같이 태웠다. 결국 30리 근처 병원에 가보니 장 파열로 이 물질이 몸 안에 가득 퍼지고 있어 위험하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동네 형들은 점방으로 들어갔다. 잠잠해졌다. 비를 쫄딱 맞으며 다시 인원 점검을 해나갔다. “형채는 집에 갔고...세 명은 실려 보냈으니.” 현재 11명이다.

“어? 상복이?”
“정말 상복이가 없네.”
“얼른 다리 밑 냇가로 가보자. 아래 다리까지 떠내려갔을 수도 있으니까.”

신발이 떠내려 간 터라 맨발로 풀숲을 헤치고 물에 뛰어들었다. 100여 미터 다리께 까지 가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없다~. 어쩌지?”

다들 소란스러워질까봐 가고 남은 병규와 병문와 함께 소사아저씨 댁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해 소리내어 “엉! 엉! 엉!” 울었다. 마냥 기다릴 수 없어 논두렁길을 맨발로 걸어 혼자 기거하고 있던 제각(祭閣)에 가서 전화를 해보았다.

“어머니 밤늦게 죄송합니다. 광준데요. 상복이 친굽니다. 상복이...”
“상복이? 아까 집에 와서 잠자고 있는데.”
“예~. 알겠습니다.”

놀라는 기색을 할 수 없었다. “휴~” 동시에 한숨이 몰려 나왔다. 듣고 있던 친구는 미친놈이라 했다. 죽었다고 믿었던 놈이 멀쩡하게 살아있다니.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알아보니 노래를 흥겹게 부르며 내려오던 중 자신의 집 앞에서 훌쩍 뛰어 내렸단다. 우린 또 한 번 기뻐서 흐느껴 울었다.

다음날엔 친구들이 모두 모여 광주로 규섭이 병 문안을 갔다. 배를 갈라 퍼져있던 이 물질을 걷어내고 대청소를 거나하게 한 후 여섯 시간만에 수술에 성공했다. 같이 간 두 녀석은 밤새 방귀를 끼도록 도왔다.

제일 많이 먹은 규섭이의 배 상태는 어떠했을까?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닭죽 세 양푼은 너끈했고, 오리탕에 밥 말아먹기를 세 양푼이었다. 그리 먹어댔으니 안 터지고 배기겠는가? 병 문안 간 친구들은 이걸 두고두고 말하며 한없이 웃었다.

하지만 그 뒤로 우린 한동안 규섭이가 사는 강례에 가지 않았다. 꺼려했다. 멀찌감치 친구 아버지가 보이면 피하기 일쑤였다. 모이는 횟수도 차츰 줄어들었다. 운전자인 병규네 집안과 규섭이네 집 사이에 다툼이 있었지만 몇 해 안가 모두 해소되어 지금은 잘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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